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장 1-8절 “믿음은 굴복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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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굴복하지 않는 것(눅 18:1~8)
20250406 설교: 신동구 목사(주님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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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저녁 10시 30분을 기억하십니까?
前 윤석열 대통령이 야당의 독주를 막겠다고 계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그의 행위는 짧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무식한 통치였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보더라도 정치는 정치로 풀어야 하는데 자신이 절대권력을 가진 왕으로 생각하였는지 야당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일방적 통치행위를 펼치다가 한계에 이르자, 자신의 성질을 못 이겨 계엄령을 선포하여 야당 인사들과 야당 성향의 재판관 등을 붙잡아 처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22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온 국민이 영상매체를 통해 보았듯이 윤석열 씨가 대통령으로서 자유민주주의국가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헌법재판소가 판결을 주문하였습니다. 그것은 ‘파면’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계엄령은 대통령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파면감이었지만 여당과 일부 극우파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기각을 운동을 벌였습니다. 창피하지요?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를 보여주는 끝판왕입니다. 진실을 가리려는 그들의 무데뽀 행위에 그 누구도 제재하지 못할 때에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으로 응징하였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광장에 나아가 계엄령 선포 이전부터 2년 3개월 동안 그와 그의 부인에 의한 어이없는 통치행위를 보면서 끊임없이, 끈질기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는 부당한 요구가 아니라 합리적인 요구였습니다. 법을 가지고 기소하던 검사의 우두머리인 검찰총장 출신이 얼마나 법을 무시하고 무데뽀를 행동하는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해법이 보이지 않았지만 시민들은 끊임없이 공의로운 심판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 땅에 공의를 시행하고자 윤석열 씨의 눈을 가리고 판단력을 어둡게 하여 그의 고집을 이용하여 말도 안 되는 계엄령을 선포하게 하고, 자멸하게 하셨습니다.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은 전 세계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절망하고 있을 때에 대한민국에는 민주주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준 시간입니다.
이에 우리는 희망이 없는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올바른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희망이 찾아온다는 믿음에 관한 교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I.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하나님
대부분 말(言)의 결론은 마지막에 나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도 대부분 결론에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이 진리를 쉬운 비유로 풀어낼 때에도 결론은 마지막에 다룹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만큼은 다릅니다. 처음부터 결론을 내리고 그 다음으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의 비유는 인상적입니다. 우리의 뇌리에 쉽게 자리를 잡습니다.
그 결론이 무엇입니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강렬한 결론을 접하면서도 ‘항상 기도하지 않고 낙심을 자주한다’라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어이없음/어처구니없음’, ‘어이 상실/어처구니 상실’이라고 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고, 쉽게 잊지 않도록 종종 진리를 비유를 들어 풀어내십니다. 비유는 진리를 일상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비추어 설명하는 문학적 기법입니다.
세상 어디에나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힘 있는 재판관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도 3대 가난한 자로 ‘고아, 과부,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구제대상자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궤해야 할 ‘레위인’이 공궤를 받지 못해 가끔 구제대상자로 분류됩니다.
