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7 수요기도회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 views
Notes
Transcript

새 찬송가 310장_아 하나님의 은혜로

합심기도

행복한 동행, 70일을 위한 기도
모든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전도에 동참하며,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소서
성도들이 품고 기도하는 전도대상자들의 마음이 열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준비가 되게 하소서
교회를 위한 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등대가 되게 하소서.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게 하소서.
일본 선교 사역을 도코나메에서 시작하게 될 텐데 선교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소서.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필요를 채워주소서.
국가와 사회를 위한 기도
대한민국의 올바른 지도자가 세워져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나라가 되게 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나라가 되게 하소서
다음세대가 거룩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거룩한 나라가 되게 하소서
욥기 8:1–22 NKRV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11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12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14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16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17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18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19 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불편한 진실

얼마 전, ‘야당’이라는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대한민국의 마약 실태를 잘 보여주는 영화라기에, 한 번쯤 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영화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마약을 소재로 다룬 영화라 그런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었습니다.
입구에서 신분증 확인을 하는데, 솔직히 이제는 그런 검사를 받을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안내해주시는 분이 저에게도 당연하게 신분증을 요구했습니다. 순간 당황했지만, 신분증을 내밀며 저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그분이 보시기엔 제가 충분히 청소년으로 오해받을(?) 만한 외모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때때로 기분 좋은 오해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참 난처한 오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수아 사람 빌닷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실하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빌닷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쌓아갔던 이유를 이제부터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빌닷의 모습은 조금 어색합니다. 분명히 처음 빌닷이 욥을 마주했을 때 욥에 대한 애정과 걱정이 많이 느껴졌었습니다.
욥기 4:2 NKRV
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네가 듣기 싫어하지만 , 그래도 널 위해 말해야겠다”의 느낌으로 말했지만 이상하리치만큼 오늘 본문에서는 빌닷이 굉장히 격앙되어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충분히 뭔가 설명하고 본인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시작부터 바로 화를 냅니다.
욥기 8:2–3 NKRV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우리가 욥기를 읽으면서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욥기는 결국 많은 장을 걸쳐 욥과 그의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가 주된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본문에 등장하는 수아 사람 빌닷이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냐는 겁니다.
방금 읽었던 욥기 8:2-3을 의역하면 전능하시고 정의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너 따위 때문에 그분의 정의로운 결정이 오해받아야 하는 건가?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빌닷이 한 말만 보면 틀린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빌닷은 고난을 받는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아주 명확하고 확실한 명제를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빌닷의 신학적 견해가 잘 드러나는 구절이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조금 더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 새번역을 한번 보겠습니다.
욥기 8:4 NKSV
4 네 자식들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빌닷은 지금 욥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면서까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네 자식들이 잘못한게 있으니 하나님께서 죽이신 것인데, 왜 억울해하냐는 겁니다. 이걸 바탕으로 생각해봤을 때 빌닷은 자신의 경험과 전통을 굉장히 중시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빌닷의 말만 보면 틀린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욥기 8:8–10 NKRV
8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지금 빌닷의 말만 보면 욥이 아주 큰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빌닷의 말을 의역해보면
욥기 1 너와 나는 한평생 겨우 몇십 년을 사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가 가진 유산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확인된 것이지 않느냐. 그러니 너 한 사람만의 경험으로, 네 개인적인 특별한 경우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쉽게 판단하거나 지금까지 물려받은 전통을 깨지 마라. 여러 세대에 걸쳐 확인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항복이 그리고 그 항복으로 증거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결국 네게 복을 줄 것이다. 그러니 너는 경솔히 행동하지 마라
욥이 과연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빌닷의 말은 언뜻 보기엔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부분이 없어 보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빌닷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모든 것을 온전히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빌닷의 견해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일일까요? 어떤 분은 창조라고 답할 것이고, 또 어떤 분은 부활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창조와 부활은 우열 없이 둘다 큰 일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빌닷에게 던진다면 그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조심스럽게 예상해보건대, 그는 아마도 **‘창조’**라고 답할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그는 선조들의 전통과 경험을 통해 배운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빌닷이 이러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경험과 전통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고정관념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새롭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의 경험이 쌓이고 지식이 많아지면서,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께 한계를 정해두고 계시진 않으셨습니까?
