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냐?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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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분노 그 일상성
븐노는 다른 죄들에 비해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가까이 피부로 느끼는 감정이다. ‘분노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예> 전쟁 - 시위 - 운전 - 일상 - 가졍 - 인터넷상)
한편으로는 분출되지 않고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분노도 많다. 이렇게 억누른 분노는 결국 곪아 터지거나 다른 병의 원인이 된다. (예> 한국 중년 여성의 화병, 남성들의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분노는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그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어떤 때는 마치 폭탄이 터진 것같이 처참한 파편과 잔해를 남기기도 하는데, 개인이나 집단 간의 분노는 증오를 낳고 결국 당사자들을 원수들로 만들어 버린다. 내면에 쌓인 부논는 결국 자신을 해치고, 언젠가는 타인을 향해 폭발하며 그 결과는 걷잡을 수 없이 파괴적이다. 그래서 성경은 분을 터뜨리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며 또 분을 품더라도 해가 질 때까지 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런 감정 및 의로운 분노
분노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의 큰 줄기는 그것이 통제해야 할 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분노는 인간이 지닌 자연스런 감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퀴나스는 분노가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현이고, 무엇보다 자신이나 어떤 특정 대상에 가해진 위협이나 상처 때문에 촉발되는 반응이라고 보았다. 즉 분노는 기쁨이나 슬픔과 다르지 않은 감정인 셈이다. 따라서 분노 자체는 악이 아니며, 그것이 지나치거나 모자라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미덕이 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도 때로 분노했다. (모세, 다윗, 느헤미야 그리고 예수님) 이런 분노들은 한결같이 자기 유익과는 무관한,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를 위한 동기에서 초발된 의로운 분노였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도 분노하신다는 사실이다. (시 78:49)
하나님의 분노 1)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속성에서 발현되는 자연스런 모습이다. 불의나 죄는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기에 (시 5:4), 하나님은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시 5:5) 배교를 저지르고 강대국의 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에 분노하시고 (사 30:1-5, 렘 2:35-37) 동시에 이방인들의 불의와 죄에도 분노하신다. 2)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인 사랑에서 촉발된다. 그의 백성을 깊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분노하신다.(시 90:7-12)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
인간이 화를 낼 때 그것이 치명적인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화가 의로운 것이든 아니든 좀처럼 통제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분노해야 마땅한 대상에게 마땅한 몫으로 갚아 주는 정의의 수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에바그리우스 “분노는 영혼의 눈을 어둡게 하고 기도하는 상태를 망가뜨린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도 이와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소위 선의의 집단이 불의한 집단과 투쟁해 가는 과정에서 처음의 의로웠던 분노가 점차 과격하고 악한 분노로 변질될 위험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복수하려는 의지
교회와 신학자들이 분노를 대죄로 지목하고 경계 해 온 것은, 분노가 감정을 넘어 의지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분노는 다른 사람의 공격에 반격함으로써 고통받은 만큼 앙갚음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분노는 이처럼 자신을 공격한 상대에게 해를 가하겠다는 의지를 수반하고 있기에, 이미 이성의 동의와 의지의 승인을 받아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문제인 것을 알면서도 의지적으로 그 감정을 유지하며 앙갚음을 할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다. 흔히 분노가 극에 달하면 이성을 잃는다고 표현하는데 이 말은 복수에 대한 욕망으로 정신이 한 곳으로 몰린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성은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수할 계획과 전략을 짜는 쪽으로 몰린다. 중요한 것은 가슴에 품은 분노는 언젠가는 보복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예> 가인 - 야곱의 아들들)
분노는 결국 분쟁, 마음의 동요, 모욕, 야유, 분개, 모독과 같은 딸뜰을 주렁주렁 낳기 때문에, 상대를 무참히 괴롭히고 관계를 공격과 종오의 악순환에 빠뜨리는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한 죄라 할 수 있다. 반변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고하셨다.(마 5:44)
분노의 원인들 : 상처, 좌절된 욕구, 교만
1)분노는 상처받은 자의 반응이다. 타인에게 공격을 받거나 혹은 받았다고 여겼을 때, 상처받았을 때 우리는 분노하게 되는데, 특히 무시나 모욕을 당했다는 느낌을 받을 경우 더욱 극심해진다. (예> 자존심이 강한 사람 - 어린 시절 부모에게 존중을 받지 못한 사람) 여기서 우리는 사건의 객관적 상황보다는 본인이 그것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분노의 정도도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창세기에서 가인은 근거 없는 피해 의식을 가지고 분노하며 동생 아벨을 죽였다.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탓하고 분노했다.
