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25. 예배팀 리트릿. 아름다우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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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본문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서론
서론
여러분은 예배팀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단순히 ‘예배하는 자’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배하는 자가 맞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예배를 섬기는 자입니다.
다시 이렇게 질문을 한 번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예배를 섬기고 있습니까? 교회의 여러 사역들을 보면, 각각의 사역에 적합한 여러가지 섬김의 모습과 방법이 있을텐데, 우리는 어떤 모습과 방법으로 섬기고 있냐는 말입니다. 가령 운영팀의 사역은 대체로 교구 내의 행사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것들입니다. 많은 아이디어 회의를 가지고 필요한 일꾼들을 적재 적소에 세우며 일을 진행해나가는 방식으로 섬기겠지요. 또 양육팀의 사역은 대체로 교구 내의 인원을 케어하고 보살피는 것들입니다. 최대한 인원들을 직접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권면하며 기도하는 방식으로 섬기겠지요. 예배팀은 어떻습니까?
진도를 위해서 이렇게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교회의 여러 사역팀 중에 예술과 가장 가까운 팀은 어떤 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예배팀입니다. 예배팀은 예술을 통해 예배를 섬기는 팀입니다. 악기로든 목소리로든, 음향이든 영상을 다루든, 우리 모두는 예술에 관여하고 있으며, 예배팀이라면 사실 모두가 교회의 예술가들인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조금 당황스럽고, 어색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정체성이 ‘예배를 예술로 섬기는 자’, 곧 예배자이자 예술가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술가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예술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정의가 있겠지만, 그 본질은 단순합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림이든, 소리든, 영상이든, 몸짓이든 예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거기서 느껴지는 감동을 전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런 예술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야겠지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아름다움을 먼저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자는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아름다움에 감동하지 않은 자는 다른 이에게 그것을 전해줄 수 없습니다.
몇 가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함께 나눠보려 합니다. 영상을 함께 보며 어떤 것이 느껴지는지에 한 번 집중해보았으면 좋겠네요.
https://youtu.be/oJDzh2mVBms?si=IW0xJ8fI-M671NMo
https://youtu.be/iTDMfz0fmwI?si=6wNgYvwAIgVrniT5
https://youtu.be/Wm593SYT-_E?si=GYSQBl6g0-Z2rkeQ
어떤 것을 느끼셨나요?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는 것은 보고, 듣고, 느꼈을니다. 어떤 것을 느끼셨나요?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는 것은 보고, 듣고, 느꼈을니다. 또 누군가에게는 그 순간이 마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겠지요. 이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누군가가 자연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감동을 예술적인 작업을 거쳐 표현했기에, 우리는 그것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누군가가 음악을 들으며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감동을 예술적인 작업을 거쳐 표현했기에, 우리에게까지 와 닿을 수 있었지요.
우리도 예배팀으로서 예배를 섬길 때, 이와 같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가 예술로 표현하고 전하려는 대상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예술가로서 먼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느끼고, 그 감동을 예술적 작업으로 정제한 뒤, 회중에게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은 모범적인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고, 그것을 시로, 찬양으로, 공동체의 예배로 표현한 예배자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다윗의 길을 따라,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을 예술의 언어로 드러내야 합니다.
본론 1
본론 1
여러분은 다윗이라는 인물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다윗을 흔히 골리앗을 쓰러뜨린 용사이자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영웅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예배에 있어서도 그에 못지않은 많은 것들을 일구어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예배 문화를 형성하고, 예배의 언어와 구조를 세운 사람이며, 예배의 역사 전체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남긴 인물입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시편의 주요 저자입니다. 전체 150편 중 약 절반 이상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고, 그의 영향 아래 지어진 것까지 하면 100여개 가량의 시편이 그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편은 단순한 노래집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모범이 되는 감정과 신학이 가득 담긴 작품들이었고, 그것을 정립한 인물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실제로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시편의 찬양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왔구요.
또한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로 전문적이고 제도화된 찬양대를 조직했습니다. 역대상 15장과 25장을 보면, 그는 아삽, 헤만, 여두둔을 중심으로 수백 명의 레위인을 세우고, 악기와 노래로 하나님을 주야로 찬양하게 했습니다. 특히 그는 총 288명의 찬양 사역자들을 24조로 나누어 편성함으로써, 365일 24시간 끊임없이 예배가 지속될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제도화하면서, 이스라엘의 예배가 단지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레위인들의 찬양과 악기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예배의 중심이 되도록 확장시킨 것이었지요.
