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02. 금요리더모임. 리더의 품격 ② –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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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디모데전서 4:12 NKRV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요한복음 13:34–35 NKRV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3 NKRV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서론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지난 주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리더의 품격이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리더로서 먼저 집중해야 할 성품들에 대해 연속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번째 시간으로 “사랑”이라는 성품에 대해서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간단한 퀴즈 세 가지를 가지고 시작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임진왜란은 몇 년에 일어났을까요? 당시 조선의 공식 년호는 무엇이었을까요?
두 번째 질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 전술로 왜군을 대파하며 수군의 사기를 끌어올린 해전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세 번째 질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호’는 무엇이며, 그 호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불가능해 보이는 전쟁에서 기적처럼 승리를 일궈낸 영웅, 기상천외한 전략으로 조선을 구해낸 리더로 기억합니다. 그는 한산도 대첩에서 적의 배를 학익진 진형으로 포위해 완벽한 대승을 거두었고, 명량에서는 단 12척의 배로 10배 넘는 적선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조선 수군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전략가로서의 이순신, 결단력 있는 장군으로서의 이순신. 이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평가는 속된 말로 국뽕이 아닙니다. 영국의 해군사학자 스티븐 턴불(Stephen Turnbull)은 “이순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지휘관 중 한 명이며, 명량해전은 세계 해군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라고 평가했습니다. 미국 해군대학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전략과 리더십을 해군 전술 교육의 사례로 다루기도 합니다. 영국 BBC는 “넬슨 제독보다 더 위대한 지휘관”이라는 표현으로 이순신을 소개했고, 한 외국 군사학자는 “패배를 모르는 유일한 해군 제독”이라 평했습니다.
심지어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내부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 수군을 지휘했던 도도 다카토라는 명량해전 이후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장수 중에 이순신과 같은 이는 없으며, 하늘이 그를 도왔기에 우리가 패한 것이다.” 적의 입에서 나온 이 평가는, 단지 이순신의 무용이나 전략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압도적인 존재감과 인간적인 품격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 전장에서의 천재성을 주목하지만, 사실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을 향한 사랑’입니다. 저는 그것이 진정한 승리의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은 단지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도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외웠고, 누가 부상당했는지, 누가 그리운 가족을 남기고 죽었는지, 누가 밤새도록 배를 지키다가 탈진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그는 매일같이 부하 병사들의 건강을 걱정하고, 백성들의 굶주림과 고통을 마음에 품고 괴로워합니다. 단순히 전투의 승리를 좇았던 장수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품은 리더였던 거죠.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병사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누웠는데도, 나는 도울 힘이 없으니 애통할 뿐이다.”(1597년 9월 3일)
그의 병사들이 왜 목숨을 걸고 따랐을까요? 단지 실패와 죽음이 두려워서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아껴주고, 기억해주고, 끝까지 책임져줄 리더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의 리더십은 능력보다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불가능해 보이던 전투를 이기는 진정한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승리의 이면에는 사랑이 있었고, 사랑이야말로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리더십의 핵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즐겨쓰는 말로 하면 참 품격있는 리더였던 것이지요.
자, 오늘 주신 말씀으로 돌아가봅시다. 디모데전서 4장 12절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사랑에 본이 되어라.” 이 말씀은 우리 인생에 보탬이 될만한 좋은 덕목 하나를 권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리더만이 결국 공동체를 살리고, 품고, 세울 수 있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지요.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세상이 알리라.” 바울도 고백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말씀 앞에 서서 정직하게 돌아보고자 합니다. 나는 지금, 사랑으로 사람을 세우는 리더인가? 아니면 사역을 위해 사람을 소모시키는 리더인가? 사람을 기꺼이 함께 걷게 하는가? 아니면 억지로 끌고 가는가? 사람을 기억하고 품는가? 아니면 관리하고 처리하는가? 내 리더십에는 과연 예수님의 사랑이 흐르고 있는가? 오늘 우리의 리더십이 새로워지길 원합니다. 성공 이전에 사랑이 있고, 명령 이전에 눈물이 있고, 성과 이전에 품음이 있는 리더. 그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리더들로 변화되길 원합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사랑에 있어서 본이 되는 리더가 되기를 결단해 봅시다.

본론 1

먼저 요한복음을 살펴봅시다. 같이 한 번 읽어볼까요?
