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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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베푼 세례(1-2)
제자들이 베푼 세례(1-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소문을 듣고 올 것을 예상하시고, 아마도 분쟁을 피하기 위해 유대지역을 떠나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렇게 나서야 할 때와 피해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알고 행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매순간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가라고하면 가고, 피하라고 하면 피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굳이 세례를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은 결코 사족이 없습니다.
뱀의 발과 같이 불필요한 내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기록된 내용은 반드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베풀지 않고 제자들이 베풀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례의 복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복 그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받고, 예수님을 소유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은혜이고, 축복이고, 생명이며, 빛이십니다.
재배치의 은혜
재배치의 은혜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어지자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재배치의 은혜임을 알고 반응했습니다.
자신에게 몰려왔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을 때 세례요한도 참 멋지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자신을 따르는 때에 미련없이 다시 유대를 떠나시는 예수님도 멋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멋지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3-15)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3-15)
예수님은 굳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큰 아픔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사마리아의 역사는 뼈아픕니다.
사마리아는 한 때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큰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라는 제국에 이스라엘이 멸망당했을 때 그 제국의 이주정책으로 인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사마리아로 몰려오고 또 많은 백성들이 국외로 추방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혼혈들이 생겼고, 사마리아는 더럽혀진 도시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부심이 대단했던 이스라엘이었기에 다른 민족들과 피가 섞인 사람들을
자신들과 같은 민족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에는 각 나라의 종교들과 우상들이 모두 들어와서
여러 종교와 신들이 혼합되어 있는 문화가 생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크게 세 개의 도읍으로 구분되는데 수도가 있는 유대와 중간의 사마리아 그리고 가장 위쪽의 갈릴리 입니다. 사마리아는 그렇게 고립되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단강 가의 길로 우회해서 갈릴리와 유대만 왕래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시겠다고 선전포고를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물을 좀 달라(7절)
물을 좀 달라(7절)
예수님은 권위나 체면 따위를 내세우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걷고 일하고 그렇게 생활하시다가 피곤하니까
땅바닥에 털썩 앉을 수도 있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안먹어도 배가 안고프고, 안자도 졸립지 않고, 맞아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분은 피곤했고, 푹 자고 싶으셨으며, 배불리 먹고 싶었고,
채찍에 맞거나 창에 찔리기 싫으셨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침 물을 길러오는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물을 좀 달라.”
여인은 어떤에 지체 높으신 양반같은 분이 우물 곁에 앉아서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지 당황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과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그 여인이 자신에게 구했을 것이라고 반문한다. 여인은 예수님께 그릇도 없고, 우물을 파려면 땅을 엄청 깊게 파야하는데 어떻게 나에게 물을 준다는 말인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인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그분께 구합니다.
“그 생수를 저에게 주세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기도
사마리아 여인의 기도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을 다시 한번 돌아보세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지 않을 곳 만나지 않을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러 먼저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인에게 먼저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떠서 마실 수도 있습니다.
물은 누구나 떠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물은 최소한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먼저 십일조와 헌금을 하라고 하신 것은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상종하지 않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하나되게 하시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물을 좀 달라 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여인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신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당신이 야곱보다 크시냐고 반문합니다. 정말 엉뚱하고 연관이 없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수님께 구합니다.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함께 읽어보기)
이것이 기도입니다.
돈은 매번 우물에 찾아가서 길러야 하는 물과 같습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이 우물로 나가서 물을 길러오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 굴레가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이런 고생을 하지 않고 물을 계속 먹고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그렇습니다. 일도 하지 않고 고생이 없이 마음껏 돈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진 돈은 계속 벌어야 쓸 수 있지만 내가 주는 돈은 영원히 써도 주머니에서 솟아나는 돈이다.
그러니까 여인이 주님 저에게도 그런 것을 주세요. 기도한 것입니다.
이 시대에 물로 갈증을 채우는 여인이나
지금 시대에 돈으로 갈증을 채우는 우리나 똑같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물 길를 힘이 없어서 여인에게 달라고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이미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구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우리에게 헌금을 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일종의 ‘관계적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역에 관객이 아니라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물을 드렸고, 그 물을 첫번째 수혜자는 바로 자신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고 우리는 그 일에 참여자가 되지만 그 사역의 첫번째 수혜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먼저 드리고,
그 다음 말씀을 들었는데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나 기도함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도
듣고 누릴 수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이나 과학으로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사람에게 설교할 수 없습니다.
꼭 우리의 신앙생활과 같습니다.
우리는 형식적으로든 아니면 무언가 바라는 마음이든 어찌되었든 교회에 와서 주님께 헌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해를 하든 못하든 일단 듣습니다.
그리고 기도함으로 그 은혜를 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드린 예물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첫번째 수혜자가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다 이해해야 행동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교만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겸손함으로 연약함으로 주님께 나아가세요.
믿을만 하고 능력이 크신 그 분이 우리 안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이 되어 우리의 갈증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