2) 분노의 이유는 좌절된 욕구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일정한 기대치가 있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 실망이 찾아오고 어떤 사람은 분노라는 형태로 그 실망을 표출한다. 그리고 기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욕구가 클수록 분노의 정도도 커진다. (예> 물건을 사기 위한 대기줄 : 품절, 손해본다고 생각하는 경우, 님비현상)
3) 교만도 분노의 이유가 된다. 교만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자존심이 상하고 큰 모독감을 느낀다. 그래서 더 쉽게 화를 내고 앙갚음을 하고 싶어 한다. 헨리 나우웬은 ‘부논에는 교만과 함꼐 자기 의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말한다.
파괴성
분노가 가져오는 치명적인 결과는 무엇보다 그 파괴성에 있다. 구약 성경에서 분노를 의미하는 단어는 ‘아프’인데 이 단어는 코 또는 콧구멍을 가리키는 얼굴을 의미하기도 한다. 화가 나면 코가 벌렁거리고 콧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나오고 안색이 달라진다는 얘기다. 분노를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는 ‘하라’인데 이것은 ‘불’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이 단어에서 보듯 분노는 불처럼 맹렬히 타는 것이다. (예> 가인의 분노, 라반의 분노) 그런데 이’하라’는 종종 ‘아프’와 함께 쓰여 ‘불붙는 분노’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런 어원들을 볼 때, 본노는 불처럼 상대를 순식간에 태우고 잿더미로 만드는 파괴적인 죄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분노의 파괴성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건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 해병대 총기 난사, 자살테러, 묻지마 살인 등) 가해자로부터 입은 상처가 분노로 차곡차곡 쌓여 임계점을 넘게 되면 인간은 자기를 공격했던 자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일념에 사로잡혀 판단력을 잃고 극단적이고 무모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
분노는 일상에서 행동보다 말로 훨씬 더 자주 나타나는데, 사실 말은 폭력만큼이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화가 나서 내뱉은 멸시에 찬 한두 마디는 인격을 짓밝는 크나큰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라가’ 즉 ‘골빈 놈’이나 ‘미련한 놈’이라고 부르는 자는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까지 말씀하셨다. 말로 형제에게 고통을 안겨 준 사람이 지옥에 떨어질 정도로, 그 고통이 극심하고 처참함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떄로 화를 참지 못해 부주의하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상대의 마음에 쳐박혀 일생을 비극에 빠뜨리기도 한다. 누구나 멸시에 가득 찬 말을 들으면 인격이 짓이겨지고 견디기 힘든 상처를 입게 된다. 쓰라린 말 한 마디는 쓴 뿌리가 되어 복수심과 더 큰 분노를 잉태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를 가리다
분노의 또 한 가지 치명적인 결과는 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약 1:20) (예> 모세의 분노 그리고 분노의 결과 (민 20:12) 예수님의 말씀 (마 5:22)를 기억하라. 분노의 감정이 솟구칠 때 인내하고 화를 더디 내는 사람과 달리, 즉시 노를 발하는 사람은 결국 어리석은 사람이다. 분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분노 앞에서 하나님의 의는 결코 들어설 자리가 없다.
