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과 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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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서론
수아 수빈이를 돌보다보면 가끔 전화가 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 낮의 경우에도 드보라 전도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성경쓰기를 해야 하는데 수아가 말하는 것과 수빈이가 말하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수아 수빈이의 할 일을 담당하는 사람은 저이니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묻기 위해 전화가 온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일이 많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할 때 결정권자에게 우리는 연락을 합니다. 왜냐면 결정권자에게 연락하지 않고 주변 사람의 말을 듣고 일을 했다가 일이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기 있는 여러분도 제대로 연락하지 않고 일을 했다가 혼나본 경험을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나 회사에서도 일을 판단하는 사람의 생각과 뜻을 알기 위해 애씁니다. 일을 판단하는 사람의 생각과 기준에 맞춰 일하기 힘씁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알아야 할 중요한 판단자가 계십니다. 그것은 누구시냐?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지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 마음 먹은 유대인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외쳐 선포하십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외침을 들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을 얻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은 12장 44절부터 50절의 말씀을 통해 요한복음 2장에서부터 시작하셨던 사역과 가르침을 요약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믿는 것이 자신을 보내신 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3장, 5장, 10장 등 수없이 많은 가르침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말은 100%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약과 신약을 분리하지 않고 믿는 이유입니다. 구약에서 증언하는 세상의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하나님에 대한 말씀보다 확실하고 정확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향해 어떤 마음이신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기 원하셨고, 이웃을 사랑하기 원하셨으며 그 사랑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지금도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보이신 하나님,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지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과 하나님의 명령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완벽하게 스스로를 드러내신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에 서야 합니다. 철저하게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46절과 47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빛으로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맡으신 역할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가장 처음 1장에서 예수님에 대해 빛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어둠에 쌓인 혼돈한 이 세상을 밝히시고 질서와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신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우리 창세기 1장을 기억하십니까? 창세기 1장을 보면 “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질서 없이 뒤죽박죽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모르고,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어 공허하며, 어둠이 덮여 사망이 가득한 이 땅에 하나님께서 맨 처음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이 빛은 세상의 혼돈에서 질서를 세웠고 공허함에 의미를 부여했으며 어둠이 덮여 사망이 가득한 이 땅에 생명을 주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빛을 넘어 존재론적으로 이 세상을 만든 주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창세의 빛을 우리가 살펴보는 요한복음 1장에선 예수님이라 말씀합니다. 세상에 질서를 세우고, 의미를 부여했으며, 사망을 몰아내고 생명을 주신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자신의 사명을 설명하십니다. 바로 자신을 믿는 자가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여기서 어둠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죄로 스스로 눈이 멀은 악한 세상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종이 되어 신음하고 있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를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역할은 죄와 사망의 어둠 속에 있던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다만 그것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아니실 뿐입니다. 4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따르지 않는 자를 심판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조금 이해가 잘 안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오시는 재림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마지막 날에 심판한다니요? 이것은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운 의인화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근거로 마지막날에 심판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사회는 법치주의의 사회입니다. 나라에서 정한 법의 기준에 따라 판결이 내려지고 형벌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판사에 따라 그 법의 잣대가 조금 흔들리고는 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던 2천년 전에는 더 했습니다. 이 때는 법이란 것은 거의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판결의 기준은 힘있는 자의 권리였고 대부분 왕이나 권력자들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입맛에 맞추어 사람들에게 형벌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면 벌을 받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왕과 권력자의 그때그때의 생각과 기분에 따라 판결이 내려지니 같은 행동도 유죄와 무죄가 갈리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들은 적도 없는데 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48절에 세상의 왕과 권력자들처럼 심판을 내리지 않으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미리 충분히 판결의 기준을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따르지 않는 자는 변명할 수 없이 마지막날에 심판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마지막 날 가장 중요한 심판의 기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수 많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왜 예수님의 말씀이 