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가정을 선택하라

고예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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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2023년 통계에 따르면, **20대 중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말한 비율은 단 9%**였습니다. 30대도 11%에 불과하여, 10명 중 1명꼴입니다. 이 수치는 단지 종교의 감소가 아니라, 신앙 전수의 실패를 가리킵니다. 불과 6년 전과 비교해도 절반 수준이고, 20년 전과 비교하면 3분의 1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학생을 찾기조차 어려워, 다음 세대를 ‘미전도 종족’이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신앙의 단절은 어디서 시작될까요? 가정입니다. 고령 세대의 **모태신앙 비율은 약 50%**에 달했지만, 30대 이하에서는 20%로 뚝 떨어졌습니다. 전체적으로도 한국 교회의 모태신앙 비율은 30% 이하로 감소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점점 줄고 있습니다. 믿는 부모가 있어도, 믿는 자녀는 없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호수아의 고백은 단지 과거의 외침이 아닙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는 가나안에 정착한 백성들에게 다시 신앙을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왜일까요? 믿음은 가정에서 시작되지만, 가정에서 쉽게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백성들은 가나안의 문화와 신들에게 조금씩 익숙해졌고, 여호수아는 그 ‘익숙함’ 속의 신앙적 위기를 직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같은 경고 앞에 서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신앙은 가정에서 전해지지 않고, 믿는 부모 세대의 신앙은 다음 세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다시 결단해야 합니다. 누구를 섬길 것인가? 어떤 가정을 세울 것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입니다. 믿음의 가정을 ‘선택’하지 않으면, 믿음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본론 1. 믿음의 가정을 지키는 첫 번째 방법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본문 주해)

여호수아는 14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수 24 14
여호수아 24:14 NKRV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단순한 문장 전환이 아닙니다. 이것은 2절부터 13절까지 이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종합하며, 그 은혜에 대해 **당신은 이제 어떤 결단을 할 것인가?**라는 신학적 촉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자손을 번성케 하셨으며,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들을 모세와 아론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먹이시고 인도하셨으며,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싸우지 않은 성읍과 집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모든 길에서 그분이 앞서 행하시고 보호하셨기에, 지금의 이스라엘은 전적인 은혜 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점은 14절~18절 자체 안에서도 은혜의 회상이 다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17절에서 백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수 24 17
여호수아 24:17 NKRV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이 구절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공동체와 가정 가운데 베푸신 선행적 구원을 회상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세 가지 은혜를 되새깁니다:
애굽에서 해방하신 구원의 은혜, 기적과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하신 계시의 은혜, 광야와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지켜주신 보호의 은혜
다시 말해, 지금 자신들이 여호수아 앞에서 신앙을 결단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들이 먼저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5절에서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수 24 15
여호수아 24:15 NKRV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이 구절은 강요가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명령하지 않고 자기 가정의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결단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 은혜를 기억하기 때문에, 당연히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가정이 서는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이고, 그 위에 결단이 세워집니다.
어나더 주해) 여호수아 24장에서 하나님은 과거의 구원 역사, 즉 은혜를 기억하게 하심으로 백성들에게 결단을 요구하셨습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신명기 8장에서도, 모세는 약속의 땅을 앞둔 세대에게 “광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너희를 인도하셨는지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함께 신명기 8장 2절을 읽겠습니다. 신 8 2
신명기 8:2 NKRV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여기서 히브리어로 ‘기억하라’는 단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그 사건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반응하라는 능동적 명령어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가정이 배고픔과 부족함이라는 현실 속에서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특히 3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 8 3
신명기 8:3 NKRV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은 단지 과거를 떠올리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선택과 삶의 기준도 그 은혜 위에 세우라는 명령입니다. 여호수아 24장과 신명기 8장 모두 우리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은혜를 베푸셨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기억하라. 그 기억이 삶의 태도와 선택을 규정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그러했듯, 오늘 우리도 가정 안에서 이 기억을 놓치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기억할 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예화)

