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소망의 힘과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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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함께 찬양으로 또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게 되어 참 감사합니다. 제가 찬양도 하고 설교도 하니까 좀 안쓰럽게 보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어떻게 들으실진 모르겠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저는 몇년간 이 예배 자체가 없는 곳에 있으면서 얼마나 이 예배 자리가 감사한 자리고 나를 살리는 자린지 뼈저리게 느껴봤기 때문에 너무 좋고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환경에서 즐겁게 예배할 수 있다는것은 사역자로써 최고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너무 걱정되시면 쪼꼬렛이나 과자 하나 주시면 굳이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하는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본문이죠.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실 때 혼자 달리신게 아니죠. 양 옆에 두 강도가 같이 달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래서 그중에 한 사람이 죽기 직전에 예수님께 구원을 받아서 천국을 간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조금 생뚱맞은 본문일 수 있겠다 싶어요. 약 3주 전에 이미 고난주간이 지났고, 보통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야기는 그때 많이 하잖아요? 그때 말고는 잘 다루지 않습니다. 저도 그래요. 이제 가정의 달이고 좀 있으면 여름성경학교 하고, 선교 하고 가을되면 또 추수감사하고 그거 지나면 성탄절이잖아요. 이쪽 본문을 1년이면 많이 시선이 안가게 되는 본문인데, 저는 사실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의 핵심이 구원이라면 그 구원의 모습을 적나라 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라는 것이죠.
먼저 이 이야기는 네 개의 복음서에서 모두 등장합니다. 이게 참 의미가 있는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을 가상칠언 이라고 하잖아요? 그것도 네 복음서에 흩어져서 나옵니다. 또 각종 기적이나 설교, 비유등도 동시에 등장한게 그렇게 많지 않아요. 당연히 십자가 사건, 오병이어 기적, 최후의 만찬 같이 굵직굵직한 이야기들은 모두 실려있지만, 예를 들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던 구레네 시몬 이야기도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지만 요한복음에는 실려있지 않습니다. 그니까 이 두 강도 이야기도 어쩌면 이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굳이 두 강도가 같이 옆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뭐가 있었을까 싶은데 굳이 마태마가누가요한 모두 이 이야기를 이 중요한 십자가 사건을 기록 할 때 모두 빼먹지 않고 같이 기록을 했다는 것은, 이 두 강도이야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사건에서 빠질 수 없는, 빠지면 안되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죠.
먼저 말씀을 좀 깊게 다시 보면 제가 본문을 네 복음서 중 누가복음으로 선택한 이유는 가장 자세하게 이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다른데는 한줄정도 실려있다면 누가복음에는 그들의 자세한 대화까지 실려있으면서 같이 욕하던 두 강도 중에 하나가 무슨 심경의 변화를 느꼈는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구원을 얻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할 때 혹시나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이거일 수 있겠다 싶어요. 부럽다. 우리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뭔가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이 좀 의무감이 들 때가 있어요. 좀 쉬고 싶을 때도 있고 고달프고 뭐랄까 막 즐겁다기보다 안하면 안될거 같아서. 내가 예수를 믿기는 믿으니까 안 할수는 없는데 뭔가 막 너무 열심히 하기는 또 부담스럽고 내 삶도 살아야 하는데, 근데 안하자니 혹시나 천국 못가면 어떡하나 싶어서 적당히 그 선을 타고있는 것만 같은 내 상태를 발견할 때가 있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목사님께 말을 해야 하나. 일이 느는데. 그래서 몇개만 말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어떤분과 교제를 할 때도 늘 그 선에 계세요. 세상과 교회 그 중간 쯤 어딘가. 안믿는건 아닌거 같은데 뭔가 확 신앙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처한 분들. 그분이 자주 하던 질문이 있습니다. 이 죄수처럼, 어짜피 하나님 믿고 구원 받는다면, 또 그게 하나님 뜻이고 예정되있는거라면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성화의 과정이 대체 왜 필요하냐는 거죠. 차라리 이 마지막에 구원받은 죄수처럼 좀 즐기고 하고싶은거 다 하고 살다가 심지어 십자가에 달릴만한 죄를 지었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받으면 되는거 아니냐. 그니까 이분의 질문은 그렇게 하겠다가 아니라 그렇게 열심히 해햐할 이유가 뭐냐는거에요. 그 차이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막사시는분이 절대 아니셨어요. 교회 봉사도 나름 열심히 하고 헌금도 많이 하시는 분입니다. 어려운분들을 진심으로 도우시는 분이셨어요. 근데 햇갈리는 거에요. 죽어라 신앙생활 하고 열심으로 전심으로 부르짖고 평생의 삶을 바쳐 믿는 자와 평생 죄짓고 살다가 죽기 직전에 딸깍 마치 스위치 끄듯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게 너무 부당하다는 것이죠.
