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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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심판 그 너머

(여백과 성경 그래서 공부의 필요성 그동안 글자 중심문화)오늘 제목은 좀 철학적인 의미를 담아 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한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4개월간 계속된 설교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과 말씀을 떠난 백성들에 대한 심판이 앗수르라든지 바벨론이라든지 신흥 제국의 전쟁으로 망한다는 예언이 오늘 우리 시대에 적학하게 맞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꽤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섣부드게 현상적으로 해석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럴듯 하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일 하심을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걸 무시한 채 끼워 맞추듯 한다는 것이죠. 욥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욥기 38:2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새번역에서는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라고 묻습니다. 39장에서는 ‘너는 산에 사는 염소가 언제 새끼를 치는지 아느냐? 들사슴이 새끼를 낳는 것을 지켜 본 일이 있느냐’라고도 물어 보십니다.
우리는 미가서를 제일 먼저 살펴 보았습니다. 현대의 학자들이 연구를 하면서 미가서를 중심에 두고 양쪽의 내용이 서로 짝이 맞도록 구성되었음을 연구 결과로 내놓았습니다. 저도 이렇게 살펴보는 방식이 매우 설득력 있다는 것입니다. (표) 특히 신약에서 복음서와의 연결성도 대단히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요한복음에 이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내용이 소선지서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살펴볼 아모스서는 심판의 메시지가 더 강하게 드러나지만 구원의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심판의 의미와 우리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들었습니다. 비록 내가 어떠해야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바에 대한 믿음이라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심판에 그 너머를 보는 것이 우리에게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심판을 통해 드러나는 ‘공정성하심’ 까지는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내면에 ‘저건 나쁜 것’이라고 보편적으로 규정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상태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심판하면 우리는 영화 중에서 범죄 도시와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12.3 내란을 통해 심판은 현실에서 그런 식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범죄 도시나 더 글로리와 같이 나쁜 짓에 상응하는 보복의 개념을 심판으로 이해한다는 것이죠. 그런 심판을 ‘공정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최근에 내란에 관련된 사람들을 재판하는 과정을 공개하지 않고 비밀리에 한다는 뉴스였습니다. 우리는 심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심판의 ‘공정성’에는 ‘공연성’이 포함되어 있다/ 내재되어 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미가서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하여지자 이를 본 이방인들은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라고 했던 표현 말입니다. (성구)
심판이 공정하게 드러나자 이를 보고 사람들이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우리 내면의 보편적 양심이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저 판결이야 말로 공정하다. 정말 그런 공정한 심판이 일어난다면 나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하면서 사람들이 공연성 즉 드러내고 그곳으로 모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아모스와 스바냐에 이은 요엘과 스가랴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계속해서 연결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심판이 그렇다해도 심판만 이야기 한다면 사람들은 이내 두려움에만 사로 잡히게 될 것입니다. 눈치를 보고 피해다니고 마음에는 혹시 나도 심판 받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오히려 함께 걸어가자 하지만 두려움에 사로 잡히면 우리의 몸은 움찔움찔 놀라는 반응을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공정성과 공연성을 경험한다고 해도 우리 마음 한편으로 내적인 무서움으로 인한 두려움의 상태 또는 일종의 트라우마의 상태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온전히 기뻐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겠습니까? / 구원은 두려움에서 시작은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기쁨으로 끝나야 하는 것을 하박국에서 보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몰랐던 것이죠.
그래서 소선지서를 시작할 때 호세아서는 상처 그 자체인 고멜이라는 여인과의 관계를 치밀하게 다룹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는 치료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간혹 교회 오랜 분들이 아픈 환자를 위해 기도할 때에 ‘치료의 광선을 발하시는 여호와 라파’라고 사용하는 미사어구가 호세아서에 등장을 하는 것이죠. 호세아서에서 우리가 내면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호세아 9:8 “8 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모든 길에 친 새 잡는 자의 그물과 같고 그의 하나님의 전에는 원한이 있도다” 깊은 내면의 아픔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새 번역으로 보면 하나님은 나를 예언자로 임명하셔서 에브라임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예언자가 가는 길목마다 덫을 놓았다. 하나님이 계신 집에서 마저, 너희는 예언자에게 원한을 품었다. /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들으면 공포요 심판이니 아예 안듣겠다라는 것이죠.
