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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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거짓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서론]
제가 영국유학시절 미얀마에서 온 친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한국 드라마 ‘주몽’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미얀마에서는 하루 종일 한국드라마가 텔레비전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심코 “우와 좋은 나라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이게 다 나라가 국민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려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고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나라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나라도 군부독재시절 그랬습니다.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기 위해 세가지 사업을 적극 장려했습니다.
3S 정책인데요.
하나가 스크린이고, 두번째가 스포츠이고, 세번째가 섹스(성)입니다.
이런 것들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딥페이크와 같은 인공지능기술의 발달로 도대체 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는 시대가 왔습니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동영상 알고리즘은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실제로 코로나 시절에는 백신을 맞으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악마의 표인 666 코드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중에도 백신을 맞으면 악마의 코드를 받는다고 여겨 끝까지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얼마전에는 말도 안되는 중국간첩이니 부정선거니 하는 거짓 뉴스가 나라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또한 요즘 수많은 젊은이들이 점술과 무속에 빠지는 현상도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방송에서도 태연하게 무속인에게 점을 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그 말에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거짓을 따르는 길은 파멸로 이끈다고 경고합니다.
이렇게 거짓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첫번째 본론]
지난주 우리는 시편 119편의 일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119, 우리 인생의 119가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은 시편 119편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지난주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시를 쓴 시인의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시인은 악인들의 음모와 모함으로 인해 심한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161절입니다.
“권력자는 이유없이 나를 핍박하지만, 내 마음이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시인은 억울하게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권력자는 거짓과 음모를 꾸며 시인을 세상에서 매장시키려고 합니다.
분명 시인이 권력자의 압력과 요청에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은 거짓과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악한 권력은 항상 거짓을 도구로 삼습니다.
그 뒤에는 ‘거짓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인류 최초의 죄가 발생한 에덴동산을 보십시오.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아담과 하와를 속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문제가 된 사람들도 거짓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보며 오히려 평안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전한 거짓 복음은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또한 ‘천로역정’을 보면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크리스천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이름이 바로 거짓, 속임수, 외식(위선)입니다.
특히 위선은 겉과 속이 다른 거짓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에 불과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스스로도 속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위선이 계속되면 거짓 자아가 참 자아를 점령해버리는 상태가 됩니다.
우리가 이런 거짓에 잘 속지 않을거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아주 정교합니다.
사탄은 ‘거의 진실에 가까운 거짓’을 전달합니다.
95퍼센트 진실에다가 5퍼센트 거짓을 섞어 사람들을 속입니다.
또는 의도적으로 진실의 한 부분만 강조해 전체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도 거짓입니다.
예를들어, 하나님의 사랑만 전하고, 하나님의 정의는 전하지 않는 것은 거짓입니다.
기도만 열심히 하면 잘살고 성공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입니다.
신앙을 너무 단순화시켜 다른 면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거짓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권력자의 모든 거짓에 대해 복수로 응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말씀을 붙들겠다고 고백합니다.
권력자보다 오히려 말씀을 두려워하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두번째 본론]
시인이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65절입니다.
“주님의 법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평안이 깃들고, 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습니다.”
보통 거짓이 나를 덮치면 분노하거나 두려워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반응은 다릅니다.
시인은 어떤 거짓이 자신을 덮쳐도 평안함을 느낍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어떤 거짓도 자신을 넘어뜨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시인이 그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두려움 속에서도 마음에 말할수 없는 평안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될데로 돼라지~’식의 자포자기가 아니라 믿음과 확신가운데 느끼는 평안함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도 한치 앞을 내다볼수가 없습니다.
기후 위기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라는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습니 다.
사회는 각 계층간의 극한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세상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너무 빠르게 변화되어 갑니다.
여기서 뒤쳐지면 사회적으로 낙오자가 될 것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혼란스러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때 시인이 붙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거짓이 난무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진리가 아니었다면 성경은 사라지거나 시대에 맞춰 변형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경말씀은 진리입니다.
이런 점에서 말씀은 마치 부모님 사랑을 닮아 있습니다.
오늘이 어버이 주간인데 말씀말고 변하지 않는 한가지를 더 뽑자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의지할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의 사랑이 언제나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살아계실때까지만이라는 유통기한이 있지만 사랑 자체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못나고 실패했어도 부모님은 나를 조건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만나면 우리의 마음이 평안한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나혼자산다’에서 박나래씨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있으면 뭔가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뭔가 하지 않으면 자신이 도태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향인 목포만 오면 그건 마음이 싹 사라진다고 합니다.
너무 마음이 편해 잠을 엄청 자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거기에는 나를 무조건 받아주시는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런 마음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 참된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본론]
시인이 말씀을 붙들때 평안을 느끼는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 그 자체를 하나님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말씀은 단순히 삶의 지침이 아닙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기록된 말씀을 통해 생생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현재 시인의 상황이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악한 권력자들의 압박과 핍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마지막 구절인 176절입니다.
“나는 길을 잃은 양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시인도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막막한 현실 앞에서 때로는 길을 잃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말씀 앞으로 돌아와 다시 하나님을 붙듭니다.
말씀을 하루 일곱번씩 찬양하며 말씀을 붙듭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나를 건져주십시오.”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를 찾아주십시오.”
정의의 말씀들을 붙드며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모든 거짓을 드러내시고 심판하시리라 믿는 것입니다.
거짓을 씌워 누군가를 괴롭히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몇 배로 갚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직접 복수하는 것을 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복수해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거짓때문에 억울한 일들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일을 겪으면 정말 잠이 안 오고 자면서도 눈물이 나더라구요.
얼마나 억울한지 미치겠더라고요.
그러나 그때 우리는 직접 복수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믿음이 시인의 평안의 비결입니다.
거짓과 고통 속에서도 마음의 중심만큼은 흔들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시편 119편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참된 평안의 비밀을 보았습니다.
시인이 거짓과 핍박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두가지 입니다.
첫째, 그는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거짓이 판을 쳐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며 기다릴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거짓이 진실을 가장해 우리를 속이는 시대입니다.
무엇이 옳은 지 혼란스럽고,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길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삶입니다.
거짓이 넘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말씀을 지키다가 억울한 일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를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을 붙들고 실천하며 거짓된 세상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