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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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13:1–17 NKRV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서론
어제까지의 황금 연휴는 잘 보내셨습니까? 저는 아주 알차게 잘 보냈습니다. 월요일에 저는 교회 청년부와 당회장 목사님과 함께 한강과 홍대를 갔습니다. 한강에 가서 유명한 한강 라면도 먹고 홍대에 가서 백화점, 소품샵, 옷가게 여러 가게를 구경하고 길거리 버스킹도 구경했습니다. 오랜만에 교회 청년부와 함께 밖에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나들이의 특별한 점은 바로 당회장 목사님도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와 교회 청년부들뿐만 아니라 당회장 목사님도 한강과 홍대에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안 가보신 분은 모르시겠지만 홍대가 당회장 목사님이 가시기에 그렇게 재밌고 편한 곳은 아닙니다.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정신 없고 시끄럽고 젊은 이들의 취향에 맞춰진 곳입니다. 저희도 거기에 가서 피규어 샵이나 악세사리 샵, 소품 샵, 옷 가게 등을 주로 다녔기 때문에 아마 당회장 목사님은 재미는 당연히 없고 이게 뭐냐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회장 목사님은 저희와 다니시면서 단 한번의 불평도 안하셨습니다. 그저 저희가 가자는 곳으로 따라오시고 옆에서 기다려주셨습니다. 화요일에 담임 목사님과 가족 모임을 갔다 오셨을 때는 얼굴이 밝으신 것을 생각해보면 홍대에선 아마 힘드시고 재미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회장 목사님은 저희를 생각하시고 배려해주셔서 아무 티도 내지 않으시고 함께 해주신 것입니다.
당회장 목사님의 이러한 마음 덕분에 저희는 눈치 보지 않고 월요일을 재밌고 보낼 수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고 연장자이신 분의 배려와 인내 덕분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와 비슷합니다. 선생되시고 주인되시는 예수님의 겸손한 자세가 나옵니다. 우리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예수님의 마지막 선포가 끝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유월절 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갈 때가 된 것을 아셨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유언장을 작성하고 삶을 정리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멀지 않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간 후에도 세상에 남아 있을 자신의 사람들,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17장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간 후에 세상에 남아있을 제자들과 믿는 자들을 걱정하시고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기신 유언장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 없이 살아갈 제자들과 믿는 자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으신 말씀을 13장부터 17장까지 남기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예수님의 유언장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은 유언장을 남기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바로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끝까지는 “텔로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텔로스”는 일반적으로 시간의 끝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중간에 멈추지 않으시고 자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텔로스”는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텔로스”의 다른 의미란 바로 “완전하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부족하지 않고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우리를 완전하고 절대 멈추지 않게 사랑하신다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완전하고 멈추지 않는 사랑에 반해 가룟 유다는 마음이 달랐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외면했고 자신의 욕심만 바라 봤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는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이처럼 욕심에 눈이 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베푸신 은혜, 가르침, 사랑 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욕심이 내 안에 가득하게 되면 오직 내 욕심만 채우기 위해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예수님을 팔아 죽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까지 생명을 주시려고 마음 먹으셨건만 가룟 유다는 그런 예수님을 돈 때문에 배신하고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런 가룟 유다의 속마음을 알리 없는 제자들은 예수님과 저녁 만찬을 시작합니다. 사진 잠깐 보겠습니다. 이 사진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은 당시 문화에 따라 테이블에 비스듬이 누워 화기애애한 분위기 이야기와 함께 음식을 먹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며 그저 만찬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이 편하게 만찬을 즐기던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마음은 복잡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께 돌아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이지만 그 길에 모든 세상의 생명이 달려있었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너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가더라도 남은 제자들이 오늘을 기억하여 복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녁을 먹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겉옷을 벗으셨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서 가져오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행동을 제자들은 의아해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러시지하고 의문을 가지며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대야를 가져온 후의 예수님의 행동을 보며 제자들은 경악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충격적인 행동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그저 눈을 동그랗게만 뜨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당시와 자신들의 생각에 말도 안되는 예수님 행동에 그들은 말문이 막혔을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동에 왜 이렇게 놀랐을까요? 발을 좀 씻겨 줄 수도 있는거 아닌가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 때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때 당시 발을 씻겨주는 것은 종들이나 하는 아주 천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는 선생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금 우리의 상황으로 비유해보자면 부모님이 자녀에게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하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시자 베드로는 자신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을 거부합니다. 어떻게 자신이 섬길 주인이자 선생인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길 수 있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자라는 자부심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충성심을 자랑하기 위해 절대로 예수님이 자신의 발을 씻기지 못하실 것이라 선언합니다.