오늘 비유에 과부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시골 민심보다 박한 도시에 사는 과부입니다. 과부는 두 종류입니다. 참 과부와 일반 과부입니다. 참 과부는 경제력을 가진 남편을 잃은 여인이요. 심지어 자녀들로부터도 보호를 받지 못한 자입니다. 일반 과부는 남편이 없지만 자녀들에 의해 공궤를 받는 여인입니다. 교회는 참 과부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등장합니다. 이런 사람이 시대마다 한두 명씩 존재합니다. 그가 머리가 영리하여 재판관이 되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억울한 사람의 형편을 헤아려 그의 편이 되어주라고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번에 대통령 탄핵 심판을 맡은 헌법재판소 소장 문형배 재판관을 아십니까? 그는 경남 하동군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2학년부터 독지가 김장하 선생님의 후원을 받아 서울대 법대를 나와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김장하 선생님에게 감사함을 전하고자 할 때에 김 선생님이 그에게 “내게 갚을 필요가 없고 이 사회에 갚으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덕망 있는 재판관이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 18장처럼 배은망덕한 재판관이 있습니다. 어찌 그가 혼자의 힘으로 재판관의 자리에 앉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고 사람이 그를 지지하여 그 자리에 추대한 이유는 공명정대한 재판관이 되어 이 사회의 등불을 밝히는 자가 되어달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관은 명성이 좋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성체가 된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라는 속담처럼 안하무인(眼下無人), 안하무신(眼下無信)의 삶을 살았습니다. 만일 그에게 어떤 사건이 올라가면 공의로운 재판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판결하였을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돈이 없어서 그녀의 판결은 당연히 무전유죄로 판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돈을 갖다 줄 수 없었습니다. 만일 가난한 과부에게 돈이 있었다면 불의한 재판관은 자신의 집을 찾아와 계속 괴롭혀도 모른 체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돈을 더 가져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었을 것입니다.
진실로 그 과부는 돈이 없습니다. 그녀는 오로지 재판관의 임무가 공명정대한 판결로 억울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 있다는 단순한 믿음으로 자주 불의한 재판관의 집을 찾아가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법정으로 출근할 때마다 과부의 울부짖음을 듣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언짢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눈이 있어 과부를 어떻게 내동댕이칠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과부를 내동댕이치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았다면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고 그냥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괴로웠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주 가난한 과부가 그의 집 앞에서 울부짖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편해지려고 과부의 원한을 들어줍니다.
이 비유는 유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판 풍경이어서 씁쓸한 마음입니다. 동일하게 대한민국도 불의한 검사들이 득세하는 곳이어서 민초들이 촛불을 들지 않으면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지만 힘없고 가난한 자는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II.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
우리 주님은 슬픈 비유를 통해 하나의 진리를 교훈하십니다. 7절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우리 주님이 바라보는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고 패역하고 믿음이 없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오신 우리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백성을 찾으시고 당신의 보혈로 그들을 씻어 정결케 하신 후 다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요 17:18). 그리고 그의 백성에게 불의와 맞서 싸울 때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기라고 명하십니다. 그 싸움은 그의 백성이 부름 받은 곳에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의(公義)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백성은 평소에도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날 때에는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기도해야 합니까? 밤낮 부르짖는 것입니다. 마치 가난한 과부가 안하무인(眼下無人) 안하무신(眼下無神)의 재판관에게 자주 가서 밤낮 부르짖듯이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낙심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의 생각처럼 빠르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어이없는 前 대통령의 계엄령으로 인해 2024년 12월 14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한 이후 111일 만에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특히, 헌법재판소가 심리가 모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40일이 지나도록 최종판결이 지연되자 우리 사회에 별의별 찌라시가 난무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하고, 일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헌법재판관 8인 전원 일치로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에 대통령의 파면이 주문되었습니다.
사실 저도 여러분처럼 마음에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편안했던 것은 누가 보더라도 상식적으로, 불법적인 계엄령이기에 대통령직을 파면하는 것이 당연하였기 때문입니다.
‘속히’ 응답이 되어야 하지만, 돌이켜 보면 늦었다고 생각되는 때가 가장 알맞은 때입니다. 헌법재판관들은 계엄을 주도하고 지지하는 세력들이 법을 잘 알고 법을 악용하는 이들이기에 변호인이 반론을 재기하지 못하도록 조목조목 판결문을 작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상달되지 않은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소리의 파장이 우주에 미치듯이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하늘의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십시오. 4생물(케루빔/그룹천사)과 24장로가 금대접에 성도의 기도의 향을 담아 어린양 앞에 엎드립니다(계 5:8). 금향로의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갑니다(계 8:3, 4).
