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중에도 행복한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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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난 중에도 행복한 삶이란
[서론]
얼마 전, 한 목사님의 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왔다고 하셨다면서요?
그런데 왜 세상은 여전히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행한 사람들이 많은 거죠?”
그 질문 앞에서, 저는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 말이 너무나 공감이 됩니다.
과연 이 세상이 정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일까요?
여전히 악인들이 득세하고, 정의는 무너진 듯 보입니다.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받고,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살고, 더 행복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하나님께 실망하고 신앙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현실에 맞춰 신앙이 점점 형식적으로 굳어져 가는 경우입니다.
가장 위험한 반응은 세 번째입니다.
신앙이 열정도 없고 의문도 없는 ‘회색지대’에 오래 머물게 되면,
삶은 마치 닻 없이 떠도는 배처럼 방향을 잃고 맙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이 세 부류 중 어디에 속해 있는가?
지금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오늘 말씀이 우리의 이러한 질문에 답을 주길 소망합니다.
[첫번째 본론]
먼저 오늘 시편 119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19편은 150편의 시편중에서 가장 길고 특별한 시입니다.
무려 176절이나 되는 이 시는 단순히 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열정과 신앙고백때문에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습니다.
또한 이 시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8절씩의 연이 모여 총 176절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어로 비유하자면, ‘ㄱ’으로 시작해 ‘ㅎ’으로 끝나는 시와 같은 구조입니다.
이를 통해 시인은 하나님 말씀의 질서와 아름다움 그리고 완전함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A부터 Z까지, 처음과 끝을 아우르는 인생의 나침반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이 시편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온 세상을 준다 해도 이 시편의 작은 한 부분조차 포기하지 않겠다”
역사상 설교의 황제로 불리던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119편은 다이아몬드 광산과도 같다. 어느 절을 파도 그 속엔 빛나는 진리가 들어 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은 ‘성경의 축소판’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편의 시 안에 하나님 말씀의 아름다움과 깊이, 능력이 모두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시인은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는 것일까요?
그의 삶이 너무 잘 풀리고 성공해서 간증을 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몇 구절들을 통해 그가 처한 현실을 유추해 보겠습니다.
50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나를 살려 주었으니, 또한 내가 고난을 받을 때에,
51절입니다.
교만한 자들이 언제나 나를 혹독하게 조롱하여도,
53절입니다.
악인들이 주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것을 볼 때마다,
61절입니다.
악인들이 나를 줄로 얽어매어도,
62절입니다.
‘한 밤중에라도’ 그만큼 어두운 삶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현재 시인은 죽을 것같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한밤중처럼 어둡고, 주변은 악한 자들로 둘러 싸는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조롱과 핍박, 외로움과 억울함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거나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서도 붙들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고난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 앞에서의 반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은 전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 앞에서 무너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억지로 참아내며 괜찮아질거라며 정신승리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고난을 애써 무시하거나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이 세종류의 반응중 가장 안 좋은 케이스가 바로 세번째 입니다.
고난을 인정하지 않으면 변화될 여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늘 말씀의 시인은 고난을 어떻게 대할까요?
시인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눌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듭니다.
[두번째 본론]
왜 시인은 이런 힘겨운 고난 중에도 말씀을 붙들까요?
첫째,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49절입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시인은 하나님께 “말씀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말은 마치 하나님이 말씀을 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씀이 약속이기 때문에, “그 약속을 이루어 달라”는 신뢰의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명령이나 정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담긴 약속, 곧 신실하신 분께서 반드시 이루시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현실이 고통스러울수록, 더욱 그 말씀을 의지합니다.
고난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곧 그분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존 번연의 유명한 책, 『천로역정』에 나오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주인공 크리스천과 동료 소망은 ‘절망 거인’에게 붙잡혀 절망의 성 감옥에 갇힙니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심한 고문과 협박에 시달리며, 거의 소망을 잃을 지경이 됩니다.
그때 크리스천은 문득 자신의 품 안에 하나의 열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냅니다.
그 열쇠의 이름은 바로 ‘약속(Promise)’입니다.
그 열쇠로 감옥 문을 열었고, 두 사람은 절망의 성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시편 119편의 시인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쉽게 현실만을 보게 되고, 그 안에 갇히게 됩니다.
상황이 너무 무겁고 아프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이 땅에 떨어지고
절망과 두려움이 마음을 휘감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줍니다.
고난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현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말씀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말씀은 단지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믿음의 시야를 회복시키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문제와 상황만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문제 위에 계시며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왜 시인은 고난 중에도 말씀을 붙들까요?