요한복음 13:34–35 NKRV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며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남기십니다. 주님은 자신이 곧 배신당하고, 체포되고,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게 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조차 당신 자신을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앞으로 어떤 공동체를 세워가야 할지,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하시며 말씀하십니다.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짧지만 무게 있는 이 말씀은, 죽음을 앞둔 주님께서 어떤 말을 마지막으로 남겨야 할지를 골라내고 또 골라내신, 그야말로 ‘마지막 사랑의 선언’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의 정체성이 무엇으로 증명되어야 하는지를 선언하는 기준이자, 예수의 제자됨의 표지로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명령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셨을까요? 혹시 구약에도 아주 비슷한 계명이 있다는 것, 기억나십니까? 레위기 19장 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은 이 계명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사랑의 기준을 바꾸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표현을 더하셔서, 이제는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인간적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사랑이 사랑의 기준이 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35절에서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세상이 교회를 알아보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세상에는 수많은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하고, 서로 돕고 연대하는 다양한 모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사랑으로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고, 이 사랑의 매력으로 세상을 설득해야 합니다. 즉, 사랑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이자, 우리가 가진 신분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는 다양한 시도들을 해 왔습니다. 더 세련된 프로그램, 감각적인 콘텐츠, 편안하고 감동적인 분위기, 설득력 있는 전달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려는 노력도 많이 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들은 때로 귀하고 유익한 열매를 맺기도 했습니다. 세상과 소통하려는 열정 자체는 분명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시도의 중심에 ‘사랑’이 놓여 있지 않으면, 교회는 어느 순간 세상의 수많은 공동체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특별한 이유는, 그 중심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교회를 매력 있게 만들고, 신뢰받는 공동체로 세웁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랑을 잃는 순간, 아무리 그럴듯한 것을 갖추었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정체성을 증명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굳게 세워가야 하며, 이 사랑의 매력으로 세상 앞에 설득력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리더는 이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짓는 사람이기 때문에, 리더의 사랑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세우는 통로가 됩니다. 리더가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방향을 잃고, 리더가 먼저 사랑하면 공동체는 정체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 농구팀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한 학생이 늘 벤치에만 앉아 있었습니다. 발달장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경기에 뛰는 일은 없었지만 이 학생은 팀의 매니저로 묵묵히 팀을 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의 감독이 시즌 마지막 경기에 그 학생을 출전시키기로 결심합니다. 경기 당일, 관중석에는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소리가 가득했고, 팀원들도 그가 골을 넣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패스를 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슛을 성공시켰습니다. 경기장은 터질 듯한 환호로 가득 찼고, 상대 팀까지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경기를 이기기 위해 뭉친 게 아닙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함께하기 위해 모인 겁니다.”
이 이야기는, 사랑이 공동체를 얼마나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리더 한 사람의 결단이, 누군가의 삶을 얼마나 빛나게 할 수 있는지를 증언합니다. 물론 승리는 참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보다 좋지는 않습니다. 승리하는 순간 우리는 잠시 큰 기쁨을 맛보지만, 사랑이 깃든 순간은 더 깊고 오랜 감동을 남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이기는 것보다 더 큰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그런 승리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패배 같았고, 침묵 같았고, 무기력한 죽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깊은, 창조주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사흘 후 죽음을 이기고 다시 일어나 모든 시대, 모든 영혼을 위한 가장 위대한 승리를 완성했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긴 자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리더라면, 이 사랑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리더들이 역할은 감당하지만 사랑의 수고는 외면하려 합니다. 그래서 사역을 완수하고 목표는 이루지만, 정작 사람은 남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능력으로 성과를 남길 수는 있겠지만 사람은 아닙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남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하고 명령하셨습니다. 리더가 먼저 사랑하면, 공동체도 그 사랑 안에서 자라나고, 그 사랑이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본론 2

고린도전서로 넘어갑시다. 함께 읽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 NKRV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장’이라고 불리며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본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분위기는 흔히 떠올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과는 많이 다릅니다. 13장이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절박한 경고에 이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당시 고린도교회는 활기가 넘쳤습니다. 다양한 은사가 활발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방언이 터져나오고, 예언이 주어지고,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 쏟아졌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신앙적 열정이 교회 안을 가득 채우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사랑 없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은사를 자랑했고, 누가 더 영적으로 탁월한지를 두고 경쟁했습니다. 방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영적이라고 여겨졌고, 신비한 지식을 지녔다 하면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능력이 기준이 되고, 은사가 우열을 나누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공동체는 점점 서열화되었고, 많은 이들 소외되고 비교당하며 상처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리더를 중심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나는 바울파다”, 또 어떤 이는 “나는 아볼로파다”, 다른 이는 “나는 베드로파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나는 그리스도파다”라고 말하며,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파다’라는 이 말, 겉보기에는 가장 신앙적인 고백 같지만, 실제로는 “나는 늘 편을 갈라 다투는 너희와는 달라”하며 자기 의를 드러내는 언어였습니다. 바울은 이조차 하나의 파벌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말마저도, 사랑 없이 말하면 분열을 낳는 도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린도교회는 네 개의 파벌로 나뉘었고, 신앙이 사람 중심, 우월감 중심으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분명 겉모습으로는 교회였지만, 실상은 점점 교회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끔찍한 결과는 예배와 성만찬에서 드러났습니다. 예배는 형식만 남았고, 성만찬의 자리는 사랑이 아닌 갈등과 불평등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부유한 자들은 먼저 와서 배불리 먹고 취했지만, 가난한 자들은 나중에 와서 굶주린 채 남겨졌습니다. 성만찬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며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사랑이 공동체 전체에 흘러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사라지자, 그 거룩한 은혜의 자리조차 차별과 분열이 시작되는 자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사랑을 잃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교회라 하기 어렵습니다. 본질을 잃은 채 껍데기만 남아 병들어가는 공동체일 뿐입니다.
