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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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우리 모두는 살아가며 상처를 입습니다. 그 상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육체의 상처, 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입니다.
육체의 상처는 병원을 가거나 약을 바르면 낫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 한 마디에, 스쳐 지나간 기억 하나에 다시 아파오기도 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를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은 음악이나 영화, 책,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위로를 찾습니다.
저 역시 음악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가수 임재범 씨가 한 경연 프로그램에서 윤복희 씨의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6분 동안 그 노래를 들으면서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음악에 집중했습니다.
다 듣고 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지금도 가끔 그 노래를 꺼내 듣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통해 위로받았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왜 이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에 그렇게 깊이 와 닿았을까?
원곡자인 윤복희 씨는 임재범 씨의 무대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굴곡을 겪은 사람만이 이 노래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데,
임재범 씨의 ‘여러분’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부른 노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겪어본 사람만이, 곁에 있어 준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위로가 있습니다.
단순한 말이나 설명이 아닌, 함께 아파해 줄 수 있는 사람의 존재가 진짜 위로가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또 그 위로를 받은 자로서 어떻게 위로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배경
배경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난을 많이 겪은 사도입니다. 그는 원래 유대교 종교지도자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이전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을 전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이 선택은 곧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며, 여러 차례 전도여행 중 배가 파선되거나 강도를 만나고, 굶주리는 일도 겪습니다.
그는 심지어 “살 소망마저 끊어진 줄 알았다”고 고백할 만큼 극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삶은 고난으로 가득했음에도 그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바울이 찬송한 하나님은 바로 “자비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넘치는 고난 만큼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삶을 살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받은 위로를 성도들에게도 흘려보내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 경험한 위로,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위로는 어떤 것일까요?
오늘은 고린도후서 1장을 통해, “위로”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고난의 대명사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하나는 욥입니다. 욥기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는 욥과 그의 친구들이 등장합니다.
욥기 2:11–13에서는 친구들이 욥에게 와서 위로하는 장면이 담겨있습니다. 함께 살펴봅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의 친구들이 했던 위로는 총 세 가지 입니다. 첫째는 욥에게로 온 것입니다. 둘째는 욥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침묵입니다.
위로는 함께 있는 것이다.
위로는 함께 있는 것이다.
여러 말보다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큰 위로가 될 때가 있습니다.
힘들다는 말 한 마디에 이것저것 자초지종을 묻는 것보다 지금 어디야? 내가 갈게. 라는 말이 든든한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가장 좋은 위로자라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들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바로 내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의 고통을 위로하시고 또 그것으로부터 건지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직접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신 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삶의 순간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함께 숨쉬고 먹고 마시고 잠들며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모든 삶을 위로하시고 또 건져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힘든 것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곁에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 나도 예수님과 함께 숨쉬며 살던 저들 중에 하나이고 싶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제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모든 삶을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 함께 고백할까요?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십니다.
말보다 더 큰 위로는 존재의 위로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모든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를 받은 바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고통을 당하는 자들과 함께하려 애썼던 것을 봅니다.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하라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도 이 위로에 동참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말보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상처받은 자들의 곁에서 함께하는 존재 자체로 위로하는 하나님의 위로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에서 위로를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와 함께 몸부림을 치고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 존재들 만으로도 위로를 얻습니다. 제게 큰 위로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말보다 마음을 담아 “내가 갈게”라고 건네며, 존재로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보세요.
위로는 동참하는 것이다.
위로는 동참하는 것이다.
요즘음 인간관계에 있어 ‘공감능력’의 중요성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감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참 어렵습니다.
심지어 “상대방의 말을 반복만 해도 중간은 간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겼습니다.
왜 공감이 어려울까요? 우리는 진정으로 상대의 자리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처지와 감정을 온전히 느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을 보면, 공감이 참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 욥을 마주했을 때 친구들은 욥의 상황에 공감했습니다. 그들은 욥의 아픔을 보고는 7일 내내 겉옷을 찢고 티끌을 머리에 뿌리며 욥의 아픔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욥과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이 공감능력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생각으로 욥에게 위로하다가 결국 욥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친구들이 욥에게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친구들은 욥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종종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고통 중에 누군가 건네는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라는 말들이 오히려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애쓰지만,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얼어있습니다.