엘리바스와 빌닷의 말이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한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그분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순서’**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추우면 감기에 걸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는 ‘감기에 걸려서 춥게 느껴지는 것’이라는 설명이 맞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예배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체가 ‘우리’가 되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하게 되고, 이는 순서를 거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빌닷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하는 듯하지만, 결국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끌어들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욥이 고백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만이 진짜라며 욥을 몰아세웁니다.
욥기 8:20–21 NKRV
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존재 목적이 주어진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사실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로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드라마를 보면 회장님과 비서의 이야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 중 인상적인 장면은, 비서가 절대 “회장님을 모시고 가는 중입니다”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모든 비서들은 한결같이 “회장님께서 가고 계십니다”라고 표현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표현 하나에 왜 그렇게 민감하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비서가 회장을 모신다고 해서 회장처럼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회장의 뜻과 상관없이, 비서가 판단하고 결정해 회장을 이끌어갈 수도 없습니다. 비서는 오직 회장의 뜻과 선택에 따라 묵묵히 그 역할을 감당할 뿐입니다. 설령 그 결정이 지금의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 선택을 바꿀 권한은 비서에게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혹시 우리는 어느 순간, 내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내가 만든 하나님 안에 하나님을 가두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우리 앞에는 ‘행복한 동행, 70일’이라는 전도의 기회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 사람은 작년에 이미 연락했는데 안 왔어. 그래서 이번에도 안 올꺼야.” “이 사람은 교회에 나와도 문제야.”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하면 안돼.” 이런 기준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고, 사람을 분류하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가 하는 판단이 전도의 기준이 되고 구원의 기준이 된다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있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욥에게 말했던 빌닷을 보며 “왜 자기 기준대로 하나님을 판단하지?”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그 빌닷의 모습이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무엇이 유익한지, 손해는 없는지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받은 복음을 자랑하는 전도 앞에서 여전히 주저하게 될까요? 순서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복음이 나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빌닷처럼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제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바로, 일단 해보는 것입니다.
계산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그저 순종해보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행복한 동행, 70일’ 기간 동안 우리는 ‘전도될 만한 사람, 안 될 것 같은 사람’ 이렇게 사람을 나누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말하기가 껄끄러워’ 하며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일단 해보십시오. 영어로 말하면, JUST DO IT인데 어디서 많이 들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사진 한번 보여주세요
1960~70년대, 아디다스는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스포츠 신발 회사를 설립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거대한 기업 아디다스에 도전장을 내민 셈이었고, 심지어 가족들조차 그들의 계획에 대해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행에 옮겼고, 경영은 녹록지 않았으며 가족의 반대마저 그들을 지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확실한 돌파구를 찾으려 했습니다.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뚜렷한 묘안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Just do it. 지금 그냥 해보자.” 망설이지 말고 일단 행동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 의견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행동으로 옮겼고, “Just do it”이라는 문구를 회사의 슬로건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티셔츠에 새기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나이키는 기존의 운동화 회사들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회사들이 운동화가 필요한 사람에게 운동화를 팔았다면, 나이키는 사람들이 운동화를 필요하게 만들겠다는 목표로 회사를 운영했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필요로 하게 되는’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복음의 역사의 시작이 내가 되고, 우리가 되고, 우리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Just do it. 지금 바로, 일단 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기에 걸리면 몸이 스스로 자가치유를 시작하는데, 감기 바이러스를 이겨내기 위해 체온을 올리는데 이 과정에서 오한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낮은 온도 자체가 감기의 원인은 아니라고 합니다. 감기 이후에 오는 몸이 떨리고 추운 증상은 감기의 결과가 아니라 자가치유의 과정인 것입니다.
‘행복한 동행, 70일’에 참여할 때, ‘내가 전도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작년에 해봤으니 올해는 어려울 거야’ 하는 생각으로 복음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비록 작년에 잘되지 않았더라도, 전도에 좌절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도의 과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올해는 다시 한 번 도전해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들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전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다 이 원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들, 그 상황들이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나의 노력으로 얻게 될 결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일들의 과정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행동한다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나이키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운동화를 만들자’는 결심에서 시작된 것처럼, 복음을 접하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받아드려 스스로 교회의 나오는 역사가 나로부터, 우리로부터, 우리교회로부터 시작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새찬송가 516장_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