그런 고린도교회를 향해 바울이 외쳤습니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아무리 신비한 지식이 넘쳐도, 아무리 믿음이 대단해도, 아무리 열심히 헌신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말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깊은 본질이 무너지고 있다고 울부짖는 바울의 절규였습니다.
이 말이 당시 평신도들을 향한 외침이 아니었음을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은사를 받았고, 영향력이 있었으며, 공동체에서 리더로 섬기던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만약 바울이 지금 현대 교회의 실상을 듣게 된다면 이렇게 외쳤을 것 같습니다. “너희가 찬양을 멋지게 인도하고, 영상과 디자인을 감각 있게 만들고, 셀 모임을 잘 진행하고, 행사를 기가 막히게 준비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 아닐까요?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아까도 말했듯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도, 열정도, 은사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어도 당장 뭔가를 이룰 수는 있지만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사람을 남기지는 못합니다. 그럴듯한 모양은 만들 수 있지만, 중심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결국 사랑이 없으면 사람들은 떠나고, 공동체는 지칩니다.
바울은 사랑이 무엇인지 무려 열다섯 가지로 설명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말씀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사랑이 빠진 나의 리더십을 점검할 수 있는 세심한 지침들입니다. 과연 우리의 리더십에 사랑이 담겨 있을까요?
몇 해 전, 한 소형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예배도 훌륭했고, 프로그램도 알찼고, 열정적으로 섬기는 리더들도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피로감이 교회 안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역도 점차 늘어나고, 퀄리티도 계속 높아지고, 꾸준히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데 뭔가 중요한게 빠진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성도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남은 이들도 지친 얼굴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성도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일을 잘하는데, 서로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 말이 공동체를 울렸습니다. 그제서야 리더들이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이 빠진 자신들의 리더십을 말입니다.
의외로 교회 안에 사랑 없는 리더십이 적지 않습니다. 열정은 있지만 자기 확신에 갇혀 있는 리더, 사람보다 사역을 우선하는 리더, 말은 훌륭하지만 공감이 사라진 리더, 감정 없이 조직을 운영하듯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 때로는 그런 리더십이 성공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지치고, 공동체는 메마르며, 결국 무너집니다.
사람들은 결국, 그 리더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보다 나를 얼마나 사랑해주었는지를 기억합니다. 생각해보세요. 공과 공부를 기가 막히게 이끌었던 선생님보다 떡볶이 많이 사줬던 선생님이 더 기억나는 법입니다. 농담같지만 분명한 진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리더십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조용한 독이 됩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두 본문을 통해 리더십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언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본질이며, 옵션이 아니라 기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너무 쉽게 일 잘하는 사람, 열정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을 리더라 부릅니다. 성경은 결코 그게 전부라고 말하 않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이것이라 말합니다. “사랑”이요.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말이 훌륭해도, 아무리 성과가 뚜렷해도, 아무리 오래 섬겼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한 것입니다.
흔히들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감정은 때때로 솟구치고, 또 사라지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고, 때로는 이유 없이 식어버리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태도입니다. 상대를 향해 마음을 열고, 기꺼이 나를 낮추고, 상대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기로 결단하고 꾸준히 의지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은 늘 감정이 충만할 때에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감정이 따라올 수도 있지만, 따라오지 않을 때에도 사랑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기다려주고, 져주고, 손해 보고, 남는 것 없어도 계속해서 품어내는 것. 그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었고, 우리가 따라야 할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 하나만 더 강조하려고 합니다. 리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스러워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의지를 가지고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사랑스럽게 만드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신비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내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사랑해야 할 자로서 이 진리를 끝없이 곱씹어 보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우리는 먼저 사랑함으로써 맡기신 청년들을 사랑스러운 자로 세워가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실력보다, 더 깊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품은 리더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메마른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흐트러진 방향을 붙잡아주며, 지친 영혼 하나를 다시 일으킵니다. 우리는 그런 리더가 맞습니까?
공동체에서 리더로 살아온지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처음에도 물론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랑은 참 어렵습니다. 우리의 본성과 죄성이 언제나 나를 중심에 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자주 손해처럼 느껴지고, 용서는 때로 죽기보다 싫게 다가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사랑을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때에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는 좀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으시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 당신의 품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을 다시 가득 부어주셔서, 우리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 더욱 깊이 깨닫게 해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다시 사랑 받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다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남긴 고백이며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19) 사랑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먼저 우리를 향해 쏟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만 일어납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시 사랑을 경험합시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이 사랑 안에서, 우리의 부족함과 냉담함, 상처와 무너짐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다시 일어납시다. 그래서 사랑에 있어서 본이 되는 리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으로 리더의 자리를 감당하는 품격있는 리더가 됩시다.

기도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전심으로 주를 찾을 때 이 자리에서 회복이 시작될 줄 믿습니다.
“사랑이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싶습니다. 주님, 제 마음에 다시 사랑을 부어주셔서 제 안에서 참 사랑이 다시 시작되게 하시고, 사랑에 있어서 본이 되는 리더로 다시 세워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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