심판의 기준이 되어서 우리가 성경을 다 지켜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심판 받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자의로 말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44-45절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으신 것을 단 하나도 자의로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하나님께 명령을 받아 조금의 덜함도 없이, 더함도 없이 세상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마지막 날 가장 중요한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영생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 속에서 신음하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 번이고 말했었지만 우리는 결코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죄로인해 타락하고 병들어 신음하고 있었고 사망과 어둠의 종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하나님을 반역한 자들이었고 마지막날 저 사망과 어둠의 권세들과 함께 이미 심판이 예정되어 있던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겨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예수님을 예정하셨고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합당하게 사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복음은 기쁨이요 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거부한 자에게는 복음이 저주와 슬픔입니다. 그들의 죄가 더 이상 심판이 미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복음 앞에서 변명할 수 없을 것이고 자신의 죄악과 그 책임을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축복과 저주가 나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선포된 예수님의 복음의 예표입니다. 복음에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따르면 영생과 축복, 거부하면 사망과 저주입니다. 죄과 어둠이 왕노릇하던 혼돈과 어둠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범죄자, 범법자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마구 날뛸 수 없습니다. 정당한 왕이 오셨고 그분이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죄인들이 마음껏 설치며 죽이고 빼앗아도 누구에게도 심판받지 않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잠깐의 유예기간이 있을 뿐이지 이제는 심판의 시대가 왔습니다. 예수님의 정당한 가르침에 따라 유죄와 무죄가 갈라질 것입니다. 그 누구도 변명하지 못할 것이고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만이 심판을 피하고 상과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를 기억하며 성경 말씀을 알기 힘써야 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알기 힘써야 할 것입니다. 법을 모르면서 법을 지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모르면서 따라 사는 것도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마땅히 말씀을 알기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을 보고 공부할 때 실천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글자와 지식만 달달달 외우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법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지키지 않으면 범죄자가 되는 것처럼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말씀을 듣고 내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지 묵상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런데 이런 실천을 위해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삶이 그렇게 쉽게 딱딱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인지 우리는 많이 헷갈립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을 더 알기를 부단히 힘쓰고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축복교회 지체 여러분. 제가 여러번 말씀 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알기 힘써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생과 심판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학문, 철학, 경험, 간증, 체험, 영적 사역 등을 통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도움일 뿐이지 결코 신앙의 기준이 되어선 안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하는 것처럼 영생과 심판의 기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명생사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알기 힘써야 할 것입니다.
결론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좀 과장되서 말하면 이 차이로 인해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가 갈리는 큰 차이입니다. 제가 오늘 이것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험을 치뤘을 때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자신이 맞은 것에 집중합니다. 자신이 몇개를 맞았는지 확인하고 그것에 기뻐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다릅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자신이 틀린 것에 집중합니다. 자신이 어떤 내용을 모르고 어떤 실수를 했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틀리지 않게 노력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학교를 졸업해서도 나타납니다. 공부를 못하던 학생은 자기가 아는 것만 보려고 합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봤을 때만 기뻐하고 그것만 반복해서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던 학생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합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았을 때 기뻐하고 더 배우려고 합니다. 이러한 자세와 태도의 차이가 조금씩 차이를 만들어가고 나중에는 정말 큰 차이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내가 이미 성경적으로 잘 알고 행하고 있는 것만 칭찬받으려는 태도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의 태도입니다. 맨날 그 자리에 머물러서 하나의 발전과 성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잘 모르고 행하지 못하던 성경의 말씀을 알려는 태도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의 태도와 같습니다. 매일매일 조금씩이지만 믿음이 커가고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합니다. 내가 잘하는 것만 인정받고 칭찬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기에 다른 교우나 사역자가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한 부분을 지적한다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를 통해 회개하고 나를 돌이킴으로 하나님께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에 가치를 두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던 것을 돌이켜 살아감에 더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조금씩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큰 축복과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는 축복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