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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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한 앎을 회복하라

지난 주 하박국은 유다의 죄 악된 상황을 아뢰고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을 일으켜 유다를 멸망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박국은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냐며 하나님이 그러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는 본문까지 살폈습니다.
하박국의 주장은 악한 민족을 일으켜서 착한 백성을 삼키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하박국은 유다의 죄를 지적하면서도 결국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더 악한 바발론을 비교하면서 거기에 비하면 착한 백성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17절에 ‘그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면서 2장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은 그렇게 기도해도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기도는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고결하다거나 형식을 지킨다거나 어려운 문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자의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했더라도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녀가 큰 잘못을 했더라도 그럴 때 자녀의 편을 드는 것은 잘못에 대한 그릇된 판단으로 편을 드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을 타인의 시선으로 본다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일 것일 것이죠. 최근 어는 정치인의 자녀 부부가 마약을 구매하다가 적발되어 아들은 구속되고 며느리까지 수사하는 과정에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 정치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함이며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고 해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잘못했으니 자녀의 관계를 끊고 이제부터는 남남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박국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셔서 백성으로 택하여 주셨는데 잘못을 했다고 해서 이방인을 일으켜서 백성의 관계를 끊는 것이 옳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죠.
물론 유다의 범죄는 심각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박국이 기대했던 대답과는 달랐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을 알기는 했지만 수박 겉핱는 식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로마서에 잘 표현되었습니다. 로마서 1:21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입니다.
그럼에도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2장에서 ‘내가 초소 위에 올라가서 서겠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에 우리는 한 가지 힌트를 얻습니다. ‘망대 위에 올라가서 나의 자리를 지키겠다’는 하박국의 표현은 선지자의 태도,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툭하면 하던 것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해 본 일 목록에 기록하고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 데’ 안 된다 또는 ‘내가 해봐서 아는 데’ 이렇게 해야 한다는 하며 모두가 선생이 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요즘 시대를 ‘남에 말을 듣지 않는 시대’이자 모두가 전문가인 시대라고 말합니다. 운동 전문가, 정리 전문가 등 생각하지 못했던 일에도 전문가가 탄생하는 시대입니다. 한 때는 전문가라는 의미는 학문적인 의미를 바탕에 두었지만 지금은 경험을 토대로 그렇습니다. 그런 가운데 안다는 것이 스마트 폰을 중심으로 내 손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알고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반대로 ‘해봐서 아는 데’라는 말을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박국의 경고는 미래에 벌어질 일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렇게 하실 하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역시서 살필 두 번째가 될 일에 대한 ‘하박국의 태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변하게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박국서는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의 일에 대한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생각하면서도 과거에 붙잡혀 사는 존재입니다. 과거가 지금 나의 모습을 만들었고 그 방향으로 미래를 말합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성경에도 과거와 미래를 알려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6:6 “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라는 짧은 말씀에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게으른 자의 현재 모습은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그럼에도 미래를 열어줄 열쇠는 개미에게 대상을 통해 ‘가서’ 그리고 ‘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지혜를 얻으라’입니다. 이런 표현이 바로 과거의 게으름을 끊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박국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은 과거의 유다 백성의 삶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언을 바꿀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앞서 미가서에서도 유다를 향해 ‘너 사마리아 봤지’ 그렇게 망하는 이유는 너희가 지금 사마리아의 길을 가고 있고 그 길의 끝은 망하는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악을 도모하며 내일을 계획 한다면 나도 너희를 향해서 망하도록 계획하시겠다고 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너는 이 경고를 기록하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미래에 대한 경고는 결국 오늘에 대한 우리의 태도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대부분 과거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해봤는데도 잘 안 되는 과거에 메여서, 꾸준하지 못한 나의 모습 때문에, 시작하면 쉽게 포기하는 연약함이나 외부에서 주어진 여러 조건에 대한 핑계가 결국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다른 것으로 핑계를 삼고 실패 했기에 비록 주변에서 위로를 받을지는 몰라도 어떤 선수의 말처럼 대표팀 선수는 연습하러 오는 곳이 아니다는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연습보다는 실전의 연속이기도 한 것입니다. 살아온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는 운명론처럼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은 주어진 경고의 의도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목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3절은 그렇게 심판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4절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특히 4절은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고 합니다. 그들의 특징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정직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개념이 아닙니다. 흔히 커피 숖에서 둔 스마트 폰을 훔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행하는 일관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법의 테두리에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고가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정직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상대를 향하여 갖는 우리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정직’이라는 의미를 사용할 때 ‘길을 바로 걷는다’, ‘어김없이 지킨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로 사용하는 ‘야샤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대립되는 개념이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옳은 길, 방향, 삶을 빼놓고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을 예수님을 믿는 것에만 연결을 시켜버렸기 때문에 두 문장이 서로 쌍을 이루지 못하고 마는 것이죠. 의인은 시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기에 쌍을 이룬 악인의 삶이 대조 되는 것이죠. 시편 1:1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들은 꾀를 내는 자이고 오만한 자리에 앉는 자들 입니다.