둘째, 말씀은 살리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50절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를 살려 주었으니, 내가 고난을 받을 때에, 그 말씀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말씀이 나를 살렸다’
말씀이 단순히 감정적으로 위로만 하는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처입은 마음을 치유하고, 무너진 자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람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말씀은 단순한 위로나 격려가 아니라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힘과 능력입니다.
얼마전 유튜브에서 개그맨 장동민씨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때 생각난 사람이 유재석씨였는데, 친하지도 않고, 개인적으로 만난적도 없는데 그냥 연락해서 만나자고 했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술을 마시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유재석씨는 “그래. 잘 찾아왔어. 나도 네 이야기가 듣고 싶더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장동민씨는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진심어린 공감의 말은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을 일으킬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럼 하물며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절망 속에서 소망을 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붙들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말씀이 고난을 없애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은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이 꺾이지 않게 해줍니다.
말씀은 우리 속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줍니다.
말씀은 결국 우리의 상황까지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세번째 본론]
왜 시인은 고난 중에도 말씀을 붙들까요?
셋째, 말씀은 살아내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단순히 아는데서 능력이 있는게 아닙니다.
아무리 말씀이 하나님의 약속이며, 살리는 능력이 있을지라도 살아내지 않으면 아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키는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51절입니다.
교만한 자들이 언제나 나를 혹독하게 조롱하여도, 나는 그 법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53절입니다.
악인들이 주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내 마음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시인은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무시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합니다.
심지어 시인은 이런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당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분노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나타납니다.
그럼 우리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불의가 판치는 세상 앞에서,
인권이 짓밟히고, 약자가 무시당하고, 생명이 경시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하나님을 무시할때 거룩한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 더욱 순종하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시인은 냉혹한 현실 앞에 신앙을 타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이 마치 이방인, 나그네처럼 불안정하고 연약하지만 시인은 힘을 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54절입니다.
시인은 말씀이 자신의 노래라고 고백합니다.
고단한 나그네의 삶에서 말씀이 안식처, 숨구멍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시인은 더 나아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56절입니다.
“주님의 법도를 따라서 사는 삶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시인은 말씀대로 살아서 더 성공하고 부유해져서 행복한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기쁨이고, 만족이고, 복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이자 하나님 나라의 삶이 현실에 임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서 복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입니까?
아니면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신앙에는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집중합니다.
기도응답 받는 것만 좋아합니다.
마치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 아빠가 주는 선물만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성숙하게 되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는 기도가 응답되는 것보다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자체를 기쁨으로 여기게 됩니다.
말씀대로 사는 삶이 곧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으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홀로 지키며 살아가는게 쉽지 않습니다.
시인에게는 함께 말씀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지키는 영적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런 공동체를 통해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63절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친구가 됩니다.”
고난 중에도 시인과 같은 공동체가 있기에 버틸수 있습니다.
말씀을 함게 붙드는 사람들, 신앙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말씀을 순종할수 있도록 붙들어주는 이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럼 우리 교회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서로 말씀 지킬수 있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 입니까?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며 살아갈수 있도록 기도하는 공동체입니까?
오늘날 교회는 바로 이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기 힘겨울때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해줄수 있는 영적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을 전하며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참 부럽다.”
그는 밤중에도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말씀을 사랑했으면 그리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삶은 고난으로 가득했지만,
그 속에서도 말씀이 그의 위로이고, 노래이고, 행복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천국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고, 삶으로 드러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 길을 혼자 걷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말씀이 아니라 욕망을 따르라 말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어리석다고 조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동체, 곧 교회를 주셨습니다.
함께 걷는 길이 바로 복된 길입니다.
서로 말씀을 붙들게 도와주고, 고난 중에도 함께 기도하며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붙들어주는 동역자가 있는 삶—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말씀을 사랑하지 못할까요?
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우리에겐 힘들고, 행복으로 느껴지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말씀이 아직 마음에 깊이 새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말씀을 알고 있지만, 가슴에 새겨지지 않았기에 삶으로 흘러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짜 묵상은 말씀이 나를 읽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말씀이 내 마음을 비추고, 내 삶을 찔러내고,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 그때 묵상은 변화가 됩니다.
그리고 진짜 묵상을 경험한 사람은 혼자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마음에 가득 차 흘러넘치게 되어 있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저는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런 말씀 묵상의 기쁨과, 그로 인한 참된 행복을 함께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 말씀 안에서, 함께 걷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