한국 현대 신학의 큰 뿌리 중 한 명인 김치선 박사(장로회신학대학교 초대 학장)는 6.25 전쟁 중 부산 피난지에서 자신의 가족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 반복해서 말해 주는 일에 힘썼습니다.
당시 가족은 집도 없고, 먹을 것도 부족했습니다. 아이들은 다섯이었고, 교육은커녕 하루를 살아가는 것조차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치선 박사는 매일 가족들과 함께 앉아 하나님이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신 역사, 자신의 젊은 시절에 겪었던 믿음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그리고 한 끼도 굶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회상하며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가족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전쟁 중에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 믿음을 버리지 않은 것,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이 고백은 단지 말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자녀 중 김명혁 박사(합신 초대 총장)는 훗날 이렇게 회고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었고, 그 기억을 말과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김치선 박사의 후손들은 신학자, 목회자, 선교사로 흩어져 믿음을 잇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한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적용) “여러분의 가정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가정 안에 흐르고 있는 **‘기억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아이들은 집에서 무엇을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까?
“공부 열심히 해야 사람 된다.”
“돈 있어야 성공하지.”
“예배는 주일에만 드리면 되지, 평일엔 바쁘다.”
우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그것이, 곧 가정의 기억이고 신앙의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애굽에서 어떻게 건지셨는지’, ‘광야에서 어떻게 먹이셨는지’를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 8:2–3). 여호수아는 죽기 직전,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자”고 백성에게 외쳤습니다. 그 은혜가 없었다면 이스라엘도 없고, 지금의 우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가정을 세우는 일은 거창한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기억하게 하는 삶의 반복입니다.
밥을 먹을 때 “오늘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말하십시오.
자녀가 힘들어할 때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 말하십시오.
가족과 함께 지난 삶을 돌아볼 때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이렇게 하셨지” 말하십시오.
은혜를 기억하는 언어와 분위기가 흐를 때, 가정은 복음 위에 세워집니다.

[본론 2. 믿음의 가정을 지키는 두 번째 방법은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고, 우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주해)

우리 함께 본문 14-15절을 읽겠습니다. 수 24 14-15
여호수아 24:14–15 NKRV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기서 여호수아는 두 가지 명령어를 동시에 던집니다. 하나는 **“섬기라”**는 적극적 명령, 또 하나는 **“제하여 버리라”**는 배타적 명령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언급하는 신들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강 저편의 신들” – 이는 아브라함 이전 조상들이 숭배했던 바벨론계 다신(多神) 사상입니다. 이 신들은 땅과 풍요, 태양과 전쟁을 관장했습니다.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 – 나일강, 가축, 파라오까지 신격화하던 체제 속에서, 인간의 힘과 체제 중심의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 – 지금 이스라엘이 거주하게 된 가나안 땅에서 보게 되는 지역 신들, 곧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 현세적 성공과 쾌락을 추구하는 신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은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우상 체계들과의 결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우상은 더 이상 돌로 깎은 형상이 아닙니다. 우상은 가정의 시간표를 조정합니다. 우상은 자녀의 우선순위를 결정합니다. 우상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고,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여전히 성공, 안정된 미래, 자녀의 성적, 사회적 인정, 물질적 풍요 같은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갈 유혹에 끊임없이 노출돼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여전히 작동하는 ‘아모리 사람의 신들’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버리지 않고서는 믿음의 가정은 절대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면, 그 외의 것들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분리해야 한다.”
믿음의 가정은 이중적 기준으로는 세워질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예배하지만, 안에서는 세상의 성공과 편안함,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을 우선하지 않는다면, 그 가정은 결국 우상을 따르게 됩니다.

예화)