분노를 이기는 길
분노는 위험한 폭약과 같다. 세이어즈는 분노를 터뜨리면 수습하기 힘들고 깨어진 평화를 회복하는 데도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바울의 말을 명심하면서 설사 화를 내더라도 어떻게서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분노를 떨쳐 내도록 애써야 한다. 갈수록 분열과 싸움으로 험악해져 가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화평케 하는 일에 부름받은 평화의 사도라는 신분을 늘 의식하며 분노를 이기는 데 힘써야 한다.
1 원수 갚는 일은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 화를 내면 일단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ㅇ낳고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킨다. 복수는 상대방의 되갚음을 불러오고 결국 악순환을 낳기 때문에 복수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복수는 오히려 모두에게 증오와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런 현실적 이유와 함께 그리스도인은 분노를 피해야 할 신학적인 이유가 있다. 바울은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는 구약 말씀을 인용하면서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로 권면했다. 궁극적으로 복수는 인간에게 허용된 것이 아니며 직접 보복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대항하려는 태도와 같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적절한 때에 마땅하게 벌하시리라 믿으며 보응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예 다윗 )
2 용서하기스데반은 분노에 사로잡혀 “죽여라”라고 소리치며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무리 앞에서 죽어가면서도 하나님께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용서는 분노를 해결하는 가장 정확하면서도 근본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순간적으로 그 기운을 누를 수는 있지만 그렇게 억누른 분노는 언젠가 다시 불쑥 솟아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확실한 방안은 분노의 뿌리는 뽑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용서다. (엡 4:31-32) 분노한다는 것은 이전에 받은 상처에 얽매여 있다는 뜻인데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상처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헬라어로 용서를 의미하는 단어는 ‘아페시스’이며, 이는 ‘체포된 상태에서 풀어준다.’는 뜻이다. 용서는 분노의 대상자와 당사자 모두를 과거의 상처에서 자유롭게 풀어주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다. (예> 남아공 성공회 주교 데스몬드 투투, 요셉) 모든 신자는 하나님께 용서받았기 때문에 마땅히 타인을 용서해야 한다. 성경 인물들의 용서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과 순종의 결실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용서를 추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은 용서를 제자도의 핵심이자 참된 제자됨을 가늠하는 표지로서 강조하셨다.(눅 17:1-10) 물론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며 오직 믿음에서 나오는 의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인되신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용서를 명하신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 있는 능력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용서하는 것이다.
(칠죄종)
(칠죄종)
분노 (Wrath)
한국사회 ‘분노 조절 장애’ : 정식 명칭 ‘간헐적 폭발 장애’ - 분노가 일정 단계를 넘어 서게 되면 사고가 정지되고 대상이 누구든 그에게 폭발적으로 분노와 폭력적 행동을 보이게 됩니다. (분노조절잘해 : 핑계를 대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조롱의 의미)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사람들이 도가 지나칠 정도로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를 잘 자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각종 폭행 관련 사고 - 갑질이 상당히 많다.)
분노가 사회에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사회가 안정되지 않고 정치적, 경제적 정의가 이뤄지지 않아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신분 격차가 벌어져 민주적 평등이 무너지는 것이 중요한 원인이다. 부당한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권력층 때문에 좌절하는 다수의 일반 시민들의 사회적 분노를 불러오게 된다.
분노는 인간의 욕구와 희망이 좌절되거나 제대로 성취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고, 많은 경우에 자신보다 약자라고 판단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분노는 영어로 ‘격렬한 진노’라는 뉘앙스가 있다. 이는 자신의 화를 이끌어 내는 ‘대상’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분노의 대상은 타인이다. 즉 타인에 대한 적개심에 따른 증오의 감정을 의미한다. 특히 칠대죄가 교회를 위협하는 죄의 목록이라고 생각해보면, 이 분노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교회 밖이 아닌 교회 내에 있는 성도들이라 할 수 있다.
