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설교 : 성도의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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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15-22
마태복음 22:15-22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서론
서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보면 받는 질문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보면 받는 질문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를 다닌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시인한 것은 대학시절 20살이 되어서였습니다.
제가 올해로 마흔이 되었으니, 우연치 않게 20년은 믿음없는 썬데이 크리스천으로, 또 20년은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크리스천으로 살아왔는데
그러다보니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몇 가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뭐 몇 가지만 있겠습니까. 많겠죠. ㅎㅎ
그 중에 제가 가장 크게 느낀 차이점은, 크리스천답게 사는 크리스천은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대충 사는 크리스천으로 살 때는 누구도 저에게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나 나나 똑같았으니까.
그런데 크리스천 답게 살려니 친구들은, 동료들은 궁금한거에요.
“왜 이렇게 까지 하는지.”
내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사실 이렇게 고상하게 묻는 경우는 거의 없고, 보통은 이걸 이렇게 표현하죠.
“니가 니 눈으로 하나님 봤나?”
안타깝지만 이 질문들이 진리에 대한 순수한 탐구이거나, 믿고 싶은 갈망에서 비롯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비난에 가깝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부활을 믿는 우리가 이상한 것이죠.
그래도 괜찮습니다.
제 주위 친구나 동료들의 비난이 섞인 신앙에 관한 질문은 저에게도 부담이었지만,
저에게는 제 안에 있는 복음을, 소망을 나눌 간증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런 질문을 했던 분들 중에는 지금 저의 기도의 동역자가 되어주신 분들도 있습니다.
전도 대상자가 알아서 찾아와 물어주는 삶이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처럼 믿음이 삶에서 티가 나는 성도들은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된다.
예수님이 받은 도전
예수님이 받은 도전
예수께서도 이런 도전적인 질문들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특히 랍비나 스승들에 대한 이런 질문들이 결코 낯설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스승에 대한 도전들이 마치 흥미로운 문화이자 게임처럼 여겨졌습니다.
“야, 옆 학교 짱이랑 우리 학교 짱이랑 싸운데!” 그러면 전교생이 몰려가 누가 이기나 구경하는 것처럼.
존경받는 스승이, 그 권위에 대한 도전자들이 질문으로 던지는 원투 펀치를 격파하는 대결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혜롭게 응수하는 스승은 명예가 더욱 높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명예가 실추되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받은 질문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서 전체로 보자면 총 30번 정도 등장할 정도입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사두개인들과의 부활 논쟁이나, 가장 큰 율법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 온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악의적인 도전
악의적인 도전
그러나 오늘의 도전은 그 어느 때보다 악의적입니다.
15절에는 도전자 바리새인들의 의도가 명확히 나오는데, 그들이 원한 것은 예수님이 말의 올무에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하면 그 명예를 무너뜨려 말씀의 권위를 없게 할까,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말에 넘어져 감옥에 갇히게 할까 하는 것이 그들의 바램이었습니다.
감옥에 바로 가둘 수 있게 헤롯당원들까지 동반해서 말입니다.
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가, 선지자인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스스로 무너지기를 바라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비열함은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기 앞서 하는 칭송의 말에서 오히려 명확하게 보입니다.
그들은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예수에 대한 교묘한 칭찬
예수에 대한 교묘한 칭찬
이 칭송을 분리하면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칭찬입니다.
그들이 이런 칭찬을 하는 것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답변이 율법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함부로 한 쪽 편을 들지 않는 공명정대한 사람이라는 칭찬입니다.
이것은 만약 예수님의 답변이 정치적으로 치우쳐져 있다면 그걸 빌미로 공격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두 칭찬은 논리적으로 예수가 빠져나갈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답변을 내놓더라도 다른 한 가지에 걸릴 수 있도록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이것은 지극히 정치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종교적 진리를 선택하면 정치적으로 사로잡히게 됩니다.
정치적 중립을 선택하면 종교적으로 비판 받게 됩니다.
아주 교묘한 함정이 그들의 질문에 숨어있었습니다.
그 함정을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첫 번째 함정, 명예로운 반역
첫 번째 함정, 명예로운 반역
만약 예수님이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했다면 어땠을까요?
언뜻 보면 그런 대답은 참 명예로운 대답처럼 보입니다.
마치 일본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은 독립투사들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런 주장을 하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유대 백성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 로마에 바치는 세금은 유대인들과 특히 로마의 지도자 양쪽 모두에게 무척 민감한 주제였습니다.
예수님 탄생하셨던 쯤인 AD 6년 경에는 갈릴리 출신의 유다라는 사람의 반란이 있었는데,
이 반란이 바로 로마에 바치는 세금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세금을 낸다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로마황제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비겁한 행동이라며 유대인들을 선동했습니다.