1924년 파리 올림픽. 영국의 육상 국가대표 에릭 리들은 100미터 달리기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선 경기가 주일에 열린다는 이유만으로 출전을 거부합니다. 국민들의 비난과 언론의 압박 속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일은 내게 하나님의 날입니다. 그 날에 뛰는 것은 곧 하나님보다 금메달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의 이 절대적인 결단 뒤에는, 가정에서 세워진 분명한 신앙 기준이 있었습니다. 에릭 리들의 부모는 중국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주일은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선이라는 신앙 교육을 삶으로 배웠습니다.
그의 가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 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에 두는 삶의 질서를 지켰고, 그 기준은 어린 에릭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에릭 리들은 결국 400미터 경기에 나가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님에도 금메달을 땁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빛나는 것은,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가정의 신앙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적용) “오늘 당신의 가정은 무엇을 버릴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끝없이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자녀 교육, 직장 문제, 인간관계, 시간 관리… 그 모든 결정의 중심에 과연 하나님이 계십니까?
그러나 여호수아는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5)
이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 아닙니다. 선택을 요구하는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중립은 없습니다.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세상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거짓된 평화입니다. 결국 그 신앙은 자녀에게 전수되지 않습니다.
자녀는 교회에서 듣는 설교보다, 부모의 우선순위에서 신앙을 배웁니다.
부모가 주일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예배와 공부 중 어떤 것을 먼저 택하는지
불안할 때 무엇을 더 붙드는지
이 모든 것이 자녀의 신앙 기준이 됩니다.
“예배보다 학원이 먼저”라는 선택이 반복되면, 아이는 자연스레 하나님보다 성적이 중요한 삶을 배우게 됩니다.
“가정에서 기도보다 드라마가 익숙하다면”, 하나님은 뒷전이 됩니다.
믿음의 가정은 기준이 있는 가정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고백은 어떤 스케줄보다, 어떤 문화보다 먼저 하나님을 두겠다는 삶의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은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무엇이 하나님보다 앞서 있습니까? 혹시 자녀의 신앙보다 대학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말은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 하지만, 실제 행동은 다르게 움직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치워야 할 것을 버리십시오. 하나님 외에 붙잡은 것들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 안에서도 오늘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 고백이 반복될 때, 여러분의 가정은 세상과 구별된 믿음의 유산을 남기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본론 3. 믿음의 가정을 지키는 세 번째 방법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본문 주해) 여호수아 24:18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수 24 18
여호수아 24:18 NKRV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도전에 감동하거나 흥분해서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선택한 이후에, 마침내 자기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헌신의 고백을 내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이 고백에서 ‘섬기리니’라는 단어는요, 단순히 예배드리는 행위를 넘어서 삶 전체를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순종의 태도로 살아가는 헌신된 실천을 의미합니다.
즉, 그들은 말씀을 따르는 삶, 하나님을 가장 우선에 두는 삶,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이 고백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진술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다.” 이것은 정체성의 고백이자 소속의 선언입니다. 믿음의 가정이란,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가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존재의 뿌리를 하나님께 둔 가정입니다.
이 고백은 단지 과거에 머무르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가정이 드려야 할 살아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위기와 갈림길을 지나왔지만, 그 길 위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하나님의 손이 있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고백도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가정에서 울려 퍼질 때, 그 가정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억 속 은혜가, 현재의 고백이 되고, 그 고백이 실천으로 이어질 때, 가정은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예화 )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지 선교회의 창립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남긴 가장 깊은 유산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본’을 자녀들에게 남긴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하워드 테일러는 훗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운 적이 없다. 다만 그것을 매일 보며 자랐을 뿐이다.”
그는 아침마다 마룻바닥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던 아버지를 봤고, 경제적 어려움이 와도 낙심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채우실 거야”라고 평안하게 말하던 어머니의 태도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가정에서는 사역 이야기도, 헌신 이야기도 없었지만, 아버지의 시간표, 어머니의 기도, 가족이 모여 부르는 찬송—그 모든 것이 그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실제적인 교과서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 집에는 종교적인 말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었고, 부모님의 모든 결정 속에, 하루의 시간 속에 하나님을 먼저 두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신앙의 길을 걸었고, 중국 선교지로 나아가 아버지처럼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을 섬기는 부모의 실천이 말보다 깊게, 그리고 정확하게 자녀에게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적용) “당신의 가정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익숙합니다. 하지만 삶으로 섬기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쉽게 멈칫합니다. 섬김은 말이 아닙니다. 섬김은 하루의 시간표, 우선순위, 말투, 결정, 지출, 교육관, 식사 기도에까지 스며든 살아 있는 질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으로 엽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 뜻보다 앞서 결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정은 주일을 생명처럼 여깁니다.”
“우리 자녀는 부모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를 보고 자랍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 하나님이 실제로 ‘누구신가’를 드러내며 사는 것입니다.
하워드 테일러가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배운 적이 없다. 다만 매일 그것을 보며 자랐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부모가 하나님을 삶의 한복판에서 먼저 두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자녀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삶을 보고 있습니까?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가정. 그런 가정이 세워질 때, 믿음은 이어지고, 흔들리지 않으며, 다음 세대까지 살아 있게 됩니다.

[결론 “그리스도께서 섬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가정에서 섬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의 마지막 고백 앞에 섰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 말은 단순한 가정의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우상을 제거하고, 삶 전체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언약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구약의 백성만의 몫이 아닙니다. 이 고백의 완전한 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섬기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예수님은 가르치기 전에 먼저 행하셨고, 명령하기 전에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밤이 깊도록 기도하시는 모습을 통해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 고백하심으로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이 무엇인지 보여주셨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진정한 섬김의 극치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 가정도 마땅히 그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 가정을 위해 하나님 앞에 삶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먼저 섬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가정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자녀를 향한 욕심과 세상의 기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의 가정을 하나님께 속한 예배 공동체로 바꾸어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먼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우상을 제거하고, 삶 전체로 섬기는 가정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입술이 이렇게 고백하길 바랍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리고 우리의 삶이 이렇게 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 위에 세워진 믿음의 가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결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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