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마가복음 16: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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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믿음의 진실한 모습
서론: 믿음의 진실한 모습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평안이 여러분 안에 깊이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주님만이 나의 힘”이라고 한 목소리로 찬송하지만,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금 현실의 무게에 눌려 걱정과 계산에 빠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이심을 고백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지출이나 몸의 통증, 관계의 갈등 앞에서는 즉시 인간적 대안을 찾습니다. 마음으로는 천국 시민이라 확신하지만, 생활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세상의 질서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경험은 현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현실입니다.
주일 예배에서 “주님만이 전능하시다”고 고백하지만, 월요일 회사에 가면 상사의 표정 하나에 마음이 조여 옵니다. 화요일 저녁엔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불안을 삼키고, 수요일 퇴근길 막힌 도로에선 짜증 섞인 말이 툭 튀어나옵니다. 이렇게 믿음의 선언과 일상의 반응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 간극은 때때로 우리를 낙심시키지만, 동시에 그 틈새를 통해 성령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감추고 있던 연약함을 비춰 주십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은혜가 필요한 지점을 정확히 인식하게 되고,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삶의 다음 걸음을 내딛도록 초대받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제자들도 우리의 거울입니다. 부활 소식을 들었음에도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16:10)는 기록은, 새 생명의 복음을 듣고도 현실의 벽 앞에서 눈물짓는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심과 실망을 이유로 제자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들을 부르셔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동역자로 변화되어 갈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생활을 ‘영적인 시간’과 ‘세속적인 시간’으로 구분하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통치는 시간표를 나누지 않습니다. 예배당에서 드린 기도가 사무실 컴퓨터를 켜는 순간 끊어져 버린다면, 우리는 신앙을 ‘행사’로 축소시킨 것입니다. 주일에 드린 찬송이 화요일의 긴 회의 안에서도 울려 퍼질 때, 비로소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됩니다. 주님은 주일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월요일 아침 교통체증과 수요일 밤 늦은 회의, 금요일 피곤한 퇴근길에도 동일하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현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첫 번째 영적 각성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어떤 날은 마음이 단단히 붙잡혀 기도와 말씀에 깊이 잠기지만, 또 어떤 날은 무심코 옛 습관과 타협하며 신앙의 긴장이 풀려 버립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손이 미끄러져도 주님이 우리를 붙든 손은 결코 느슨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넘어지는 순간조차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품 안에 있으며, 그분의 은혜는 실패의 자리까지 따라와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므로 하루의 좌절이 믿음의 종착지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넘어짐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이끄는 전환점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바로 그 전환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자리이며,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설 새로운 출발선이 됩니다.
I. 믿음: 방향을 전환하는 결단
I. 믿음: 방향을 전환하는 결단
주님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16:1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예수님을 단지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결정입니다. 거친 바다에서 노련한 선장에게 배의 키를 넘기듯, 내가 운전대를 내려놓고 부활하신 주님께 조종을 부탁드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스스로 선택하고 자율적으로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구호가 익숙한 시대에 믿음은 거슬리는 가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방향키를 스스로 잡고 항해하다 보면, 파도와 암초를 만날 때마다 불안과 후회를 반복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안전하고도 풍성한 길로 안내하시려는 분입니다. 믿음의 결단은 우리를 묶어 두는 족쇄가 아니라, 거센 바다에서 단단히 버틸 닻이 됩니다.
세례는 이런 내적 결단을 겉으로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물 위로 올라오는 것은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알리는 행동입니다. 세례식의 물소리는 과거를 덮는 은혜의 물결이며, 물 위로 올라올 때 들이마시는 공기는 성령이 주시는 새 숨결입니다. 세례는 한 번의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매일 기억하게 해 주는 표식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일 예배에서는 “아멘”으로 화답하지만, 평일에는 경쟁과 효율을 내세우는 세상 가치에 쉽게 휘말립니다. 이 두 세계를 오가다 보면 스스로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끝이 아닙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 또 길을 잃었습니다. 방향을 다시 잡아 주세요”라고 고백할 기회가 열립니다. 이런 고백이 쌓일수록 우리의 항로는 하늘의 나침반과 더 일치하게 됩니다.
