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無知)
Notes
Transcript
예배 전 15분 전 찬양 후
*순서 – 다같이 자리에 일어나서(교단찬양) 찬송 부릅니다.
*기원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지명하여 불러주시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케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고
악한 사단의 세력을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주시며
말씀에 깨닫는 은혜가 임하게 하여 주시고
예배에 성공하고 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성가대 찬양
* 사도신경 후 (자리에 앉으셔서 찬양합니다)
*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 대표기도
*성가대 찬양 후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 앞에 나와 찬양으로 영광 돌리며 거룩한 보좌를 사모하며
예배케 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찬양의 입술이 마르지 않게 하여 주시고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믿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의 감격이 있게 하시고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게 하여 주셔서
오늘 이 시간이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비치는 귀한 시간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말씀봉독
【성경봉독】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3:22-30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말씀 제목은 ‘무지(無知)’입니다.
‘아는 것이 없고 어리석다’,ignorance(이그너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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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라는 단어는,
“무지”라는 뜻은 ‘아는 것이 없고 어리석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이그너런스”(1.[명사] 무지, 무식; 무학; 부지(不知), (어떤 일을) 모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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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의미에 ‘무지’라는 것은,
과연 성서는 이 ‘무지’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성서가 말하는 ‘무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이 ‘무지’한 사람들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 다 주고,
어떠한 행동으로 표출이 되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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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 이름을 지어줬던 목사님탓? (식당에 본질은 맛이다.)
규모가 있는 교회에 한 담임목사님한테 한 집사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찾아온 이유는 식당을 오픈할 건데 담임목사님한테 식당에 이름을 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담임목사님은 교회의 한성도가 식당을 오픈한다고 하니깐, 고심 고심해서 식당이름을 지어줬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달고 식당을 개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이름을 지어준 그 식당이 일 년만에 ‘폐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사님이 목사님한테 찾아와서 하소연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 이름을 잘못 지어줘서 ‘페업’을 했다는 것이죠.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사님이 할 말을 잃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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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pt(사진) - (1) 맛 없는 집(실제로 있는 집)
- 식당에 본질이 ‘이름’입니까? 식당에 본질은 ‘맛’입니다.
만약에, 이름이 본질이었다면 저 식당(맛 없는 집)은 제일 먼저 망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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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오늘 폐업한 집사님처럼, 왜 이러한 현상들이 발생하는가?
“본질”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성서에서 말하는 “무지함”은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결국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말’과(담임목사님께 책임을 묻는)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행동과 철학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게 ‘합리성’을 부여한다.
쉽게 말하면, 나는 식당을 잘 운영했고 맛도 괜찮은데
왜? 식당이 폐업을 하냐...‘이름을 잘 못 지었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결론을 추론하게 된다.
-> 이게 ‘무지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즉, 본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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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생각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본질을 놓치고 살때”
일 년만에 ‘폐업’한 어느 집사님처럼,
엉뚱한 질문과 함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타인에 의해서 피해를 입은 피해자로만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행동과 철학에 대한 ‘합리성’을 부여하면서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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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본질을 완전히 벗어나고, 본질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을 ‘무지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없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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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인 13장은 누가복음 9장에서부터 19장까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아니 꼭 가셔야 하는 “예루살렘 여행 기사”가 기록된다.
-> 누가는 예수님이 일관되게 향하여 가는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대한 여행을 열 한 장을 할례하면서, 언급시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양을 ‘예루살렘 여행’기사로 기록을 했을까?
이러한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님의 이동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구속사의 성취를 향하여 가는 구속사적 이동임을 밝히고 있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잃기도 하고 찾기도 하는” ‘숨바꼭질 모티브’를 통해서,
“잃어버린”사람을 회복하시는 여정이 이루어 진다.
“본질을 잃은 무지한 자들을 찾는” 여정입니다.
누가복음 중심에 위치하는 9-19장은,
그래서 ‘여행 내러티브’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의 이 여행 내러티브에 경로를 살펴보면,
갈릴리 남쪽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가는 경로로 기록이 됩니다.
이미 사도행전에 성취되는 복음이 확장 하고 있음을 밝히고(선교적 확장),
이방인의 구원에 빛이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고치시고, 자신을 나타내고, 사람들을 모이고,
심지어 적대자들과 맞서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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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핵심 주제’는?
-> 하나님 나라로 입성하는 자들은 어떤 자격을 갖추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합한 자인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핵심 주제입니다.
