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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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성
순수성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사랑합니다! 중고등부 예배에 오신 꿈사땅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은 무엇을 하는 분이신 것 같은가? 학교선생님도 생각해보고 옆에 선생님도 보라.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내가 모르는 것을 알려주시고,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도해주신다. 우리 한국의 대학교를 보면 보통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에 대해서 그 학교를 나왔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유명한 대학교일수록 최고로 여긴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의 대학교에서는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는 그렇게 우리나라만큼 궁금하지 않는다. 자신의 스승이 누구인지, 그에게 무엇을 배웠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의 가치를 판단한다. 좋은 대학의 기준은 어떤 교수님이 계시는가에 따라서 정해진다. 거기서 정말 유명한 교수님께 배웠는지를 많이 궁금해한다. 이처럼 대학을 가는 이유가 내가 만나고자 하는 교수님을 만나서 배우고자 했던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 그저 이력서에 한줄 넣기 위해서 대학은 간다면 아무리 좋은 대학이라고 하더라도 누구에게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대학교 입시 면접에서도 면접관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것은 ‘이 사람이 정말 해당 전공을 위해 얼마나 준비했는지’를 궁금해 한다. 단순히 성적 맞춰서 왔다고 한다면 면접관들은 대학에 합격시킬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학에 합격해서 교수님의 강의를 듣다가 질문이 생겨서 수업 마치고 교수님께 질문하면 수업시간 때 들을 수 없는 내용들을 가르쳐주시기도 한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25절에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를 어떻게 하신다고 말하는가? ‘숨기시고’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안 알려준다는 것이다. 두 번째 사람의 부류는 어린 아이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나타내주신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을 알잘딱깔센을 장착한 사람을 아주 좋아한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알아서 일을 잘하고, 똑똑하게 공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줘야하고,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답답해하기에 어린 아이들을 쉽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을 좋아해서 이러한 이유로 좋은 대학에 가려면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르시는 제자는 이러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어린 아이를 부르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가 알아서 잘할 수 있다고 스스로 능력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없으면 안된다고 매달리며 의존해야 하는 어린 아이를 원하신다.
왜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을 제자로 삼으시고자 하시는가?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 지혜와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꿰뚫어 볼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사람들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무시하지만 하나님의 지혜에서나 천국에서는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완전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가야 그 주님이 놀랍고도 어마어마한 지혜로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신다. 이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 누구의 뜻인가? 26절에 마태복음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라고 성부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마태는 이것이 세상과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가치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공부도 못하고, 일도 못하고, 센스와 눈치도 없으면 쓸모 없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러한 사람이 예수님을 의지할 때, 학벌과 능력과 재산과 상관없이 부족해보여도 그러한 사람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의지해야하는가에 대해서 다음 절에 이렇게 예수님이 답을 해주신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 어버지께서 예수님께 무엇을 주셨는가?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한다. 여기서 모든 것을 주시는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한다. 여기서 아버지라고 부르며 서로 앎의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앎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이 말씀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사랑하는 인격적인 관계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누구를 아는 것인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에게 갈 수 없다는 것인가? 하나님 아버지, 성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시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우리를 죄의 문제로 인해 영원한 죽음에서 건지실 수 있는 진리이며,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분이시다. 왜인가? 예수님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 권세를 가지고 있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들었음에도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여전히 내 힘으로, 내 생각과 내 방법으로 또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힘으로 이렇게 거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방황하며 헤매는 우리들에게, 또 세상에서 아둥바둥 열심히 살아보려다가 오히려 상처를 받아 고통받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선포하신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께 나아옴으로써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주님의 직접적인 초청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께 나아오면 무엇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가? 