마치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의 품꾼 이야기에서 먼저 온자나 나중된자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받으니까, 누가 원망합니까? 먼저온자가 원망하잖아요. 아니 나는 아침부터 일했는데 저 사람은 방금와서 나랑 같은 돈을 받는게 말이 됩니까. 충분이 따질만 합니다. 충분히 불공평 합니다. 다만 그 기준은 충분히 세상적 기준인 것이죠. 경제학적으로 자본주의 적으로는 합당치 못한 처사 아니겠습니까? 더 많이 일한 자가 더 많이 갖는게 너무 당연한 처사 아니겠냐는 거죠. 공의의 하나님이라시면서요. 거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어쩌면 불친절하게 느껴질 정도로 냉정합니다. 14절에 말하죠.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요즘말로 하면 내 맘이다. 내 뜻이다. 15절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여러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의 생각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을 한글자로 “죄”라고 말합니다. 선과 악을 내가 판단하는 것이죠.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당연히 이렇게 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세상의 법칙과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죠. 내가 갖고 있는 판단의 기준을 버리지 않은 채 그대로 신앙에 적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맞으면 막 은혜받아요. 악인을 지옥불에 던지시고 의인을 살리신다. 헌금했더니 삼십배 백배 얻었다 하면 막 좋아합니다. 슬픈자를 위로하시고 병을 치유하시고 긍휼하시다 하면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의인의 실패나, 까닭없이 당하는 고난이나 자연재해, 사고, 혹은 부당해 보이는 자들의 성공과 위세를 보고서는 말합니다. 하나님 왜 일하시지 않습니까. 때로는 내가 정말 신앙생활 열심히 한 거 같은데, 아니 내가 이런 고통 당할 정로도 못하지는 않은 거 같은데 왜 나에게만 이런일을 허락하시나. 혹은 왜 이정도 축복밖에 받지 못하는가. 더 받아야 할 거 같고 더 인정받아야 할 것 같은데.
제가 교제하며 마지막으로 들은 그분의 고백은 너무 안타깝게도, 이해 할 수 없다 였습니다. 어짜피 받는 돈이 한 데나리온이라면 뭐하러 열심히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누구는 구원을 주고 누구는 안주는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마치 잘한사람 사탕 주듯 혹은 주고싶은 사람 맘대로 줘버리는 분이 선하신지도 모르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안타까운것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신앙인, 혹은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팍으로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가 되어야 믿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이해시켜보라는 거죠. 그러면 내가 믿어 주는 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을 고려해보겠다. 는 것이죠. 더 안타까운것은 그렇게 이야기 해주는 교회나 신학자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과 복음은 이해를 함으로 믿는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거 공부하고 이해하고 납득이 되서 믿으면 성령을 얻고 구원을 얻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함으로 내 안에 나의 고집과 아집과 편견과 판단이 모두 무너지고 성령의 불로 소멸됨으로 그 안에서 이해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는자들이 다 이해력이 딸려서 머리가 나뻐서 세상적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모아놓은 이 성경책을 붙들고 바보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 안에 내가 죽고 예수가 산 자들인 거에요.
위대한 기독교변증가 CS루이스는 이런 [피고석의 하나님] 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대인은 피고인이 재판장에 가듯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현대인의 경우엔 그 역할이 뒤바뀌었습니다. 인간이 재판장이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계십니다. 인간은 상당히 이해심 많은 재판장입니다.”
피고석에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낱낱히 우리의 잘못이 까발려져야할 인간이, 재판장이 되어서 하나님을 판단하고 분석하고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가끔 제 기도를 제가 봐도 너무나 자주 내가 그의 철저한 도구가 되고 청지기로서 소모품이 되어야 하는데, 반대인거에요. 하나님을 나의 도구, 나의 청지기로 소모품으로 사용하려고 하고 있어요. 역사하소서. 해주소서. 일하소서. 일하지마소서. 그의 뜻을 구하기 전에 내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려 부단히 노력하는 제 모습을 매순간 발견합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중 하나의 모습이 그런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39절에 말하죠.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십자가는 당시 극형 중의 극형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자세히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정도 처벌을 받을 정도면 엄청난 극악의 죄를 지었던 자들인 거죠.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 십자가에 달려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53장에서도 5절 그가 찔림은 우리 허물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바울도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가 있는 곳이 바로 그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주 아래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 아닙니까? 허물과 죄악이 가득한 존재가 누구입니까? 우리 아닙니까? 우리는 바로 이 저주의 죽음 아래 놓여있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십자가에 달린 무력한 존재입니다.
신학자 아더 핑크도 말합니다. “ 우리는 우리의 손에, 우리의 발에 못이 박혀 잇어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절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땅에서 무엇을 하든 어떤 열심으로 사는 사람도, 영원히 아무 소망도 없이 갇혀 있을 뿐이다.”
