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4:14-21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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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린도전서 4:14-21
찬송가 369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동안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은 긴 기간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행18:11-18).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시점에 여러 문제들이 생겼음을 고린도전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여러 문제들 중 하나로 고린도 교인들 사이의 분열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각각의 인물들을 지지 하면서 문제가 불거진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사역했던 아볼로는 탁월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아볼로를 따랐고, 아볼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린도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됐습니다. 나아가서 고린도 교인들은 아볼로와 바울을 비교했고, 이는 바울에 대한 판단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판단했음을 4장 전반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헬라 문화의 영향으로, 몇몇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 비판적이었습니다. 복음 전도자이자 사도인 바울은 철학자와 수사학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판단하는 것에, 심각성을 느끼고 강한 어조로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과 복음 전도자인 자신의 관계를 상기시키고, 그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또한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14-15)
(14-1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4장 전반에서 강한 어조로 고린도 교인들을 비판하며 그들의 잘못을 책망했습니다. 그의 책망은 교인들을 향한 인신공격으로 오해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어조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명예를 깎아내려 치욕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의 어조가 강하고 신랄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을 비방하기 위해 편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같이 권하려는 것임을 밝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 상기시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수사학자나 철학자들과 같이 비교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군중으로 여기지 않았고, 복음으로 맺어진 아비와 자녀와 같은 관계임을 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과의 갈등을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므로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부모와 자녀의 관계 안에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한 믿음 안에서 어떤 책망과 비판이 오가더라도, 한 몸된 가족의 관계 안에 있음을 상기 시킵니다.
즉,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복음으로 낳았다고 하며, 그 관계가 단순히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된 영적인 가족의 관계임을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버지라고 한 것은 바울의 복음 전파 없이는 그들에게 믿음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통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벧전1:23). 복음을 듣지 않고는 믿을 수 없으며 전하는 이 없이는 복음을 들을 수 없기에(롬10:14-17) 바울과 고린도 교인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 같이 필연적인 관계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순전하게 전하기 위해 애쓰고 분투하였습니다. 복음이 당시의 헬라철학이나 인문학적 지식과 희석되어 변질되지 않도록, 바울은 그 내용 뿐만 아니라 전달방법에서도 인간적 능력이 우선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순전한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 분투하였고, 그 복음의 전파로 그들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복음으로 낳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아버지와 일만 스승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복음에 대해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아비는 적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든 복음에 대해 가르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아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유기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한 교회가 되는 것은 각 사람이 각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고전12:14-22). 그 중에 누구는 머리의 역할을 하며 누구는 손과 발의 역할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몸의 한 지체로 복음의 말씀을 몸에 공급하고 먹이는 사역자를 각 교회에 주셨습니다(엡4:11-12).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복음에 대해 가르치는 스승이 될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몸에 공급하고 먹이는 아비가 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과 아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풍성한 시대에 설교와 가르침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더 탁월한 설교와 가르침을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온라인 예배가 일상화된 지금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과 같은 때에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은 있으나 아비는 적다는 말씀을 상기해야 할 때입니다. 비대면 예배의 시대에 자칫하면 아비 없이 일만 스승을 쫓는 신앙생활이 횡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더 실력이 좋고 탁월한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더 인기가 많고 더 많은 영향력이 있으며, 사람들로 추앙을 받는 설교가와 사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사람들로 추앙을 받고 뛰어난 실력자들을 본받지 말고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6-17)
(16-1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고린도 교회에는 사도 바울보다 더 언변이 좋고 지식적으로나 외양적으로 더 탁월한 실력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영향력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는 말은, 자신을 더 인정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옳기 때문에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영광을 쫓지 말고,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더 뛰어나고 탁월한 언변과 지식을 좇아가며 세상의 영광을 좇아갔습니다. 그들은 복음에 나타난 십자가의 고난을 잊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을 멸시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로 하여금 사도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생각나게 했습니다. 무엇인가 신앙생활에서 어긋난 것 같을 때, 다시 돌이키고 회복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언변과 외모 처럼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고 구식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교회를 향한 이 말들은 철학자나 수사학자들이 하는 논쟁이나 변론과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능력은 말의 실력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18-21)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으니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가르치는 말과, 수사학자나 철학자들의 말, 바울을 비판하는 말 등 서로 말로 실력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사람들의 말이 가져온 결과로 성도들이 교만해져 사도를 비난하고 공동체가 분열되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어떤 복음의 능력도 없었습니다. 설사 그들이 말로 사람을 감동시키고 행동을 변하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기적이나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린도 교회에 있는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사도 바울의 복음이 무색할 정도의 지적인 가르침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적인 가르침들이 아무리 탁월하더라도,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구원하는 것은 복음 그 자체이지, 언변이나 지식에 있지 않습니다. 언변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동요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거듭남과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복음의 능력이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움직이는데 있다면, 우리는 복음을 사람을 감동시키는 언변이나 지식으로 혼돈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가 능력에 있다고 하는 말은, 복음만이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는 확신입니다. 그것이 설사 당장 지금 눈에 보이는 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지라도, 복음만이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23-25)’
오늘 고린도후서 4장 후반부의 이 말씀들은 무겁고 엄중한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나눈 이 말들을 부드럽게 돌려서 권면하며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격앙된 어조로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책망하며 꾸짖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도 이 말씀을 가볍게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 정황이 다음 구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사도 바울이 매를 가지고 나가랴는 말은, 자녀를 매로써 경책하여서라도 잘못된 행동에서 돌이키게 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 만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현재의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며 권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누구나 자녀에게 항상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유하게 대하고 싶지만 엄하게 꾸짖고 경책해야 할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사도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엄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철학자나 지식인들과 비교하고 판단하며, 복음으로 맺어진 영적인 관계라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언변과 지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따라, 복음을 말의 향연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다시금 복음으로 맺어진 영적 가족의 관계를 상기시킵니다. 또한 디모데를 보내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쳐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영광을 쫓지 말고, 바울 자신을 본받아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복음의 능력은 언변과 말의 실력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영과 진리’에 따라 나타납니다. 오늘 하루도 말이 아닌 능력으로 복음을 경험하는 하루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한 가족이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하나 됨이 사람의 능력과 실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으로 거듭남에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말이 아닌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나타내며, 세상적 영광이 아닌 복음을 위한 고난을 자처하는 삶을 살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옳고 그름을 논박하고 판가름하는 방법이 아닌 다른 어떤 방법을 들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사도 바울이 왜 고린도 교인에게 복음으로 낳았다고 말하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3.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는데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4. 사도 바울은 다시금 고린도 교인들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디모데롤 보냈는데, 디모데를 보내서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인지 묵상해 봅시다.
5.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 조광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