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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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
나훔
먼저 나훔이라는 예언자는 여러분이 아마 생소하실 것 같습니다. 사실 나훔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 없기 때문인데요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니느웨에 대해서 경고를 하는 엘고스 사람이라고 하는 것 외에는 저희가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습니다. 먼저 엘고스라고 하는 이름도 저희가 이 나훔서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엘고스라는 것이 어떤 씨족, 민족의 이름인 건지, 아니면 나훔의 고향인 지명을 이야기하는 건지도 확실치가 않은데요, 저희는 다른 증거를 통해서 최소한 나훔이 언제 활동한 사람인지는 알 수가 있죠.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이 구절에서 몇가지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짚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여기서 등장하는 노아몬이라고 하는 것은 이집트의 주요한 도시인 테베를 지칭하는 다른 말입니다.
사진을 보시면, 이집트의 나일강을 쭉 따라서 내려오다보면 있는 곳이 바로 테베라고 하는 지역인데요,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집트에서도 굉장히 남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또한 9절에 등장하는 구스라고 하는 이름은 이집트 제25왕조 였던 쿠시 왕조, 누비아 왕조라고도 불리는 파라오의 통치기간을 뜻하는 것인데요,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바로 이 구스, 쿠시 왕조는 이집트 최초의 흑인 파라오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을 보시면 이 구스를 에티오피아로 번역을 했는데, 이 당시의 이집트 파라오가 흑인 파라오였음을 좀더 강조한 번역입니다.
아무튼 이 때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바로 앗수르의 아슈르바니팔이라고 하는 왕이 기원전 663년에 이 이집트의 테베까지 진격해서 함락을 시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는 오른쪽 저 위에 있고, 테베는 왼쪽 아래 저 멀리 있는데 저 머나먼 길까지 원정을 떠나서 이집트를 함락시켰습니다. 또 이 사진은 아슈르 바니팔의 테베 정복을 그린 부조인데요, 자신들의 업적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이 아슈르바니팔이라고 하는 왕은 앗수르의 마지막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었습니다. 살벌하게 사자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 사자를 사냥하는 스포츠를 즐기기도 했을 만큼 개인의 무력또한 굉장히 강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훔에서도 앗수르왕을 표현하기를 사자에 빗대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또한 한가지 주요한 특징중에 하나는 세계 최초의 도서관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진을 보시면 지금 영국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엄청나게 많은 유물들이 있는데요, 저것들을 포함해서 굉장히 거대한 부조들이 전부 이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이라고 하는 세계 최초의 도서관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슈르바니팔 왕은 전세계 어느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가 없는 세계 최강의 왕이고 또한 도서관을 최초로 세워서 자신들의 지식과 승리를 보전하고자 했던 지혜마저 겸비한 왕이었다는 것을 저희가 알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슈르바니팔 왕도 역시 앗수르의 왕이었는지 굉장히 잔혹한 왕이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전쟁을 일으켜서 정복을 한 것도 그렇지만 굉장히 잔혹하게 포로를 살해했고, 특히 반역자들에 대해서는 아주 끔찍한 일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화면에 보이시는 기둥은 아슈르바니팔의 업적에 대해서 남긴 쐐기문자 기록인데요, 아슈르바니팔 왕이 어떠한 일을 행했는지 아주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기록 중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는데요,
𒌦𒈨𒌍 𒂗 𒄭𒋾 𒀭𒉡 𒃲𒁕 𒂊𒈪𒁕𒋗𒉡𒋾 𒁉𒉡𒀭𒉡𒋗𒉡 𒀉𒁍 𒆪𒈨𒌍𒋗𒉡 𒀸𒄷𒌅 𒌑𒈾𒆠𒊓 𒍜𒈨𒌍𒋗𒉡
“죄를 지은 자들에게 나는 혹독한 형벌을 내렸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파괴하고, 피부를 벗기며, 살을 잘게 썰고 도려냈다.”
라고 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형벌을 내렸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죄를 지은 자들이 정말 범죄한 사람을 의미하기 보다는 자신이 다스리는 영역 안에서, 혹은 영역 밖에서도 감히 자신에게 반기를 들어서 치려고 했던 이들에 대한 복수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대적하면 나는 혹독한 보복을 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비문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죠.