또 심지어 고난 중에 있을 때에, 고난이 특권이다. 고난을 통해 연단될 수 있는 기회다. 라는 그리스도인들만의 위로가 있습니다. 이 위로는 더욱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확 열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어”
이 한 문장이 마음의 벽을 무너뜨립니다.
왜일까요? 그 말에는 고통을 지나온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깊이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위로자가 될 수 있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말로만 위로하는 분이 아닙니다.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우리 곁에서 우리의 고통을 실제로 짊어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이해’하신 분이 아니라 직접 ‘당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위로는 다릅니다. ‘내가 너를 잘 안다’, ‘내가 너를 위해 너의 고난을 받았다.’, ‘내가 너에게 평안과 회복을 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깊은 위로가 되는 이유는,
예수님꼐서 먼저 우리의 고통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누구보다 깊이 우리가 겪는 상황에서의 고통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하늘 위에서 우리의 고통을 관찰만 하신 분이 아니라, 눈물로 얼룩진 고난의 자리 가운데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고난을 지나온 사람이 전하는 위로는 짧은 한 마디일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 닿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는 그저 상황을 스치는 말이 아니라, 상처를 어루만지는 깊은 위로가 됩니다.
먼저 겪으신 예수님께서 같은 고난을 겪는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 이것이 바로 ‘체휼’입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우리가 겪는 고통의 자리로 직접 들어오셔서 고스란히 그 고난을 겪으시고 이겨내셨기 때문입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각자의 고난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 고난은 모두 다르고, 그 무게를 제가 감히 가늠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그 고난을 이미 경험하셨기에, 그 무게와 아픔을 고스란히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의 고난을 내려놓고 위로받는 오늘 저녁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난과 비슷한 고난을 겪고 있는 지체들을 만날 때에, 우리가 받은 위로를 전함으로 그들을 위로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위로는 소망과 격려를 준다.
위로는 소망과 격려를 준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위로를 받을 때, 그 위로가 상황의 변화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누군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는 것에는, 그 상황이 빨리 지나가고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이 일시적인 위안은 줄 수 있지만, 현실은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위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그와 다릅니다.
‘위로’라는 단어의 어원을 보면, 단순한 ‘달램’이 아니라 ‘격려하다’, ‘힘 있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 힘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에서 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위로의 예가 가득합니다. 시편 기자들은 종종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거나 생명의 위협을 받는 절박한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 속에서도 그들은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라”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삶의 터전이 무너진 상황 속에서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이 기쁨과 위로는 상황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도 그렇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 속에서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앞으로도 건지실 줄 믿는다”(고후 1:10)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백한 위로는 고난을 제거해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여전히 계시며 자신을 건지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평안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이 말씀은, “이제부터는 너희 삶에 고난이 없을 것이기에 평안하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에서 우리는 여전히 환난을 당하겠지만, 고난을 이긴 내가 너희와 함께하니 나로 인해 담대히 고난 중에도 나를 바라보며 걸어가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는 단지 우리의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생명의 소망이 끊어지는 고난을 마주하더라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우리를 결국 건지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격려가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을 평안으로, 눈물과 한숨을 감사와 찬양으로, 고난을 소망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실제로 경험하고, 날마다 적용하며 살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의 삶엔 가정의 문제, 건강의 어려움, 관계의 아픔, 또는 인생의 여러 무게들이 고난이 되어 넘치게 밀려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리는, 그 고난만큼이나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위로도 넘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을 예수님도 친히 겪으셨고, 그분은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주님이 고난 가운데 우리에게 넘치는 위로가 됩니다.
"내 상황이 언제쯤 나아질까?" "언제쯤 끝날까?"라는 질문 대신,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변함없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는 저 자신이 아니라, 능히 나를 건지실 하나님께 주도권을 맡깁니다.”
라는 아름다운 고백이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의 소망과 격려의 위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안에 머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가정을 향해, 교회의 지체들을 향해, 우리의 공동체를 향해 소망과 격려가 담긴 위로의 통로로 흘러가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나를 일으킬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일으키는 능력이 됩니다.
결론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보다 앞서 걸으시며,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격려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우리는, 역설적으로 넘치는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평안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에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받은 위로를 토대로 우리가 보냄받은 그 곳에서 위로자로 사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