분노는 ‘인내’ 부재의 결과이기도 하다. 인내는 참을성이 많은 개인의 성품을 말하는 것을 넘어 교회 공동체에게 요구되었던 덕목이다. 초기 교회는 로마의 종교로 자리 잡기 전, 수백 년의 시간동안 많은 환난과 핍박을 받았고 이를 감내해야 했다. 이 기간동안 앞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교회는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 보존해 왔고, 어려움의 시간을 견뎌 내야 했다. 이러한 의미가 ‘인내’의 개념 속에 반영되어 있다.
초기 교회 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서도 교회와 성도는 세상 속에서 환난과 박해의 시간을 견뎌 내야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개인의 욕망, 성공, 번영)와는 정 반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지키려는 교회를 거부하고 박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와 성도가 특히 목회자가 이 세상에서 온갖 부와 명성, 권력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교회와 성도의 모습인지를 진지하게 되물어 보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너무 쉽게 하나님의 축복을 세상의 부와 권력, 성공 등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참된 교회와 성도가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데 오늘 날 적지 않은 교회들이 그런 말씀과 역사는 신경 쓰지도 않고 도리어 세상의 부와 권력을 더 탐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인내’를 말할 떄,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다.”라던가 “지금 닥친 어려움을 잘 참으면 갑절의 축복이 온다.”라던가, “응답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라든가의 말들을 하면서 ‘인내’란 이 세상에서 눌리 수 있는 좋은 것들을 얻기까지 참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기다려야 하는 개념으로 말한다. 인내를 보답을 위한 기다림의 과정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가 가져야 할 ‘인내’는 하나님의 회복과 완성이 이뤄질 것을 믿고, 그 때까지는 불가피하게 허용된 불의와 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이에 굴복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받게 되는 박해와 환난의 시기를 ‘견뎌 내는 것’이다. 이런 ‘인내’의 의미를 고려한다면, ‘분노’는 교회가 마땅히 견뎌 내야 할 세상으로부터 받는 고난과 핍박, 그리고 환란에 대한 인내가 사라진 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에베소서의 배경과 특징
만유의 주가 되시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통일하시는 그리스도, 그분의 충만함을 드러내는 교회, 그 교횡서 함께 ‘한 새 사람’이 되어 가는 성도의 새로운 삶의 질서는 에베소서의 가장 중요한 흐름이다. 또한 이것은 당대의 암울한 세계 속에서 교회가 보여 준 새로운 차원의 묵시적 비전이기도 하다. 단순히 핍박받던 계급이 세상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세계가 아니라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세계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1세기 후반의 에베소는 사도 바울이 매우 공을 들여 사역했던 지역 중 하나였고, 그에 따른 활발한 활동이 일어났던 곳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사후에 점차 과거에 성행했던 우상 숭배에 빠지거나, 사도들이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과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거나 회심 이전의 문란했던 삶으로 돌아가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에베소교회를 ‘첫 사랑을 버린 곳’이라고 질책한다. 이는 에베소 지역에서 상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다 보니 사람들이 계산(셈)에 능하고, 무엇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빠르게 판단하며, 그 판단에 따라 발 빠르게 움직이던 시대적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에베소가 성경의 전통에 익숙하지 않고 이교적 삶에 익숙했던 이방인들이 많았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물론 1세기가 아닌 현대의 한국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오늘날에도 복음으로 시작했지만 세상으로 돌아갔거나 돌아가려고 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기 때문이다. 성경적 가치와 기준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믿음을 바꾸고 심지어는 성경에도 없는 내용을 성경 말씀처럼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 속에서도 에베소서는 만유를 통일하시고 교회를 통해 하나로 화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올바른 의미를 찾고자 하는 교회와 성도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 준다.