나훔 선지자는 바로 이 힘과 지혜를 겸비했지만 잔혹했던 아슈르바니팔 왕의 시대에서 활동한 예언자로서 이 강대한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이라고 하는 말도 안되는 예언을 행했던 예언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나 더디 진노하심
하나님은 진노하시나 더디 진노하심
그 나훔이 대체 무슨 말씀을 전했을까요? 먼저 나훔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선포하는 말씀을 전합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먼저 나훔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하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고 진노하시고 보복하는 하나님이시다. 특히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어디서 들어본 말 같지 않으신가요? 바로 앞서서 말씀드린 나훔 시대의 아슈르바니팔 왕이 바로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아주 잔혹하게 보복했던 왕이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런데 나훔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슈르바니팔 왕과 같이 질투하시고 진노하시는데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나타내고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잔혹한 앗수르의 왕과는 명확하게 다른 면이 한가지 가지고 계십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고 화를 내시기는 하는데, 그것을 더디하신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것을 요나서를 읽을 때 이미 확인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대해서 막 화를 내면서 말했던 내용이 있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도 회개함으로 인해서 용서를 받았다라는 것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나훔에서는 그렇게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께 한가지 더 속성을 이야기하는데요,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벌 받을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즉 절대로 죄 지은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앞서 이야기한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과는 반대되는 말씀, 다시 하나님께서는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슈르바니팔 왕의 행적,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거침없이 보복했던 행적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유다를 괴롭히는 행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북 이스라엘은 이미 이 시점에서 멸망한 지 60년이 흐른 시점이었지만 여전히 앗수르와 아슈르바니팔 왕에 의해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과 함께 고발한다 하였더라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 때에 북이스라엘 자손들 중에 오스납발, 즉 아슈르바니팔 왕에 의해서 멀리 이주되어진 자들의 자손이 유다 사람들이 성전을 재건축하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면에서 언급되는데요, 이미 멸망한 이스라엘이었지만 그 백성들은 당시에 이리저리 강제 이주를 통해서 고통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구요,
유다 백성들의 경우는 영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유다의 왕은 므낫세 왕이었는데, 열왕기나 역대기나 이 므낫세 왕을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틀어서 아주아주 극악한 왕으로 표현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그런데 사실 므낫세는 왕으로서 무려 55년이나 통치한 사람입니다. 이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모두 통틀어서 가장 오랜 기간 통치한 왕입니다. 어떻게 보면 유다 왕국에 있어서 오히려 성군으로 칭송받아 마땅할 텐데 성경에서는 극악무도한 왕으로 표현하는 것이 이상하죠?
이것은 므낫세가 앗수르에 그 어떤 왕보다도 충성했던 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성경에서는 이방 사람들의 우상을 섬겼다, 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앗수르의 이방신들을 섬긴것, 즉 몸과 마음과 영혼을 모두 앗수르에게 가져다 바친 왕이라는 것을 묘사합니다. 앗수르가 자기들의 속국에게 따로 종교를 강요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므낫세 왕은 자발적으로 앗수르의 신들을 섬기면서 더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사실 므낫세의 치세는 그 어느때보다도 안정적이고 편한 생활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죽어가고 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북이스라엘은 물리적인 고통을 받고, 남유다의 백성은 영적인 고통을 받게 만든 앗수르, 특히 그 수도인 니느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절대 벌 주기를 멈추지 않으신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진노하시나 여전히 선하신 하나님
진노하시나 여전히 선하신 하나님
또한 나훔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은 화만 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나훔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두가지 상반된 모습, 진노하시고 보복하시는 모습과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모습이 동시에 등장합니다. 저희가 요나서를 보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지만 “뜻을 돌이키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훔서에서 고백하는 하나님은 절대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진노하고 계시면서 지금 선하시고, 지금 보복하고 계시면서 지금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누가 감히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겠느냐?하나님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리라, 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환란 날에 산성이 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요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하나님을 전할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아슈르바니팔 왕이나 므낫세 왕과는 명백히 다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슈르바니팔 왕은 보복하는 왕이지만 선한 왕은 아닙니다. 자기에게 거스르지 않는 속국에서 사람과 돈을 착취하고, 포로를 학살하는 왕이었습니다. 물론 앗수르 사람들에게는 좋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서에서도 보았듯이 용서를 구하는 이들에게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과는 다르게 완전히 반대자들을 없애버리는 왕이었지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왕처럼 보복하지 않고 순응하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잘못된 것에 분노하고, 대적하는 이들에게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입니다.