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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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돌보시는 하나님

본문: 사도행전 15장 12-21절

찬송: 405장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말씀의 문을 열며>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돌봄이 필요하고, 환자는 의사와 간호사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자녀나 간병인의 돌봄이 필요하고, 농부들은 자신이 심은 작물을 정성껏 돌봐야 합니다. 돌봄이란 단순히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필요를 채워주고 보살피는 행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돌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돌보심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예루살렘 공의회 이야기입니다. 당시 교회는 중대한 질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위해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발언하고,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 가운데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최종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찾아오셔서 돌보시는 하나님>

특별히 오늘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사도행전 15장 14절 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여기서 야고보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해 중요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돌보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돌보셨다'는 헬라어 '에피스켑토마이(ἐπεσκέψατο)'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나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보살피고 위로하는 적극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마치 의사가 병상을 방문하여 환자를 살피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 속으로 직접 들어오셔서 우리를 돌보십니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에도 사용됩니다. 이 과부는 유일한 아들, 자신의 유일한 의지이자 희망이던 아들을 잃고 장례를 치르러 가고 있었습니다.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안다는 속담이 있듯이, 당시 그 과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죽은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16절 에 보면 사람들이 놀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찬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바로 그 '에피스켑토마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부의 애타는 마음을 아시고 직접 찾아오셔서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배경이 된 중요한 사건, 고넬료 이야기를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하여 온 집안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행 10:2). 그럼에도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고넬료는 여전히 '이방인'이었고, 유대 율법에 따르면 유대인들과 온전한 교제를 나눌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회적, 종교적 경계를 뛰어넘어 고넬료를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환상 중에 고넬료에게 나타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말합니다(행 10:4). 이것은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삶을 세심하게 지켜보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보내셔서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기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편견을 깨뜨리셨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습니다(행 10:44).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부어지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차별 없이 돌보신다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야고보가 본문에서 언급한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종, 문화,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찾아오셔서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고넬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혹시 하나님의 돌보심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요? 혹은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기에는 내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요? 고넬료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경계를 넘어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직접 찾아오셔서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건강과 일상,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여러분의 기쁨과 슬픔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느끼지 못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모성적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돌보심은 구약에서도 '에피스켑토마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파카드(פָּקַד)'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 단어도 적극적으로 찾아와 돌보는 행위를 의미하지만, 단순한 방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파카드는 깊은 관심과 보살핌, 그리고 상대의 필요를 완전히 채워주는 돌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녀의 모든 필요를 세심하게 살피고 채워주는 것과 같은 모성적 사랑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모성적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며 끝까지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모성애는 자녀가 실수하고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그 자녀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주는 인내의 사랑입니다. 우리 속담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 특히 어머니의 사랑은 자녀의 잘못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지속되는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파카드'가 사용된 대표적인 예는 사무엘상 2장 21 입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라는 구절에서 ‘돌보신지라'가 바로 '파카드'입니다. 한나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한나는 자녀가 없어 깊은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자녀가 없다는 것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 수치와 버림받음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녀의 남편에게는 다른 아내 브닌나가 있었고, 브닌나는 자녀가 있어 한나를 업신여기고 괴롭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는 실로 성전에서 마음이 괴로워 여호와께 기도하며 통곡했고, 아들을 주시면 평생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 사무엘을 주셨고, 한나는 약속대로 어린 사무엘을 성전에 데려가 여호와를 섬기게 했습니다. 그 후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신지라(파카드) 그로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성적 돌보심의 특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라는 여인의 슬픔과 괴로움을 아셨고,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킨 한나에게 더 많은 자녀를 주심으로 그녀를 '돌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밥 짓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쌀을 씻고 물을 맞춰 밥솥에 넣고 불을 켭니다. 물이 끓고 쌀이 익기 시작하다가 뜸을 들이는 시간이 옵니다. 특히 배고플 때는 이 뜸 들이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집니다. 참지 못하고 미리 뚜껑을 열어보면 어떻게 될까요? 밥이 설익게 됩니다. 완성된 밥을 맛보기 위해서는 뜸 들이는 시간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모성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적절한 때에 개입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때보다 늦게 응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기를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과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5:16–18 NKRV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 계획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 동안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사랑으로 그 계획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리며 돌보시는 분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한없는 인내와 사랑으로 돌보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모성적 사랑으로 돌보고 계십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이제 말씀을 맺겟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적극적으로 찾아오셔서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모성적 사랑으로 오래 참으며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 계십니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때로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돌보심이 함께합니다. 우리의 건강, 가정, 일터, 그리고 영적인 삶까지 하나님은 세심하게 돌보고 계십니다. 그 돌보심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갑시다.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고, 그 돌보심에 기대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를 만나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돌보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단순히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 속으로 직접 들어오셔서 우리를 보살피시는 능동적인 사랑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때로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오래 참음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끝까지 품어주듯, 하나님도 우리를 끝까지 품어주시는 모성적 사랑으로 돌보고 계심을 기억하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각자의 삶에서 어려운 시간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와 돌보심이 임하게 하소서. 농사일로 수고하시는 분들, 건강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 가정의 문제로 마음이 무거우신 분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따뜻한 돌보심이 전해지게 하소서.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할 뿐 아니라, 그 돌보심을 세상에 전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우리도 하나님처럼 적극적으로 이웃을 찾아가 돌보고, 오래 참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를 찾아오시고 돌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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