앞서 살폈던 미가 2:1–2 “1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2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이런 말씀은 구약의 미가서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신약 누가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이 요단강 근처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3:3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그러자 사람들이 물었겠죠. 어떻게 해야 하는거냐 그러자 누가복음 3:11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즉 더 가지려고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금을 걷는 자들이 와서 물어보니까 누가복음 3:13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계속해서 군인들이 와서 물어보니까 누가복음 3:14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고 말한 내용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4절에 그런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부유한 재산은 사람을 속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바쁜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5절부터 계속되는 표현들은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계획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불리고 채워가지만 똑같은 이들로 인해서 빼았기게 되고 그래서 결국 6절 중반절에 ‘너는 망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름 착하게 살고, 열심히 일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세상이 부조리 할 것입니다. 이런 부조리가 우리 삶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듯 만난다고 유명한 카뮈가 말한 것입니다. 그런 부조리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이 욥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의인인 욥이 이 땅에서 불연듯 찾아온 재난과 사고로 인한 깊은 부조리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풀어가는가 하는 내용을 다룬 것이죠. 지금 하박국은 욥처럼 격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부조리하시다고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이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조리를 따지라고 말합니. 그렇지만 자리를 벗어난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걸려서 교회를 떠나 가나안 신자가 되어 홀로 기독교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교회가 부조리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자리를 벗어난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불평일 것입니다.
5절부터 5개의 ‘화 있을진저’ 즉 너는 망할 것이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그중에 우 리가 자주 불렀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한다는 말씀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기억하십니까?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여호와의 전에 이르자’는 표현이 이방인들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까?
빛은 한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이 비취는 영역 안에 모든 자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를 향한 심판으로 바벨론을 사용하시겠다는 경고의 메시지는 하박국의 이해를 벗어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아무리 이건 아니라고 해도 하나님은 변명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가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모든 베일을 벗어 다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다 알게 하신 것이 요한복음 3:16–18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는 경고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20절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그런데 새번역은 ‘나 주가 거룩한 성전에 있다’ 늬앙스가 다르죠. 아무튼 하나님께서 국한 된 장소에 제한적으로 계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 하박국 선지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를 이해하려면 시편 73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보니 악인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잘 먹고 잘 살 뿐만 아니라 죽을 때에도 고통없이 죽는 모습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기도자의 절규가 나옵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니 오히려 이렇게 살아가는 기도자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 보이고 이렇게 살 필요가 있는가 하는 깊은 회의를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거의 미끄러질 뻔 했다는 말은 그렇게 마음 먹었다는 것입니다. 15절에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시편 73:15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그렇게 되면 함께 살아온 주님을 믿는 자들을 배신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16절에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했다 그랬지만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때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73:17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이 표현입니다. 기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우매 무지함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73:22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그가 28절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우리는 많은 복을 이야기하면서 진정한 복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에 시편 기도자의 기도나 악을 쌓아가며 멸망을 앞당기는 유다의 죄악과 이를 심판하시겠다는 말씀 앞에서 여전히 우리는 내가 아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게 아닌데’라고 말하는 하박국처럼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전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시면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성전은 이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하나님께서 계신 거룩한 성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역사 가운데 오셨고 이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안에 계시는 분’이라고 하시는 말씀은 ‘성전의 거룩’함의 본질은 바뀌지 않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박국의 시대처럼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작은 일이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데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아는 것’에 붙잡혀 어제라는 과거를 그대로 미래로 이어갈 것이 아니라 오늘을 기점으로 다시 미래를 써 가기 위해 ‘가서’, ‘보고’, ‘배우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바국은 2장을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성루에 올라 파수하겠다는 표현을 ‘내가 서리라, 내가 자리하리라’라고 자신을 깨웠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서야만 ‘기다리며 바라볼 수’(같은 단어 렘48:19, 미7:4, 나2:2) 미가는 죄로 인한 곤고함 중에서도 구원을 행하실 하나님을 우러러 본다 미7:7’ 말한다.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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