그래서 비유도 “하나님 나라”가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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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루살렘 여행 기사 속에서 많은 이들과의 만남이 있었고,
그 가운데 질의 응답으로 구성되는 이야기가 전개가 됩니다.
여기서, 이러한 질의 응답에서 발견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님께 질문하는 ‘질문자’는 늘 상 자기 주관과
자기가 고수하고 있던 자기 방식으로 접근하고 질문을 합니다.
-> 예를 들어, 식탁 교제를 하실 때도,
왜? 죄인과 식탁 교제를 하는가?
1세기 식탁 교제는 계층 문화(끼리끼리)입니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은 윗 자리에 배치하는 구조입니다.
-> 예수님은 ‘낮은 자리’를 선호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늘 상, 사회적 통념이나 문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전복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에 주된 내용이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답변하실 때
늘 상 “본질적인 문제”로 다가가신다는 것입니다.
즉, 무지한 상태에서(모르는 것) 대해서 똑바로 알게 하시는 답변을 제시합니다.
-> 본질을 알고 본질을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비유”로에도 마찬가지로,
본질을 찾고 행한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합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나라를 모르는 사람이 바로, ‘무지한 사람’입니다.
이 ‘무지한 사람’은 자기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식탁에서는 ‘낮은 자리’가 아니라,
‘윗 자리’를 선호하는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고,
자기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질문자”들은 늘 상 자기 방식을 가지고 질문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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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오늘 본문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관찰이 됩니다.
>먼저 오늘 22-23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 ppt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22절은 예수님이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더니라고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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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23절에서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 자가 적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 위에 언급했듯이, 질문자는 자기 주관과 자기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지금 이 사람에 질문을 정리하면, ‘단지 소수만이 구원을 얻을 것인가?’ 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구원 얻을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구원 얻을 사람이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대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양이 아니라 질을 언급한다.
다른 말로 한다면 구원 얻을 숫자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 ppt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그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은,
들어가는 것(구원) 미래시제이고,
힘쓸 것은 현재시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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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쓰라”라는 것은 “지금 여기서, 현재”와 관련이 있는데,(현재 시제)
정리해서 말하면, “지금 여기서 힘쓰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힘쓰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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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서 힘쓰라”라는 의미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집 주인과의 대화에서 추론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28절까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 ppt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힘쓰라”라는 것은 집 주인과의 인격적인 차원에서 집 주인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사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고 한다.
주님과 함께 먹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주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집 주인은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결론짓는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있고 가르침을 받았어도
“내 방식대로”로 살았잖아.
그게 “행악” 입니다.
라고 결론 짓는다.
**주인은 이들이 누군인지 모르고 못 알아 본 다는 것은,
이미 그들은 주인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깨어진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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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는 것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것들”과 연관이 되고,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시급한 일은,
(1) “주인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고,
(2) “그 주인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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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지금 이들은 주인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은,
그 주인의 방식을 거부했다라는 것은
그것이 “행악이고” “무지한 사람”이며,(알지도 못하고 어리석은 사람)
그들은 문이 닫힌 후에야 비로써 깨닫게 되고,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처참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라면,
그 방식에 원인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선적으로 주인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가장 시급한 일 인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상당수의 핵심은 ‘주인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 주인 자체를 아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5장과 누가복음 19장에 언급되는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는 5,2,1달란트를 맡기는데,
달란트 비유도 핵심 주제는 얼마나 남기고 불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인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이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 곧, 생산성이 아니라 생산자를 아는 것입니다.
본질은 생산자를 아는 것이고 그 생산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방식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일처리를 잘하고 봉사하고 사역하고 발로 뛰는 일보다 더 시급한 것은)
‘생산자’인 ‘하나님 그 자체’을 추구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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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지한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생산자’인 ‘하나님 그 자체’와 인격적인 관계가 깨지고 그 분을 추구하지 않고
내 방식을 고수하고 인격적인 관계에 깨짐은 그 주인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을 “행악”으로 규정하고,
그 “행악”은 내 방식만을 고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주인을 알려고 하는 의도 조차도 없는 사람이 된다.
그 사람은 그냥 함께만 있는 것만으로
“의미부여”를 합니다.
함께는 있는데 주인을 알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게 본질을 벗어난것이다.
저는 알려는 의도가 1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주인은 이들이 함께 있었다고 하지만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누구니 너?
-> 여러분, 이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이었습니다.
의인 10명 조차도 없는 것은, 하나님을 알려는 의도가 1도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 비춰서 말하면, 소돔과 고모라는 모두 다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행악자” 그게 자기 방식을 고수하는 자입니다.
