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6 새벽 (시119:8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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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의 무게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살아가는 삶의 무게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체중계에 올라가서 눈에 보이는 숫자뿐만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주어진 책임과 역할의 무게가 있다는 것이죠. 더 나아가 저와 성도님들의 삶에 어우러져 있는 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기 때문에 함께 짊어지고 가야할 공동체적 책임과 역할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개인과 공동체적 삶의 무게가 있음을 느끼는 것이죠.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들이 마주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이 삶의 무게가 늘어 간다면 우리는 번아웃이라고도 하는 과부화에 걸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 과부화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들의 삶에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찾아오고, 어려움이 가중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죠.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만약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것마저 어려운 상황을 마주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정말 한숨만 나오고,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에서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119편의 81절은 히브리원어적인 의미에서 ‘지쳤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시작합니다. 무엇으로 인하여 지친 것일까요?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굉장히 의미 심장한 표현이죠. 다른 일들을 해서 피곤하고, 지쳤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것에 있어서 지쳤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시편 저자가 이 고백에서 맴돌며 지칩니다. 힘듭니다. 할 수 없습니다. 포기했습니다. 라는 고백을 이어 갔다면 읽는 독자들마저도 먹먹한 마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곧 이어 무어라 고백하였습니까?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먼저 오늘 119편의 81절을 기록하는 시인은 무엇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며 기다리다가 지쳤다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이 시간 저와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오늘 말씀을 기록한 시인은 글머리부터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연기 속의 가죽 부대

우리들은 영혼 구원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 가운데 무엇으로 인하여 지치고, 피곤한 지경에 이르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본문 84-85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인은 자신의 연수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로 인한 어려움의 시절을 보내고 있으며 주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교만한 자들이 자신을 해하기 위하여 웅덩이를 판 것과 같은 상황을 기록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가득 모아서 주님을 향하여 탄원 하듯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83절에서는 자신을 연기 속의 가죽부대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이 무슨 의미인가 찾아보니 새번역 성경에서는 연기에 그을린 가죽 부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불을 태울 때 올라오는 열과 연기에 그을린 가죽부대와 같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당시에 가죽부대는 열에 취약하여 열기에 닿은 가죽부대는 오그라들고, 흉한 모습이 되며 가죽부대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두어도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는 시인의 심정이 마치 이와 같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가죽부대와 같은 상태에 자신을 빗대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시인의 고백은 오늘 그의 글을 묵상하고, 상고하는 이들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죠. 바로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알 수 없는 어려움과 핍박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와 같은 우리들의 처지를 그대로 두지 않고, 다가오는 현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 주님을 향하여 우리의 시선과 마음과 삶의 방향을 돌이키도록 안내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나에게 남은 연수를 셀만큼 고통스럽고, 이유를 알 수 없이 나를 핍박하는 자들과 주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로 인하여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어서 연기 속의 가죽부대와 같은 시절을 보내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다시 한 번 86절의 고백처럼 신실하신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의지하며 살아갈 때, 주님의 일하심으로 모든 핍박에서 회복과 자유를 얻게되는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길 바라는데요.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시인이 가졌던 마음과 같이 우리도 주님께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87-88절 말씀에서 시인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솔직한 마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갑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다시금 살아날 힘을 주시길 구하는 것이죠.
탄식함으로 시작하였던 그의 고백을 통해서 느껴지는 모습은 마치 땅으로 고개를 숙이고, 무기력한 처지에 놓여 한 숨만 쉬던 한 사람의 모습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주님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다시 한 번 주님을 향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회복되기를 바라는 고백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쓰러지고, 넘어지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일어날 새 힘을 얻게 될줄 믿으시는 저와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3. 법이 즐거움 - 고난중 멸망