믿음의 결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항로를 정한 뒤에도 파도가 거세질 때마다 방향키를 다시 잡고 싶은 유혹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작은 세례’를 경험해야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도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속으로 다짐하고, 계획이 어그러질 때에도 “주님이 선장이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이런 작은 고백이 계속될수록 영혼의 근육이 단단해져, 인생의 태풍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II. 두려움의 독(毒), 그리스도의 능력 앞에 무력화되다
II. 두려움의 독(毒), 그리스도의 능력 앞에 무력화되다
주님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맞닥뜨릴 위험을 잘 아시기에 “뱀을 집어도 해를 입지 않고, 독을 마셔도 상하지 않을 것”(16:18)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독을 시험해 보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악한 세력이나 상황도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성경에서 ‘뱀’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지금도 그 거짓은 교묘하게 마음속을 파고듭니다. “기도해도 달라질 게 없어”, “네 문제는 영원히 그대로일 거야” 같은 속삭임이 믿음을 조금씩 갉아먹습니다. 이런 소리는 현실과 절묘하게 맞물려 있어 쉽게 떨쳐 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막연한 긍정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신가, 내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를 붙드는 영적 싸움이 됩니다.
‘독’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서서히 스며들어 영혼을 마비시키는 세상의 독소입니다. 끊임없는 비교, 끝이 없는 피로, 관계 갈등, 자격이 있어야만 가치 있다고 여기는 분위기 등이 그렇습니다. 독은 조금씩 쌓여 어느새 마음의 평안을 앗아 갑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이미 죄와 죽음의 독을 깨뜨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시선을 돌리고 말씀을 해독제로 삼으면, 독은 더 이상 결정적인 힘을 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다는 사실(16:19)은 그 승리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두려움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기보다, 두려움보다 크신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며 마음의 중심을 다시 잡습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왜 나만 겪어야 하나?” 대신 “이 상황에서도 주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라고 물어 보십시오. 질문이 달라지면 시선이 바뀌고, 시선이 바뀌면 영혼이 기댈 곳이 달라집니다.
신앙인의 두려움은 여러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자녀의 장래, 직장의 불안, 예기치 못한 질병, 반복되는 실패로 인한 자기혐오까지—이 모든 것이 마음속 ‘영적 독소’가 되어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독이 퍼지는 속도보다 은혜의 해독제는 훨씬 빠르고 강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막연한 위로가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인격적 확신이 우리의 호흡을 고르게 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드리는 기도는 단순한 주문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치열한 숨결이며 동시에 승리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우리는 혼자 남겨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울려 주시는 ‘경보음’은 실패를 알리는 사이렌이 아니라, 기도 자리로 부르시는 종소리입니다. 그 부름에 순종해 무릎을 꿇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이 우리를 감싸고, 마음속 독소는 빛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III. 연약함을 통로로 만드는 하나님
III. 연약함을 통로로 만드는 하나님
주님은 두려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서는 이들에게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낫는다”(16:18)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치유는 몸만 고치는 일이 아니라, 관계·감정·사회·영혼까지 새롭게 하는 넓은 회복을 가리킵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흠없는 사람’이 아니라 ‘회복을 맛본 사람’을 통해 다른 이를 살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상처를 겪어 본 사람만이 상처 입은 이의 말을 알아듣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만이 실패 가운데 있는 이를 진심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를 필요로 하는 이를 만났을 때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를 소개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내놓을 가장 강력한 추천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 번이나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지만,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고후 12:9)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약함을 배경 삼아 오히려 더 뚜렷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함이 사라지기만 기다리기보다, 약함 한가운데서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소망이 뿌리내리고, 우리의 이야기가 다른 이에게 치유의 길을 열어 줍니다.
교회가 세상 앞에서 가장 믿음직해 보일 때는 우리 스스로 완전하다고 주장할 때가 아니라,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 경험을 겸손히 나누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때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고, 치유는 인간의 노력 이전에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사실을 보여 줄 때 복음은 가장 밝게 빛납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해는 책으로 얻는 정보가 아니라 직접 겪은 아픔 속에서 길어 올려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약함 속에 두시는 시간은 헛된 기다림이 아니라, 다른 이를 살릴 자격을 갖추는 과정입니다. 내 실패의 눈물이 언젠가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는 손수건이 되고, 내 깊은 절망이 누군가를 끌어 올릴 우물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조각난 순간을 엮어, 시간이 지나면 치유의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십니다.