본문에 따라 생각해보기
유대인들에게도 그렇지만 이방인들에게도 과거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사는 것(엡 4:22-24)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에베소처럼 온갖 사상과 종교, 화려하고 풍족한 문물이 넘치고, 계산에 능하고 약삭빠른 사람들이 넘치는 사회에서 올바른 성도와 교회로 회심하여 살아가는 것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변하게 되면 당연히 그에 따른 삶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문제는 이것이 예전보다 세속적 기준에서 더 편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오히려 성도로 살다 보면 편하고 좋은 것은 고사하고 과거보다는 훨씬 더 어렵고 불편한 것이 많아진다. 왜냐하면 성도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기준과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과 더불어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로마로부터 점점 더 심한 박해를 받게 되면서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많은 위협과 어려움을 겪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로마의 위세와 그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은 교회 안에서 배교자가 더욱 늘어가게 만들었다. 교회 안에 성도들은 선택에 기로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에베소서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두 갈래의 길을 말한다. 하나는 ‘옛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새 사람’이다. 에베소 뿐만 아니라 당대 로마 치하에 있던 대부분의 식민지인에게 생존은 가장 중요한 가치였고, 그것이 해결된 이들, 즉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얻은 이들에게는 물질적으로 더 풍족한 삶이 중요한 가치였다. 자신이 더 잘살 수 있다면 그 수단과 방법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뇌물을 바쳐 지위를 얻든, 세리들처럼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동족들의 삐를 빨아먹든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양심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더 풍족한 삶 - 잘 사는 삶을 살기 어려웠다. 피라미드 식의 계급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통치체제인 ‘옛 세상’에 속한 ‘옛 사람’들은 이런 사회 구조를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그 구조 속에서 그나마 생존이라도 보장받으려면,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외면하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 수 밖에 없었다. 에베소 지역에 속한 에베소교회 성도들 역시 다른 에베소 사람들처럼 과거에는 이러한 ‘옛 세상’의 질서에 잘 적응하고 순응하여 살아가던 ‘옛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후 회심하고, 사도들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교회라는 ‘하나님 나라’ 즉 ‘새 세계’의 놀라움을 배우고 경험한 후 ‘새 사람’으로 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전에 살던 대로 살면 별 문제가 없던 것들이 복음을 듣고 성도로 살기로 결정한 후에는 여러 가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들도 변했고, 더 나아가 성도의 기준에 맞게 살고자 하면 사회에서 많은 불이익과 손해를 봐야 하는 일들이 잦아졌기 떄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교회는 점점 더 심해지는 로마의 핍박에도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사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본문의 중요한 키워드가 ‘분노’이다. 단순히 화가 많은 성품이나 성격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명백히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웃, 공동체)에게 향하고 있는 문제였다. 그럼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왜 이렇게 분노에 휩싸여 있었을까? 당시 상황과 문맥을 고려해볼 때 현실에 대한 좌절감 떄문일 간으성이 높다. 당시 사회적 환경의 척박함 탓에 성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이 바뀌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뀔 것이라는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성도도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상과 방향이 중요하다. 특히 분노가 자신보다 약하거나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들에게 향하게 된 원인은 첫째, 세상을 약자에 대한 증오와 약탈의 장으로 바꾸고 있는 본질적인 악과 불의 앞에 굴복했기 때문이고, 둘째, 자신도 어느 새 그러한 세상의 흐름과 방향을 인정하고 그 위에 동승했기 때문이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이러한 흐름을 끊어내고 저항하며 결국은 극복해 내는 존재이다.