그게 멸망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모두 슬피 울며 이를 갈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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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나오는 소히 예수님의 적대자들로 표현되는
‘바리새인’, ‘율법학자’ 들은 이런 의도가 없는 상태를 말해줍니다.
그들에 의도는 명확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아니라,
고발하고 죽일려는 의도 밖에 보이지 않는 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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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예루살렘 여행 기사를 통해서
또는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그 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자기 방식을 고수하는 자들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즉, 그 분과 인격적인 관계가 되면
그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려는 의지도 가지게 된다.
반대로,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그 방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좀 더 살펴보면, 자기 방식을 고수 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는 것이 전부 인 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그 자체’가 ‘인격적인 관계’가 된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고
인내하고
감사하며
그것을 따라 살려는 강한 의지와 의도를 가지게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눈이 ‘복’ 되다 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에게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 된다고 언급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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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지금 그림 하나를 보여드릴 것입니다.
>(2) 별이 빛나는 밤(그림) ppt
이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에 그림인 ”별이 빛나는 밤“라는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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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상하나를 보여드릴 것입니다.
가운데 점이 하나 있는데 눈을 띄지 마시고, 그 점을 계속 보고 계시면 됩니다.
>> (3) 착시현상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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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계속 무언가를 집중하고 있을 때,
그림은 움직이지 않는데(현실),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왜곡)
현실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지한 사람’은 하나님(생산자)인 그 분과 인격적인 관계가 깨지고,
그 방식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방식을 추구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방식대로 바라보는 것” 입니다.
자기 눈에 좋아보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생산적인 것을 찾고 갈망합니다.
그리고 그 결론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아서 그림이 움직이는 것 처럼,
착시현상이 일어나서 큰 착각과 망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누군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뭘 추구하고
그 분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파악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 달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자기 방식대로”하고 “자기 방식대로 바라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게 “행악자”라고 성서는 말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아러한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들”(행악자)
즉, 인격적인 관계가 깨지고 내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성경구절만 선택하고,
필요한 성경구절을 끌어다가 사용하고, 합리화시키고
공동체를 조정하고 공동체를 자기 손 안에 놓게 합니다.
“신앙의 괴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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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시각에 대한 ‘무지함’을 많이 기록합니다.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방식대로 보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제시합니다.
물이 넉넉함을 보고 따라가는 인생의 허망함을 보여 주고,
결국엔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신세가 된다.
창조 사건 이후, ‘선악과 사건’을 통해서 알려주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 인간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허용하시고, 단 한 가지만 ‘통제’하십니다.
근데 인간은 ‘통제된 한 가지만’(선악과) 집중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눈에 좋아 보이니깐”
-> 단 하나를 통제했는데,(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 말씀
단 하나인 동물인 ‘뱀’에 의해서 하와 자신이 눈에 좋아보였던
(눈에 좋아 보였던 그 나무에 대한 인식에 확신을 뱀이 불어 넣어주었다)
즉, 이거 진짜 좋은게 맞았구나...그리고 따서 먹습니다.
결과적으로, 단 하나의 식물인 ‘선악과’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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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때로 사단은 우리를 여러 가지로 통제시키고 유혹한다고 하는데
여러분 그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통제시키는 것은, 단 하나만 집중하지 못 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생산자’ ‘디자이너’인 ‘하나님 그 자체’ 단 한 가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한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단절시키면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첫 사람인 아담에게 ‘단 한지만’(선악과)를 통제했지만,
아담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었던 환경이었다.
심지어, 이름까지 지을 수 있는 권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단 한가지’를 통제못하고, 범했을 때 ‘모든 것’은 다 무너졌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쫒겨나고 그리고 땀을 흘려 수고해야 했고 육체의 피로는 더해 졌고
무엇보다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이를 갈며 슬퍼하기 시작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 분, 한 분,
그분이 우리의 본질이요, 단 한분이 우리의 모든 것인데,
딱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되면
인격적인 관계가 깨지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바이 바이 바이야) (슬피 울며 이를 갈거야)
타락하는데 힘 쓰지 마세요.
모든 것인 그 한분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깨어지며,
이미 타락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꽝 꽝 꽝 ‘무지한 사람’이라고 판결됩니다.