베드로의 기대와 다르게 예수님은 물러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단호한 목소리로 이와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에게 발이 씻겨지지 않는 자는 예수님과 절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발을 씻기는 것이 무엇이길래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발을 씻기는 것이 단순히 제자들을 향한 사랑과 애정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 사랑과 애정의 표현을 넘어 더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 9절부터 11절을 이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화들짝 놀라며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 말합니다. 더 많은 곳을 예수님이 씻겨주신다면 예수님과 더 깊고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의 대답은 또 다시 베드로의 기대와 다릅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어도 된다. 너희의 온 몸은 깨끗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온 몸이 깨끗한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발을 씻겨주시는 이유가 친밀한 관계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친밀해지기 위해 온 몸을 씻겨주시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발을 씻기는 것이 친밀한 관계를 위한 의식이 아니라 대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발을 씻기는 행동의 의미를 자신을 팔 자, 가룟 유다와 함께 이야기하며 드러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자신이 십자가를 져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시는 것. 하나와 서로 사랑으로 섬기게 하기 위하는 것 둘입니다. 우리 십자가 사건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십자가 형벌은 어떤 것인가요? 당대 최악의 범죄자가 받는 형벌이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가장 치욕적인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신명기 21:23 만 보더라도 나무 위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의 관점에선 그게 어떤 차이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명예로운 죽음이던 비참한 죽음이던 똑같은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십자가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에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피치못할 사정으로 죄를 대신 뒤집어 쓰고 교도소 10년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선택지가 2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폭행 나머지 하나는 미성년자 강간. 여러분은 어떤 죄목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 다들 폭행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이 심한 처형 방법이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성과 명예와 모두 땅에 떨어지고 예수님의 인격이 모욕 당하는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해결되야하는 한 가지 문제가 있던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과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십자가를 각오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든 괴로움, 비참함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과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오해할 수 있었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신명기 21:23 을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는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의 저주도 대신 받으셨구나 하고 이해하지만 당시 제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께 죄를 지어 저주 받았다고 이해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심판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스스로 가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발을 씻기는 것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중에 십자가로 충격을 받고 혼란스러울 제자들이 십자가 죽음의 올바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발을 씻어주시는 것에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8절에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관계가 끊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는 것을 인정하는 자가 십자가의 희생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마찬가지로 이유로 발을 씻어주시는 일과 가룟 유다의 관계가 10절과 11절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이미 배반했고 돈을 사랑했기에 발뿐만 아니라 온 몸이 죄로 더러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발을 씻어주시는 것의 두 번째 이유인 서로 사랑으로 섬기게 하기 위함은 12절과 15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기시고 옷을 다시 갖춰 입으신 후 자리에 앉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제자들의 주인이고 선생님이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정말 말 그대로 서로 발만 씻어주라는 의미로 이해하시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모두가 이미 잘 아는 것같이 이 말씀은 서로가 종과 같이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서로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은 낮은 자가 높은 자를 향한 것뿐만 아니라 높은 자가 낮은 자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요즘 시대는 어떠한가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시대인가요? 솔직히 옛날에 비해선 그런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이 학생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중하고, 부모님들 또한 자녀들을 예전과 달리 존중하며 대합니다. 전반적으로 세상이 많이 평등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지금을 가장 불평등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평등이 오늘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춰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평등은 자신보다 높다 생각되는 사람을 강제로 낮춰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학교의 선생님이 있습니다. 옛날에 선생님은 어땠나요? 감히 제자가 그림자도 밟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마구 때려도 오히려 부모님이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말하던 시대였습니다. 이처럼 선생님이 강자로 높은 자로 군림하던 시대를 세상에선 끝을 냈습니다. 선생님을 강제로 낮추고 짓밟으면서 말입니다. 그런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제는 교권이 바닥으로 추락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무시하고 욕을 하고 때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모님들의 전화와 항의 때문에 자살하는 선생님들이 나타났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례를 볼까요? 