에베소서는 ‘옛 사람’의 모습을 다 버리지 못하고 있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는 분노의 모습들을 버리고, 더불어 그 분노로 말미암아 어그러진 삶의 모습들도 바꿀 수 있도록 ‘새 사람’의 삶의 태도와 방향을 제시한다. (약 4:28-29) 이것은 현대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준이다. 자본주의가 득세하는 오늘의 현실에서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성경의 기준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는 사회의 현실에 굴복 혹은 좢러하여 서로를 향한 분노를 표출하거나 그에 따른 악한 행위를 하며 자신의 생존과 번영만을 추구하는 것을 금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제시한다. (엡 4:31-32)
이웃을 지체로 여기고,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긍휼이 여기며 용서하는 성도의 행동은 분노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성품 혹은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성도가 살아가는 세계 자체의 변화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자신이 보기에 만만한 이들에 대한 부논에 함몰되어 계속되는 죄를 짓지 않고, 그 반대의 삶, 즉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선한 일을 하며 서로 친절히 대하는 행동은 저절로 되 않는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인데 성경은 그것을 바로 ‘인내’라고 말한다. (롬 5:1-5)
이처럼 현실의 환난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가 말하는 인내는 단순히 자신의 화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소망에 기인한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다. 쉬운일은 아니지만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옳은 것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성도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다. 또한 인내는 개인이 혼자 하는 것보다 공동체가 함께 할 때 그 짐이 훨씬 가볍고 위로가 된다. 그리고 인내를 통해 성도의 신앙은 견고해지고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도 과거에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옛 세상’에 속한 존재였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인내’의 결과이다. 끝내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시지 낳고 구원의 때가 이를 때까지 하나님께서 인내하지 않으셧다면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의 인내는 약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한 것이다. 성도는 그 때를 견뎌 내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과 같은 존재이다.
(일곱가지 치명적인 죄)
(일곱가지 치명적인 죄)
“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냐?”(욘 4:4)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개인에게 하신 말씀은 때로 우리 모두에게 적요오딘다. 요나의 행동 이면에 있는 진실, 사실은 이야기의 전체 갈등 이면에 있는 진실을 살짝 눈치채게 된다. 요나는 불경한 니느웨 성에 회개를 선포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분노는 이 드라마의 비극적인 절정이 된다. 분노라는 감정이 무대에 등장해, 잃어버린 이 선지자의 가면을 벗겨 낸다.
분노 그 일상성
분노가 일곱 가지 죄에 포함된 이유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분노의 파괴적인 힘과 영향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분노는 혼란을 일으키는 죄가 아니다. 좀 더 깊은 무언가, 인간 마음속 잠재 의식의 욕구에 자리 잡은 무언가를 나타내는 감정이다. (분노의 뿌리가 되는 죄) 마샤 캐넌은 [똑똑하게 분노하라]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당신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정의하고, 그런 현실을 쉽게 바꾸거나 견디거나 무시할 수 없을 때 분노하게 된다.” 우리가 경험하고 정의한 ‘현실’이 중요하다. 분노는 태생적으로 절로 생겨나지 않고, 무언가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는 분노
다른 죄와 비교해서 분노를 독특하게 만드는 세가지 설명을 살펴보자. 첫째, 분노는 교만과 마찬가지로 가장 널리 퍼진 죄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를 ‘모든 사람이 분노했다’로 바꿀 수 있다. 세상에 맨 처음 타나난 죄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의 증거는 분노의 폭발이었다. 바로 가인이다. (창 4:5) 세상에 분노가 가득한 까닭은 맨 처음 일이 틀어진 이후로 분노가 계속해서 역사에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인류 첫 조상의 죄가 이후로 모든 세대에 스며들었다. 분노의 너비는 모든 문화와 역사, 모든 세대를 포괄한다. 어쩌면 분노가 모든 사람이 최조로 짓는 죄일 것이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 날카로운 울음소리, 어린아이의 눈물 - 상기된 얼굴. 부모들의 상기된 얼굴 - 높아지는 목소리) 신리 생리학자 네리나 라플라칸 “화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단지 표현 방법이 다를 뿐이다. 사람은 분노를 속으로 억누르는 사람과 밖으로 표현하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다른 죄보다 더 치명적인