여러분 우리에게 유일하게 열려있는 출구는 죽음 뿐입니다. 그래서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매달려 있는 이 두 죄수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죽어가는 것 뿐이에요. 어떤 인간도 그 절망과 죽음앞에, 영원한 심판 앞에서 핑계 댈 수 없고 억울하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죽게 한게 아니라 그들의 죄가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두 강도이고 죄인입니다.
이 두 강도의 이야기는 여기서 사실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셋 중에 가장 먼저 죽으셨고, 그 두 강도도 차례로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속에서 죽게 되죠. 예수님은 부활했다 하지만 이 두 강도에게는 어떠한 기적같은 변화가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살아난것도 아니고 둘중에 회개한 한 죄인만 살려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대로 죽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죽었으니까요. 심지어 진짜 천국에 갔는지조차 모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런데 저는 이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당연히 예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43절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건 예수님이 인증한겁니다. 이것처럼 확실한 구원의 징표가 어딨겠습니까? 그런데 그 전에 이 강도가 한 고백을 봅시다. 41절에 우리는 우리가 행한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요청하죠? 42절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나서, 구하는 것이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 여러분 이 차이가 보이시나요? 39절에 다른 강도가 예수를 비방하며 구하는 것을 보십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여기서 이자가 말하는 구원은 뭐겠습니까? 지금 현실에서 달린 이 십자가에서 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이 상황에서 나를 좀 뺴달라는 겁니다. 당신이 그리스돈지 하나님인지 잘 모르겠는데 맞다면 일 좀 하라는 거죠. 능력이 있다면 전능하다면 나를 사랑한다면 자비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라면 나를 좀 이 상황에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명령하다시피 요청하는 것입니다.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러나 다른 강도는 그 십자가가 자신에게 합당하다 고백합니다. 받은 현실을 그저 담담히 인정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당신이 달릴게 아니라 내가 십자가에 달려야 마땅하다 고백합니다. 당신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무결합니다. 예수를 찬양합니다. 그리고 구하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저는 이 차이가 영원한 저주아래 놓인 인류 가운데 주어진 유일한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땅의 소망을 구하는 자와 하늘의 소망을 구하는 자. 그리고 그 차이가 예수님의 대답이라 믿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사랑하는 예수사랑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소망을 갖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중에 나라가 임하옵시며 를 고백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고백하고 계십니까. 오늘 이 강도 둘은 결국 그대로 십자가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아마 세상이 보기에는 그렇게 그냥 끝난 인생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그래서 예수님께 받은 구원이 무슨 소용이냐, 받은 놈이나 안받은 놈이나 똑같이 죽었는데 라며 조롱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삶이 예수를 믿고 구원의 확신을 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과의 삶을 비교했을 때 더 나아지거나 더 부유해지거나 더 좋아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 이 예수님과의 짧은 대화 이후에 구원을 받은 강도의 남은 짧은 그 시간이, 비록 여전히 십자가상에 있으면서 똑같이 피흘리고 고통당하면서 다리 분질러지고 새가 쪼아먹는 괴로운 죽음만을 기다리는 순간이었다 한들, 그가 전에 살았던 그 긴 세월속에서 맛보았던 행복이나 기쁨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참된 기쁨과 소망이 그 안에 있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생수요 구원받은자만이 느끼고 소망할 수 있는 구원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쁨이 여전한 고통 속에서도 버티고 살게 할 소망의 힘이요 능력이 되리라 믿습니다.
반주해주시구요. 여러분 예수께선 이 소망의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너가 죽으면이나 나중에~ 라던지 훗날 이라는 미래적 표현을 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입니다. 언제요? 오늘. 지금. 이 자리. 나중에 내가 좀 더 성숙하면, 나중에 내가 좀 더 여유 있으면. 나중에 일좀 정리되고 애 좀 크고. 아뇨. 오늘 지금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지금 네가 나와 낙원에 있으리라 말하세요.
누군가 묻더라구요. 전도사님. 선교사들은 나중에 가서 천국에서 받을 상급이 일반인보다 더 큽니까?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선교사처럼 좀 더 노력하고 애쓰고 헌신하면 천국가서 더 복받느냐는 이야기죠. 한 데나리온으로 만족 못하지 않겠냐는 거 아닙니까? 더 뭔가 우리 기준과 생각에서 선교사정도면 뭔가 더 있어야 공평하다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천국에서 상급은 가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제 생각에 이미 그 선교사님들은 누구보다 큰 상급을 이미 받아서 이미 이 땅에서 그 상급을 누리며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하나님 사랑해서 그 선교 가겠습니까? 대체 얼마나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이 땅에서 누리면서 살고 있어야, 모든 것 버리고 가족도 재산도 포기한 채 복음을 천하러 이억만리 목숨걸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의 하루하루 삶은 주기도문의 말씀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삶을 이미 누리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그 기쁨 누리며 삽시다. 우리 그 구원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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