이어서 시인은 89절 이후부터 주님의 말씀이 흔들리지 않고, 영원토록 하늘에 굳건하게 세워질 것을 고백하며 주님의 성실하심을 찬양하고,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시인은 우리들의 신앙이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는 그 곳에서 어떠한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야 하는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고백하며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천지가 하나님의 규례들대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것이죠. 그와 같은 믿음과 고백을 드린 이후 시인은 92절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정하며 나아갑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과 나의 나됨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밟고, 서서 살아가는 땅을 보시길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는 땅을 보며 하나님의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주님의 통치가 우리를 받쳐주고 계시는 것이죠. 우리가 숨을 쉬며 마시고, 뱉는 호흡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 분의 손길과 운행하심을 통하여 만물의 질서를 운행하시며 우리를 살아 숨쉬게 하시고 계시죠. 참으로 당연한 말 같지만 이 모든 만물의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자리로 돌아갈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과 나의 나됨을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에서 실족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막함을 경험하게 될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나의 생각과 의지를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찬양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 92-93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며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92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93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시인은 주님의 율법과 규례와 주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경험했던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경험했던 것이 결국은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었고, 살아갈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경험하지 못하고, 주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였다면 자신에게 찾아왔던 고난과 어려움으로 인하여 주저앉고, 무너졌을 것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오늘도 주님의 법을 구하고, 주님을 예배하며 주님의 역사하심을 바라고 나아가는 자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만찬의 자리와도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한계가 있는 사람들의 힘과 의지만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하나님의 법과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기에 살아계신 주님의 법과 규례가 우리들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즐거움을 경험하셔서 고난 중에 멸망할 것 같은 시절에 놓인다 할지라도 다시금 주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시길 소망합니다.

4. 주의 증거들만

앞서서 90-91절까지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을 고백하며 하나님과 나의 입장을 구분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고백했던 것이죠. 그리고 94절에 이르러서는 내가 단순히 하나님 앞에 지극히 작은 자와 같았으나 이제는 내가 주님의 소유가 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시인은 주님의 법도들만을 찾았던 것을 고백합니다. 악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주의 백성을 향하여 멸망시키려 하는 틈을 보고 있지만 시인은 더 이상 그것에 맞서거나 그것에 억눌리거나 흔들리지 않을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오히려 더욱 살아계신 주님의 증거들만을 묵상할 것을 고백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시인은 우리들에게 한 가지 신앙의 지혜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에는 항상 많은 도전과 환난과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맞서지 않고, 나의 연약함을 그대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주님의 때와 방법으로 저와 여러분의 삶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신앙의 지혜를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믿음으로 취하시며 나아갈 때, 오늘도 우리는 살아가는 시간과 상황마다 신앙의 도전과 시험을 마주하게 될 것이지만 그 때에 우리는 더욱 주님께서 내 삶에 역사하시고 계시며 살아계신 주님의 증거들만을 바라보고, 구하며 살아갈 때, 넉넉히 그 모든 상황을 이기고 일어설 힘과 능력과 지혜를 더 해 주실 것입니다.

5. 완전한 것도 끝이 있으나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보고, 느낀 완전함에 대하여 그 모든 것들이 다 결국 끝을 맞이할 것이라 고백합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고백하고,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제는 포로의 시기를 지나 회복을 맞이하게 될 것을 예언하게 될 때,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예언하도록 주님께서 가르치셨던 것처럼 제 아무리 완전하고, 훌륭하게 이루어진 것도 결국 끝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들은 심히 넓고, 끝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마치 광활한 바다와 같아서 끝 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같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의 심연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저와 우리 성도님들을 향한 주님의 광활한 은혜가 우리의 심령에 밀려 오게 될 때, 모든 문제와 상황들을 초월하시며 오늘도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허락해 주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깊이 나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시편 119편 81-96절의 말씀을 정리하면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삶이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삶과 같음을 보게 됩니다. 언제나 행복하고, 감사하며, 기쁨이 충만한 시절을 보내면 좋겠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맡겨진 삶의 자리에서도 평안하길 바라지만 때로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오해와 시기와 다툼과 사건과 사고가 우리들의 삶에 찾아오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살아나는 회복, 주님의 말씀과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는 행복, 세상이 나를 멸하려고 하여도 오직 주님의 살아계심을 바라보는 시선, 가장 좋아보이고, 부러워 보이는 완전한 것들도 결국 끝이 있지만 우리 주님의 말씀과 은혜는 측량할 수 없이 높고, 깊고, 넓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며 우리를 소유로 삼아주신 주님과 더욱 깊이 교제하며 살아가실 때, 삶의 자리 구석구석마다 영생을 누리시는 저와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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