둘째, 분노는 일곱가지 죄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다. 예수님은 분노와 살인을 연결하신다. (마 5:32-22) 살인과 분노는 같은 선상에 있다. 예수님은 그 둘을 사실상 똑같이 여기신다. 사도요한이 나중에 쓴 것처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다”(요일 3:15) 분노가 거룩한 삶을 악화시킨다는 사실 외에도 분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다. 분노는 굉장히 즉흥적이고 통제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자신이 저지르리라 상상도 하지 못한 죄를 저지르게 만들기도 한다. (예> 사전에 계획하지 않은 충동적인 폭행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으면, 현대 사법제도는 조금 더 가벼운 범죄로 본다. 법원은 사실상 충동적이고 격렬한 분노를 조금은 동정해 준다. 이것은 분노가 사람을 도취시키고 누구에게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증명한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분노하는 사람
셋째, 분노가 다 죄는 아니다. 하나님도 분노하신다. 시편 기자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 7:11) 하나님은 분노를 느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으로 그 분노를 실행하신다.바울에 따르면 예수님은 언젠가 다시 오셔서 최종적으로 온전하게 이 거룩한 진노를 실행하실 것이다.(살후 1:8)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도, 완강한 바리새인들을 만나셨을 때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셨다.”(막 3:5)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가 죄가 아니라면 정당하게 표현한 분노는 죄가 아닌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죄가 되는 인간의 부논는 무엇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와 어떻게 다른가? 이를 이해하려면 분노의 동기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냐?” 이것이 문제다.
사랑과 분노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바로 사랑이다. 팀 켈러는 “왜곡되지 않은 원형 상태의 분노는 사실 상 사랑 한 형태다”라고 말한다. 분노는 무엇이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나 사물을 위협하는 것에 우리가 대응하는 방식이다. 분노는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랑이다.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가 아끼는 대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분노가 언제 죄가 되는지 알기 원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제임스 스미스가 표현한대로, 인류는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존재이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하느냐 하지 않으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 간절히 바라는 것, 갈망하는 것이 우리를 정의한다.”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기 위해 창조되었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를 섬기는 대상을 더 사랑할 때가 자주 있다. 더불어 우리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거나 선한 것을 궁극적인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이 지점에서 분노가 잘못된 길로 빠진다. 실제로는 아주 사소한 일, 정당성이 없는 일에 화를 낼 때가 너무 많다. 해가 쨍쨍한데 박넝쿨이 스들어 분노한 요나처럼 말이다.(욘 4:9) 따라서 죄가 되는 분노는 태생적으로 어리석다. 불의한 부논는 결함있는 애정의 폭발이다. 팀 켈러는 다음과 같이 예를 든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명성을 무시할 때 조금 화를 내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불의보다 그 일에 열매, 아니 백 배 더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이 자신의 중요성과 안정감을 위해 사람들의 인정이나 좋은 명성이나 지위 같은 것을 찾는다면, 무언가가 당신의 그것을 소유하기를 방해할 때 당신은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내게 된다. 당신은 그것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최고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분노라는 광기에 대처하는 방식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불의한 분노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마음을 주장하지 못한다.(롬 6:14) 부논를 물리치려면 분노의 근원, 곧 우리의 현실 인식 문제를 풀어야 한다.
1 분노를 초기에 분석하라. 가능한 한 빨리 분노의 출처를 찾아야 한다. 분노가 올라 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냐?” 멈추고 이렇게 질문하라. “내가 이렇게 방어적이고 감정적이 될 정도로 이것이 중요한 일인가? 나는 무엇을 그토록 사랑하기에 내 마음이 이런 분노가 느끼는가? 우리의 애정을 검토하는 것은 부적절한 공격성을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부모의 경우, 자녀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 거듭 화를 내게 된다. 물론 아이들의 행동에 적절하게 화를 내는 것은 옳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불편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나 자신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한다면, 아이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 매우 주의하고 절제하면서 참을성 있게 분노를 드러낼 것이다.