그렇다면,
무지한 사람들(인격적인 관계가 깨진 사람)의 행동은 어떤 결과를 초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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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예수 나를 위하여
(1)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후렴: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2)십자가를 지심은 무슨 죄가 있나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야 죽였네
(3)피와 같이 붉은 죄 없는 이가 없네
십자가의 공로로 눈과 같이 되네
(4)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로 아니면 영원 형벌 받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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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함은 메시야를 그 분을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깨진 사람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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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계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내 방식으로 무지한 상태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과 나는 남남이 상태가 된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나의 방식대로 ‘무지한~~~’상태로 끌고 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점점 말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촉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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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 ppt – 29-30절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이 초청은 어떤 누구나 모든 사람 전부에게 다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자가 있다고 하십니다.
왜? 먼저가 아니라 나중으로 순서상 배열 했을까?
하나님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의지와 의도를 가진 사람은 먼저가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말입니다.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 여기서”(현재시제)로 “힘 쓸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돌이키시라는 말입니다.
나중이 되었다면, 먼저가 되세요.
하나님 한 분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분에 방식을 추구하세요.
먼저 될 사람은 여전히 ‘지금 여기서’와 관련되어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한 분이 그분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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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첨부] - (4) 디즈니 랜드 ppt
-> 디즈니 랜드 퍼레이드 도중...(한 사람을 위해서 함께 누울 수 있는 것이 ‘본질’이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한 소녀....
-> 미국 캘리포니아 디즈니랜드에서 벌어진 일이다.
다운증후군을 앓는 한 소녀가 퍼레이드 직전 도로에 드러누웠다.
사람들은 당연히 디즈니랜드 직원들이 제지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직원들이 소녀처럼 거리에 드러누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하늘을 가리키며 직원이 소녀에게 ‘하늘에 뭐가 보이니?’라고 물어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항의하던 관람객들이 감동의 박수를 전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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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릴 때,
소외당하는 자들(사회적 약자들)
고아, 과부, 몸이 불편한 자, 병든 자 등등에 대해서 기록을 많이 한다.
저는 사실 이 기사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누가가 그리는 예수님의 초상화는 방금 보신 그림처럼,
그들과 함께 ‘드러눕는 것’이었고, 그들과 ‘대화하셨던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개인화로 물든 현대사회에 꼭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라는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한 영혼을 위해 함께 드러 누워줄 수 있습니까?
한 영혼을 위해서 먼저 가서 말을 걸어 주실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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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던 소녀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관람권에 대해서 환불조치를 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곧,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그 누구도 보상해달라고 항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 방식대로라면, 돈을 지불하고 퍼레이드를 관람해야 되는 것이 마땅한데,
모든 사람이 다 포기하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기립 박수’ 이었습니다.
저는요.
이 퍼레이드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지금 저 소녀와 함께
‘드러누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그게 교회가 할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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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삶의 방식은 무엇을 추구하십니까?
왜?
우리는 항상 저 퍼레이드에 지불을 한 값을 환산하고
그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방식인 것처럼,
합리성만 따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지한 상태 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지불했으니, 마땅히 당연히 대우받는 것입니까?
내가 얼마나 헌금을 많이 했는데!!! 내가 얼마나 봉사를 많이 했는데!!!
다 다 다 전부 다 내 방식, 내 사고, 내가 투자한 에너지!!!!
그게 만약 지금 우리의 삶의 방식이라면,
그것은 ‘넓은 문’으로 가고 계시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게 ‘무지한 상태’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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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좁은 문이라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뭡니까?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 또는 죄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하셨는데
함께 드러눕고 그들과 대화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 그 한 분에 인격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그 하나님의 방식을 추구하고 따라가면서
형제 자매의 필요를 살피고 함께 드러눕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인도하심에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무지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며
그 사람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함께 드러눕는 섬김을 통해서 이웃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며
세계를 살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그 사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좁은 문을 들어가길 힘쓰는 사람이
이 대광 교회 안에 가득하길 간절히 간절히
축언합니다 축언합니다 축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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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며 통치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고백하며 이 물질에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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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고백을 담아 감사헌금을 올리며,
날마다 감사의 고백이 더욱 더 풍성해 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감사의 조건들이 더욱 더 선명하게 보여 지는 영안이 열리게 하여 주시고
감사의 입술로 선포하며 살아가는 인생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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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 하신 사랑하심과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 역사, 인도하심이
무지함을 버리고 생산자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따르며 그 분의 방식을 추구하며 따라 살아가길
믿음으로 결단하는 대광의 권속들 머리 위에와
복음을 들고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님의 가정과 교회들 위에 그리고 저 북한 땅에 제대로 된 공간 없이 지하 어두운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믿음을 지키고 있는 북한의 믿음의 동포들 머리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언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