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므낫세 왕의 시대에서 앗수르 왕에게 아주 깊이 순종하고 나라를 편하게 다스리는 것은 큰 유혹일 것입니다. 백성을 평화롭게 잘 다스리는 것이 왕에게 좋은 덕목이라고 속이며 악을 꾀하는 사람이 사악한 것을 권할 때에 그것에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그래서 유다에게 악한 것을 권하며 괴롭게 하는 앗수르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멸절시키리라, 보복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영적인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 앗수르의 모든 우상들을 멸절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이 우상과 신전을 멸절하는 일은 승전 국가가 으레 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우리가 믿는 신이 너희의 신을 이겼다라고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죠. 기원전 612년에, 바벨론이 앗수르에 반란을 일으켜서 니느웨를 멸망시키고 그 이후에 계속해서 주요 도시들을 파괴하면서 앗수르는 니느웨의 멸망을 시작으로 정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원래는 이 승기는 바벨론의 신들이 가져갔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이겼으니 우리의 신이 더욱 강하다! 라고 선포할 수 있는 것인데, 나훔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나 여호와가 명령하여 앗수르의 우상들을 파괴하였다”라고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복하시고 또한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이제 영적인 방황과 고난을 끊어버리고 다시금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권면하고 계십니다. 본문말씀 15절을 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볼까요?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유다의 구원도 무조건적인 구원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앗수르가 멸망할 것은 필연적이지만, 동시에 유다의 영적인 회복이 일어나지 않아서 바벨론이라는 또다른 제국이 나타나 유다역시 멸망하게 됩니다.
탈식민주의
탈식민주의
이처럼 나훔 선지자의 예언과 그리고 실제로 니느웨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멸망하였다는 역사를 저희가 알아보았습니다. 앗수르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던 아슈르바니팔, 저 머나먼 티베까지 진격하여서 자기의 영토를 늘리고, 한편으로는 속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최초의 도서관을 세울 정도로 존경받는 왕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보복으로 인해서 이 니느웨는 멸망으로 향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황은 꽤 절망적이죠? 결국 유다 역시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인해서 결국엔 바빌론이라는 또다른 제국에 의해서 멸망하고, 70년간의 포로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예배의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니느웨를 멸망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지만 유다의 온전한 회복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날에는 이런 제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는 없습니다. 강력한 황제가 넓은 영토를 지배하면서 속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형태의 제국이 없다는 이야기죠. 하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제국은 존재합니다.
어떤 분들인 지금 지구상에 가장 강력한 두나라, 미국과 중국의 대립과 무역전쟁을 보면서 제국을 보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오늘날의 제국은 그저 나라의 형태로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신용카드, 체크카드 같은 것을 일체 쓰지 않는다고 하시는 분 계십니까? 휴대폰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날의 제국은 나라의 형태도 있지만, 기업의 형태로, 또는 다른 여러 권력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말 이제는 휴대폰 없이, 카드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만큼 저희 생활에 너무나도 편리한 것들이 주어지고 저희는 요금을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데요. 누군가는 그저 기업과 소비자의 관계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도 이번 SKT 사건을 겪으면서 느낀 것은 과거의 제국들,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와 같은 제국들은 힘의 원리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제국들은 돈의 원리로 사람들을 포로로 삼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구나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당장 은행 다 해지시키고, 휴대폰 해지시키라는 거냐? 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국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노하고 보복하는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시는 선하시고 자비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절기를 지키고 서원을 갚는 자들,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그런 제국들에 굴복해서 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과거에 존재하는 모든 제국들이 멸망했던 것과 같이 이세상의 기업들이든 나라가 됐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는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지난 사순절에 새벽기도 때에 요한계시록 말씀을 읽어보면서도 보았듯이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가게 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모든 우리를 육적으로 심적으로 영적으로 괴롭게하는 제국들은 스러지고 사라지지만 남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만 남는 것입니다.
결론
결론
혹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지게 되는 편안한 것들, 휴대폰이 되었든지 카드가 되었든지 자동차가 되었든지, 우리가 이것에 종속되어서 제국의 포로로 살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저도 참 최근까지 휴대폰에 매몰되어서 살았던 순간들을 되돌아보면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하지 못했던 앗수르왕과 같은 제국에 므낫세 왕처럼 이미 물들어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 앞에서 이것은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게 되는 것,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하나님의 성도들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해나가야할 일들입니다.
본문말씀 15절을 다시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회복하고 나아갈 때에 우리를 영적으로 괴롭게 하고 물들게하는 제국에 굴복하지 않고, 그들이 저희로 통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다시한번 다짐하며 나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