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요구와 초청은 예수님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나는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스스로가 정말 무식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초청에 응하는 것이다. 그럴 때 작은 수고만으로도 많은 쉼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초청에 무시하기 쉽지만, “어린아이”들은 신나게 예수님께 올 것이다. 따라서 이 초청은 모든 사람을 뒤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초청을 받을 것이지만 소수만 택함을 받게 될 것을 마태복음 후반부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가 정말 가도 괜찮은 분이신가에 대한 질문에 바로 이렇게 예수님은 답을 해주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스스로 어떤 분이라고 소개하시는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상담 전문가라도 하더라도 사람의 문제와 어려움에 있어서 도와주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상담도 보통 12주 상담이 최대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들고 피곤하고 지친 우리들에게 언제든 오라고 초청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매일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꾸짖거나 짜증내시거나 혼내시지 않으시고 사랑의 눈빛으로 긍휼한 마음으로 우리를 안아주시며 바라보신다. 그러면서 무엇을 메라고 하는가?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다. 멍에라는 것은 유대 전통에서는 순종을 상징한다. 소들도 밭을 갈 때 멍에를 메고 주인의 요구에 따라 일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의 멍에라고 하는 것은 다른 멍에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세상의 멍에는 불합리적이고 메면 멜수록 더욱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힘들어진다. 그러나 성경에서 진정한 순종의 아이콘이신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100% 완벽하게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배우고 순종하면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예수님의 멍에라는 것은 누구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인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살아갈 때 비로소 마음에 쉼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거의 대부분 쉼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다. 그래서 주말을 기다리거나 방학을 기다리거나, 이번 연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버티는 힘이라며 쉼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 쉼의 체감속도는 어떤가? 행복하고 즐거울수록 순식간에 지나간다. 휴가가 끝나면 우리에게 무엇이 기다리는가? 학업이라는 지옥같은 등교를 하며 하루를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일이라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고되며 괴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이란 괴로움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구제하고 도와주는 일을 즐거워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하는 일이므로 힘들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기쁨으로 주어진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나 하나 먹고 살기 바빠죽겠는데 뭘 섬기고 살아?”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그는 똑같이 힘들고 괴로운 삶을 계속해서 반복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30절에서 예수님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을 가볍다고 하는 것은 이 장면을 생각하면 된다. 보통 멍에는 소 두마리의 어깨에 지고 둘이 나란히 비슷한 체구끼리 묶어서 일을 시킨다. 그러나 예수님의 멍에는 장정한 큰 소와 어린 송아지가 함께 걷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그러면 어떤 소만 고생을 하는 것인가? 체구 때문에 맞지 않아서 어린 송아지는 멍에를 들지도 못하고 장정한 소만 그 멍에를 혼자 지고 일하게 된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만 옆에 따라다니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옆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같이 걸어가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방식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힘들고 괴롭고 지치는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친구들에게 가서 고민상담하지 말고, 예수님께 나아오길 소망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으로 여러분에게 응답하시겠는가? 성경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잘 듣고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우려야 한다. 우리는 신앙생활이 익숙해지면 배우려는 마음을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께 겸손히 배우려고 하는 사람을 제자로 삼으신다. 두 번째로 지식보다 태도, 순종하는 자세를 갖길 바란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로 믿고 따르려는 마음이다.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함은 하나님 앞에서 ‘네’라고 대답할 준비된 마음이다. 우리는 어릴 때 부모님으로 만족하고 좋아했던 순수함이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함이 회복되길 소망한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출 줄 아는 것이다. 전도사님이나 선생님이 교회에서 무엇을 하자고 하면, 전도사님이나 선생님을 믿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사님과 선생님을 세워주셨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전도사님과 선생님들을 통해 말씀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순종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힘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멍에를 선택하기를 소망한다. 오늘 내가 짊어진 스트레스, 경쟁, 비교의 멍에 대신 예수님이 주시는 쉼과 평안을 믿고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보시라. 그래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주일에는 주님께 맡겨놓고 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수많은 경쟁과 치열한 사회 속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두려움이 찾아와도 예수님 믿고 굶주린 사자굴에서도 편안하게 잠들었던 선지자 다니엘처럼 쉼을 누리며 진정한 지혜 그 자체이신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붙드는 인생들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