대표적으로 요즘 시끄러운 pc,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가 있습니다. pc엔 인종차별, 동성애차별, 여성차별 등의 문제를 다루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끄러운 것은 여성차별의 문제, 즉 페미니즘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도 앞서 말한 선생님의 문제와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높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강제로 짓밟아 끌어내립니다. 그로인해 서로 싸우고 갈등하고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평등과 낮아짐이 정말 옳은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옳은 방법은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치신 방법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높은 자로서 먼저 자신을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종과 같이 겸손히 섬겼습니다. 높은 자가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낮은 자를 높여주어 섬긴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보며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목사와 전도사가 더 섬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와 전도사가 먼저 희생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참 듣기 좋으시죠? 아주 제 설교가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4절 하반절에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바로 여기서 세상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른 점이 또 드러납니다. 제가 앞서 세상은 강제, 예수님은 자발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은 높은 자만 낮추는 것이고 예수님은 모든 자가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결코 높은 자들이 낮은 자의 발을 씻어주라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높은 자신도 낮아질 수 있으니 너희는 서로 낮아지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 교회의 목사, 전도사만 낮아지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도 낮아지고 희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세상의 영향을 받아 목사와 전도사만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평등을 부르짖으며 성도들의 영향력과 힘을 키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성경은 높은 자를 낮은 자로 낮추고 낮은 자가 높아지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자가 낮아지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목사나 전도사를 판단하신 분이 있다면 그분은 더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다른 높은 자가 낮아지지 않는다고 비난하셨다면 비난하신 당사자부터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낮아져 섬기라고 명령하셨지 다른 사람만 낮추고 본인은 대접받으라고 한 적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슷한 예로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고 남을 돌봐주지 않고 챙겨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가 자신을 신경써주고 챙겨주고 높여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일부만 이상하게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에게 받기 전에 먼저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먼저 남을 섬기고 섬기지 않는 사람을 권면해야지 자신은 섬기지도 않고 섬김 받고 싶어서 섬기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 16-17절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서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먼저 종과 같이 남의 발을 씻어주는 것처럼 희생하여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제가 여러분에게 칭찬하고 싶은 것은 목사님을 잘 섬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담임 목사님의 사역과 생활을 위해서 청소, 식사, 기타 업무 등 많은 것을 돕는 것을 잘 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목사님이 더 높은 분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서로 섬기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목사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남이 섬기지 않는 것을 비난하기보다 내가 먼저 섬기는 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먼저 내게 있는 특권을 내려놓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담임 목사님의 훌륭한 가르침 덕분에 이러한 문화와 행동은 아주 잘 숙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마음과 생각이 아직 성경적이진 않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잘 감당하시되 섬기는 이유가 예수님의 명령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오늘 17절에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우리 모두 먼저 낮아져서 남을 섬기고 복을 받는 우리가 되기 바랍니다.
결론
이제 곧 있을 6월의 대선 문제로 대한민국이 소란스럽습니다. 각 당의 대표 문제, 선거 운동 문제로 인해 뉴스와 유튜브가 조용할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제가 알기론 이제 대선에 나올 후보들은 어느 정도 정해졌고 이제 곧 선거운동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제 선거 운동으로 저 박달 사거리를 비롯해서 시끄러울 텐데 우리가 선거 운동 때마다 보는 광경이 무엇입니까? 여러 모습이 있겠지만 대통령 후보들이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너도나도 높은 자리에 있지만 낮은 자를 섬기는 자세를 보여주겠다고 시장에서 인사를 하고 다닙니다.
저는 아마 이런 정치인들의 전략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모습에서 나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겸손하고 낮은 자세를 가진 것처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잘 알다싶이 이들은 실제로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당선이 되는 순간 원래의 고압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정치인처럼 일시적인 퍼포먼스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처럼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것을 십자가 죽음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라가시를 축복합니다. 일시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정치인이 아니라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하신 예수님을 따르시기 축복합니다. 그럴 때 그 섬기는 자들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되어서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와 대한민국을 이루는 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런 교회와 나라를 세워나가시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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