2 당신의 어리석음을 슬퍼하라. 우리는 자기 죄를 슬퍼해야 마땅하다. 우리의 분노 아래 숨은 사랑에 대해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경우, 당신이 옹호하는 것은 당신의 자아, 당신의 자존심과 자부심이기 때문에 대개 당신은 금방 당황스러워할 것이다.” 분노가 알려주는 우리의 자기 중심성과 어리석음에 귀를 기울이라. 최선의 경우 당황할테고, 최악의 경우에는 절망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뒤틀린 만큰이나. 우리는 담대하고 소망에 찬 슬픔으로 이 어두움을 마주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의 잘못된 사랑에 대한 대가를 이미 그리스도께서 치르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떠안으시고 죄책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셔서 우리에게 죄를 다스릴 능력을 주셨다. 우리가 정말로 철저하게 자기 마음 속을 들여다 본다면, 화를 내서는 안 될 일에 화를 내고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일에 분노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슬퍼하게 된다.
3 하나님의 분노를 기억하고 모방하라. 하나님의 진노는 항상 순수하고 거룩한 동기에서 흘러나오며, 그분의 온전한 사랑을 늘 드러낸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모든 일에는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기쁨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다. 이 분노를 보여 주는 최고의 예가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계획되었고,(계13:8)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실행되었으며, 극적이면서도 확정적으로 성취되었다.(사 53:11) 죄가 되는 분노와 싸우는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의 분노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해 그분이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볼 때만이, 그분의 사랑에 맞추어 우리의 사랑을 조정할 때만이 우리의 분노가 거룩해질 수 있다. 하나님처럼 사랑할 때 우리의 분노는 정당성을 얻는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냐?” 그 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공격하는 것들 때문이어야 한다. 분노의 해독제는 가장 사랑할 만한 것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사로잡으시도록 끈질기게 추구할 때 죄가 되는 분노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긍정’하고 그분이 점점 더 우리를 사로잡도록 내드릴 때, 죄가 되는 분노와 그 분노가 우리를 갉아먹는 반복된 형태를 ‘거부’하게 된다.
(에베소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베소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본문분석
새 사람을 위한 실제적 권면들 : 구원받은 성도들이 옛사람을 벗어 버 리고 새사람을 입는 즉시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그들이 옛사람을 벗어 버 리고 새사람을 입음으로써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던 옛 생활을 청산하고 의와 거룩함의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하지만 구원의 새로운 영역에 속한 새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옛사람의 본성과 행위가 남아 있으므로 죄의 유혹을 받으며 때로 죄를 범한다.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미 새사람이지만 아직 완성된 새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은 성도들은 옛사람의 본성과 행위를 부단히 벗어 버 림으로써 마땅히 되어야 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이런 의미에서 사도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거짓을벗어 버 리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32절) 사도는 긍정적인 교훈을 제시한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악덕들을 모든 악한 성향과 함께 버릴 뿐 아니라, 새 사람에게 어울리는 적절한 덕목을 취해야 한다. 그것은 서로 인자하게 대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한 것이다. 여기서 사용한 인자한이라는 형용사는 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엡 2:7)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분이다. 불쌍한이라는 단어는 연민의 감정을 갖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인자와 긍휼과 용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인자하게 대하시며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과 용서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이다.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자하게 대하신 것처럼 서로 인자하게 대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하며(벧전3:8),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해야 한다(골 3:12-13). 이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새사람을 입은 성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며, 또한 성령의 하나 됨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방식이기도 하다.
(5장 2절)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내어주신 것은 위대한 자기희생적 사랑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하고 부르짖었다(고후 5:4). 그리스도의 위대한 자기희생적 사랑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근거 이자 사랑의 모범 이다.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게 따뜻한 감정을 갖고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내어주고 희생하는 것이다. 이런 희생적인 사랑이야말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표지가 되어야 한다.32)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은 성도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체들과 더불어 진실을 말하고,해가 지도록 화를 품지않으며,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고,선한 말을 하고,서로 인자하게 대하고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해야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