갈릴리 유다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남아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열심당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력 투쟁으로 독립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연관된다는 것은 로마에 반역자가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갈릴리 출신이었기에, 만약 로마에 내는 세금 정책을 반대한다면 반역자 갈릴리 유다와 연관되어 생각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대중들은 예수님의 말에 또 다시 열광할 것이고, 바리새인들과 함께 간 헤롯당원들은 옳다구나 하고 예수님을 잡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명예를 위해 로마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대답이 오히려 반역과 실패라는 수치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함장, 수치스러운 굴종
두 번째 함장, 수치스러운 굴종
그렇다고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해 찬성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바리새인들이 헤롯당원들도 데려오고 칭찬으로 함정까지 파놓은 것을 보면
예수님이 세금을 반대하고 잡혀가기를 기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찬성하여 잡혀가지 않는다고 해도 바리새인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시키러 오셨다는 예수님이 가이사를 섬겨야한다고 말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아주 수치스러운 타협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과 이교도 점령국인 로마에 대한 충성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로마 황제를 지지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독립을 이끌 메시아라고 믿는 추종자들이나,
유대 민중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세금은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으로 납부하였는데,
이 화폐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완전히 어기는 형태였습니다.
한 쪽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세겨져 있었는데, 그 밑에 신이 내린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라는 글씨가 함께 세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대 제사장이라는 문구가 쓰여있었습니다.
사람의 형상을 동전에 세긴 것이나, 두 문구 모두 유대인의 신앙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명예롭게 죽느냐, 수치스럽게 사느냐,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한 장면 같이…
예수님은 이제 명예롭게 반역자가 될 것인가, 수치스럽게 하나님의 도를 버리고 굴복하는 스승이 될 것이가의 도전 앞에 서게 되셨습니다.
만약 우리라면?
만약 우리라면?
그에 비해 우리 앞에 놓여진 질문들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요.
제가 술자리에서 믿음으로 술을 거절했을 때,
그 선택으로 받게된 대가는 그저 ‘술 안마시는 재미없는 녀석’이라는 평판 뿐이었습니다.
제가 사역자의 길을 믿음으로 선택했지만,
그 선택으로 받게된 대가는 부요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봤을 때도 꽤 괜찮은 삶이었습니다.
어쩌면 믿음을 저버리며 얻을 것이 고작 조금 더 안정적이고, 조금 더 인정받고, 조금 덜 미움 받는 것 뿐이어서 쉽게 믿음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믿음이 좋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믿음을 선택해도 목숨 걸 필요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죠.
물론 믿음의 길을 더욱 쉽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입니까?
다만, 쉽게 믿음을 선택할 수 있다보니 오히려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인 것과 동시에
이 땅에도 속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로써는 잘 살아가지만, 오히려 이 땅에 속한 자로서의 삶은 소홀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두 가지 함정 중에 한 쪽 함정만을 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사역자로 살아가는 제 삶은 더욱 그랬습니다.
전도사로 살아가는 제 주변은 어느새 거의 다 크리스천만 남아있습니다.
CCC 사역에 안식년을 맞아 신학 대학원에 들어가니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다들 크리스천입니다.
다들 믿음 안에 있기 때문에 저 또한 믿음을 선택하는 것에 아무런 부담이 없고,
오히려 믿음이 아닌 것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사회적으로 부담스러워졌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질문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을 만나지 않으니, 제 믿음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고민해보니 답은 명확했습니다.
저는 이 땅에 속하여 복음의 영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예수님의 대답
예수님의 대답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바리새인들의 한 가지 질문에 두 가지 도전이 포함되어 있다면,
예수님의 답변 또한 두 도전에 대해 모두 응수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딱 그러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시며
로마에게 바치는 세금을 인정하십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한다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언뜻보면 명에를 버리고 수치를 선택한 답변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사용한 ‘바치라’와 예수님의 ‘바치라’는 번역은 똑같이 되었지만 의미가 조금 다른데, 바리새인은 주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한 반면에 예수님은 ‘돌려주다’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즉, 세금이란 로마와 가이사에게서 나온 것, 받은 것들, 화폐 뿐만 아니라, 지배국으로서의 행정과 보호에 대한 정당한 반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는 뒤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께 돌려주고, 가이사에게 받은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답변을 통해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성도의 명예를 지키셨을 뿐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국가에 대한 개인적 책임에 대해서도 성실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 것과 가이사의 것은 단순히 대비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로마황제 가이사 마저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하나님께로부터 그 존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 가이사로만 표현했지만, 모든 나라와 권세 위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있음을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에, 권세를 거스르는 자가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국가의 권세에 대한 성실함이 하나님의 나라의 충성과도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로마 황제에 대한 수치스러운 굴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선언인 것입니다.
도전이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다.
도전이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다.
예수님은 세금에 대한 아주 난처한 질문, 예수님의 명예에 대한 도전을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기회로 전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예를 공격하는 자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하게 하는 놀라운 응답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도전에 대해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갑시다.
세가지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 째, 나의 명예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께의 영광이 곧 성도의 명예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 째, 이 땅에서의 삶을 소홀히 하지 말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맡겨진 청지기의 삶임을 기억합시다.
셋 째, 우리를 향한 도전에 대하여 대답할 말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드려는 공격과 도전 오히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믿음과 명예의 도전들을 회피하거나, 그 엄중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수치를 모르는 명예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삶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신앙적 이상주의자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의 명예는 깨끗하고 거룩한 곳에 고귀하게 앉아 있는 것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흙탕 같은 세상에서 끝없이 거룩과 명예의 도전을 받으며 응수해 나갈 때 비로소 지켜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명예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드리는
명예로운 천국 백성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