이러한 다윗의 예배는 신약에서도 이상적인 예배의 상징으로 인용됩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회복될 참된 예배를 향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렸던 예배의 본질이 회복될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유롭게 머물며 마음껏 노래하던 참된 예배의 원형이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다윗은 예배의 언어를 만들고, 구조를 세우고, 예배의 모델로 남은 예배자 중의 예배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예배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영향력은 사실 그의 내면에 자리한 단 하나의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바로 이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이 말씀은 다윗의 모든 예배적 영향력을 움직인 단 하나의 갈망, 곧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앞에 머물고 싶다는 마음을 가장 예술적인 언어로 표현한 고백입니다. 그는 왕이었지만 왕좌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사모했고, 전사였지만 승리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더 갈망했습니다. 권력과 명예, 전리품과 존경보다, 오직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앞에 머무는 것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이 고백이 그의 시를 낳고, 악기를 만들게 했으며, 예배자를 조직하게 했고, 그의 인생 전체를 예배로 살아가게 했습니다. 다윗이 예배에 남긴 모든 구조와 언어, 전통과 영향력은 이 한 문장, 이 한가지 갈망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본론 2
본론 2
이처럼 다윗이 예배자로서 위대한 유산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편 27:4절을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꿀을 태어나서 한 번도 안먹어본 사람이 “아 꿀 또 먹고싶다. 계속 먹고싶다”라고 소원할 수 있을까요? 경험이 없으면 갈망도 없는 법입니다. 다윗은 단지 상상으로 하나님을 사모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맛보았기에, 그 앞에 머물기를 평생의 소원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윗의 업적들을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꿀을 태어나서 한 번도 안먹어본 사람이 “꿀은 위대한 것이다”하며 찬양하고, 꿀에 대해서 수많은 작품을 남기고, 꿀을 끝없이 찬양하기 위해 찬양대를 조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많은 시편을 남기고, 예배의 체계를 만들고, 수많은 예배자들을 세운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경험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계속 사모할 수 있었고, 경험했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언어와 예배를 표현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따라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 놀라움을 직접 맛보아서, 계속해서 사모하게 되고, 끊임없이 표현하게 될 수 있을까요? 시편 96편 6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소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는 이 아름다움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분명히 이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결코 감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아름다우심을 경험한 자는 반드시 반응하게 됩니다. 그 반응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은 보통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이성적으로 깨닫는 아름다움, 또 하나는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직관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이성적인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해 곧바로 떠올리거나 그려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열어주실 때, 우리는 주변의 아름다움을 통해 그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과정인것이지요.
자연의 질서, 음악의 조화, 생명의 섬세한 구조 등,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통해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확장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깨닫게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어떤 근원에서부터 흘러나온 것이며, 그 근원은 이 모든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더 아름다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 자신이 아름다움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이고, 모든 피조물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새겨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이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성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인식은 예배자의 생각을 온통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이 과연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 떠올려보고 그려보게 합니다. 이것이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첫 번째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때로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영혼을 그분의 영광의 광채와 직면하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떠올리고 그려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실제로 느끼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가 느끼는 것은 분명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엄청난 것을 느낍니다. 우리의 시선은 도저히 뗄 수 없이 사로잡히고, 우리의 마음은 거대한 감동으로 차오릅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고, 이 끝없는 아름다움을 더욱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감동은 결코 우리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느낀 자는 반드시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느낀 감동을 가사와 선율에, 노래와 연주에, 음향과 화면에 담아내려 애쓰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다윗이 꼭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혔었고, 그 감동을 표현하기 위해 시편을 쓰고, 찬양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먼저 경험했기에,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결론
예배 사역 현장에서 오랫동안 섬겨오신 박철순 간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배 인도자가 경험한 예배의 깊이가 회중 예배의 깊이를 결정한다.”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말하고 싶습니다. “예배팀이 경험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깊이가, 예배팀이 섬기는 예배의 깊이를 결정한다.” 왜냐하면 알아야 표현할 수 있고, 맛본 만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상상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예배자가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어떻게 노래하고, 연주하며, 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다윗 같은 예배자요 예술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먼저 경험하고, 그것을 표현하고, 그것을 전하고자 몸부림치는 사람, 그 감동을 예술의 언어로 예배 속에 담아내는 사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사랑하는 예배팀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지금 리트릿으로 모이게 하셨을까요? 다시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하셔서 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 다시 그리고 더욱 깊이 경험하게 하시려고 입니다. 예배를 섬기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머물러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바라보며 압도되고, 감탄하게 하시려고 이 자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합니다. 이 아름다우심 앞에 다시 머무는 것. 그리고 그 감동을 예배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할 때, 단지 멜로디를 따르거나 가사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아름다우심을 ‘보았던 사람’으로서 예배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 아름다우심을 드러내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소에는 놀라운 아름다움이 있으며,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며 주의 임재를 구하기 시작할 때, 이곳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되는 그 성소게 되게 하실 것입니다. 반드시 주의 임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배팀 여러분, 이제 이 시간은 우리가 아름다우신 하나님 앞에 다시 서는 시간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사로잡히고, 그 감동을 예술의 언어로 예배 안에 담아내는 사람으로 다시 부르심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이 시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앞에 다시 머물며, 더욱 크게 감동하고, 더욱 깊이 예배합시다.
기도회 찬양
기도회 찬양
참 아름다와라 - 주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
영광 영광 주 임하실 때 - 여호와의 소리가(후렴:주의 성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