IV. 부활 신앙, 일상의 무대에서 증명되다
IV. 부활 신앙, 일상의 무대에서 증명되다
마가복음 마지막 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복음을 전하자, 주께서 함께 일하시며 뒤따르는 표적으로 그 말씀을 확실히 보여 주셨다”(16:20). 초대교회는 복음 선포 → 하나님의 동행 → 표적이 계속 이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원리는 같습니다. 복음이 입술을 넘어 일상으로 흘러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이 살아 계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표적은 대단한 기적보다는 달라진 성품, 깊어진 관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으로 나타납니다. 경제가 불안해도 탐욕 대신 절제와 나눔을 택하고, 비난이 난무해도 덕을 세우는 말을 고르는 태도 자체가 복음의 힘입니다. 세상은 화려한 이벤트를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조용히 드려진 순종을 통해 시대를 바꾸십니다.
사명은 특별한 장소나 극적인 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일, 직장에서 정직을 지키는 일, 길에서 따뜻한 한마디를 건네는 일, 교회 안팎에서 서로 돌보는 일—이 모든 자리가 복음의 무대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아는 사람”보다 “복음을 살려 내는 사람”을 통해 세상을 흔드십니다.
작은 순종은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하나님은 그 한 걸음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여시고 공동체의 문화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니 ‘크고 대단한 일’보다 눈앞의 작은 순종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작은 씨앗이 큰 나무로 자라듯, 믿음의 씨앗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풍성한 열매로 키워 주십니다.
부활 신앙은 ‘문제가 사라지는 삶’이 아니라, ‘문제의 의미가 달라지는 삶’입니다. 상황은 같아도 해석이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집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은 고난의 무게를 뒤집는 영적 지렛대가 됩니다. 같은 길을 걸어도 누군가는 “왜 나만 이런 고난을 겪나”라고 탄식하지만, 부활 신앙을 지닌 사람은 “이 길도 주님과 함께 가고 있다”는 믿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그 믿음이 일상 속에서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만들 때, 세상은 그 변화를 ‘표적’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결론: 함께 역사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라
결론: 함께 역사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삽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아직 완성을 기다리는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중적인 현실은 때로 우리를 흔들지만, 동시에 우리를 주님께 더 단단히 묶어 주는 은혜의 끈이 됩니다.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는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 과거의 실패에 발목 잡히지 마십시오. 현재의 한계에 움츠러들지 마십시오. 미래의 불확실성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각 장면에 동행하시며, 연약함을 능력의 통로로 전환하시고, 두려움의 독을 은혜로 무력화시키십니다. 이 확신을 붙들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의 다양한 접점에서 부활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증인으로 서십시오.
우리가 한 걸음 순종할 때, 주님은 한 도시를 향한 전략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품을 때, 하늘은 세대를 향한 구원의 파도를 일으킵니다. 우리 시선에는 작은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손에 들린 작은 순종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씨앗이 됩니다. 그러니 담대히 나아갑시다. 주께서 함께 역사하십니다. 아멘.
오늘 설교를 마음에 새기며, 각자 삶의 자리에서 두 가지만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믿음의 키’를 매일 아침 주님께 드리는 의식적인 고백을 하십시오. 둘째, ‘작은 순종’을 찾아 실행하십시오. 화해의 메시지 한 통, 격려의 문장 하나, 감사의 기도 한 줄—이 작은 행동들이 쌓여서 하나님 나라의 큰 강을 이룹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작음을 통해 크게 일하실 것을 기대하며, 한 주간도 담대히 걸어가십시오.
마지막으로, 우리가 걷는 길이 때때로 어둡게 느껴지더라도 기억하십시오. 별이 가장 밝게 빛나는 시간은 밤이 가장 깊을 때입니다. 주님의 영광은 우리 약함의 밤하늘 위에 별처럼 떠올라, 주변 모든 이에게 빛이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실망으로 번역하지 말고, 두려움을 기대로 번역하십시오.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는 말씀은 과장된 교리가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작동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선언입니다. 그 선언을 품고, 이제 세상이라는 선교지로 파송받아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앞길을 밝히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