그 향로에 향이 가득할 때에(계 5:8; 8:3~4), 또는 성도의 눈물의 기도가 주님의 병(甁)에 가득 채워질 때(시 56:8)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자주 말씀드렸듯이 기도의 응답은 4가지로 나타납니다. ① 즉답(卽答) ② 체답(滯答) ③ 변답(變答) ④무답(無答)입니다. 그 응답은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에 시의적절한 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소 우리에게 더디거나 원하지 않는 답으로 나타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고려하여 적절한 때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비유 속에 “속히 그들의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8절 상반절)에서 원한을 풀어준다는 것을 한자어로 ‘신원(伸冤)’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6:9~10은 일곱개 인(印)으로 봉인된 두루마리의 다섯 번째 인을 뗄 때에 이루어지는 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동일하게 개역한글성경도 이를 ‘신원(伸冤)’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20장까지 최후의 심판을 다루는데, 요한계시록 18:20은 순교자들의 신원이 다 해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하늘과 성도들아,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개역한글성경은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伸冤)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고 번역합니다.
흥미롭게도 『새번역성경』은 누가복음 18장 8절 상반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다.” 『쉬운 성경』은 “하나님께서 속히 공의를 시행하신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는 가난한 과부의 불의한 재판관을 향한 강력한 청원은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찾는 행위임을 알려줍니다.
지난날 탄핵 심판의 현장에 판면 기각을 요구하던 소위 보수세력들은 보수(報酬)를 받고 현장에 나가지만. 탄핵 심판의 현장에 나아가 파면을 촉구하던 이들은 무보수로 광장에 나아갔던 이유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재임 동안 헌법의 정신을 훼손하는 계엄령으로 야당 인사를 종북세력으로 몰고 특정 재판관들을 체포하려는 행위는 진실로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지만, 억울한 일을 당할 때는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것입니다. 특히, 불의한 것에 굴복하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촉구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최종계시를 다루는 요한계시록은 신앙의 박해를 받은 이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신원의 기도를 지속적으로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날에 응답해달라며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선한 일을 행하다가 억울한 일을 만나거든 하나님께 나아가 항상 기도하시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기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촉구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III. 인자가 올 때에 그러한 믿음을 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우리 주님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촉구하는 이들의 믿음의 기도를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파면되기까지 우리 정의로운 국민들은 111일간 집회를 가졌습니다. 어떤 한 청년은 당분간 계속 집회에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파면은 시작이며 그들의 불법에 대한 강력한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희망봉을 들고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신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에게는 그만한 신념, 그만한 믿음이 있느냐고요? 무슨 말입니까?
많은 이들이 환난과 핍박으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배교(背敎)의 길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 인자(人子)가 올 때 하늘 구름을 타고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사(살전 4:16) 세상의 악귀와 악귀를 좇는 자들을 심판하려고 오실 때에 많은 이들이 배교(背敎)의 길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흥미롭게도 누가복음은 4종류의 마음 밭을 설명하실 때에 생명의 씨앗을 좋은 밭에 뿌려서 결실하는 자의 모습을 소개할 때에 ‘인내’을 강조합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그리고 누가복음 21:19은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주님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18:1도 우리의 기도 생활에 ‘인내’를 촉구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4가지 주제 중 하나인 요한계시록 14:12도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최후의 승자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불의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는 믿음의 기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리려는 여러가지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라는 속담처럼 자식들로 인해, 남편으로 인해 또는 아내로 인해 사고가 자주 또는 가끔씩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주님의 비유를 따라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으렵니까?”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속을 다 이루시고 부활 및 승천하신 ‘그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가 다시 오실 때까지 ‘시련과 재물과 향락의 유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눅 8:13~14) ‘인내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시렵니까?
특히, 누가복음 18:1~8이 가르쳐주는 “믿음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곧 공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며 인내함과 감사함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응답될 것이며, 그 응답의 시간을 결코 늦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시되,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간구하십시오! 승리는 믿음을 가지고 굴복하지 않는 자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