말라기 3:14 “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는 표현은 그들의 노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봤자 소용없다고 들리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15절은 ‘이제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는 말은 현실에 초점을 맞춰 사는 오늘 우리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은 이렇게 끝이 나는 것입니다.
역사의 시간 순대로 읽었던 70인역 성경은 시간이 지나고 대략 4세기 정도에 정해진 지금의 성경 순서를 우리는 따르고 있습니다. 신약에 예수께서 오시고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는 그때에 성경은 읽는 사람과 전해야 하는 메시지를 따라 역동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12예언서를 들으면서 계속해서 미가서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미 6:6-8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공의를 행하고 인자와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요구가 앞서 1년 반동안 살폈던 예수님의 삶 그 자체로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다시 자녀를 삼은 우리에게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 가운데 발을 씻기며 하셨던 우리와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신 것이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다라고 말할 때 동행하는 삶의 궁극적인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담고 있는 것이죠.
흔히 기독인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면서 전도를 했지만 이제는 나 하나의 신앙으로 개인화 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시대가 변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믿는다’로 이어지는 과정을 신학적으로 말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믿음은 믿어지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구원 여정이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듣는 여러분들은 이게 무슨 말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공부가 필요하다는 식이면 사실 곤란한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믿는다고 말할 때는 오히려 보편적으로 읽고 듣고 생각하는 인지 과정을 통해서 각자의 마음에 동의가 일어날 때 믿어지고 믿어진 말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행동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은 해도 어떤 경우에는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누군가 아프다거나 또는 간절함이 발동해 ‘믿었다’로 바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보니 그런 분들이 소위 말해서 ‘믿음이 있다’고 보일지는 몰라도 결국은 끝은 휘어진 길이요 어디선가 끝난 길과 같은 것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천로역정의 마지막에 죽음의 강을 건너기에 앞서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자 절망에 빠지자 동행ㅎ하던 두 사람이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제 도울 수 없지만 강의 깊이는 이곳의 왕이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정도에 따라 깊을 수도, 얕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말 그대로 물에 빠져 죽는 공포와 싸웁니다. 이사야 43:2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요구는 공의를 행하고 인자와 겸손이 동행하는 삶이다. 시편은 1편에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따라가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선포하시며 고쳐주셨고 마지막 죽음의 강을 어떻게 건너시는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관계가 동일한 말씀이고 그러한 훈련과 미리 맛 보도록 하는 교회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죠. 마치 마트에서 맛을 미리 보여 줌으로 기대하고 물건을 구매하게 하듯 교회는 서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기쁨, 슬픔, 안타까움, 도와 줌 등 모든 것을 안전하게 누려보고 겪는 곳이라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그러한 교회도 무너졌고 이제는 마지막 보루로 여기는 가정까지도 그러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모스 : 피할 수 없는 심판 그리고 그 너머 / 다시 한 번 왜 12선지서를 이렇게 살펴야 하는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시간은 지났지만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작하는 몇 절을 집중하고자 합니다.
1절에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가 전한 말이다라고 시작하는데 우리가 잃은 개역개정은 이 정보를 뒷쪽에 배치해 두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순서는 달라집니다. 말 - 아모스-이다 순서로 명사, 명사, 동사 순서이죠. 히브리어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앞에 쓰는 경향이 매우 큽니다. 그러니 ‘말’이 중요하죠. 하박국에서는 ‘심판’이라는 명사가, 나훔에서는 경고가, 미가는 ‘하나님의 말’ 로 시작했습니다. 아모스에는 ‘아모스의 말’이 중요하게 나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말한 아모스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가 이어서 등장하는 것이죠. ‘드고아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처럼 이스라엘에 일어난 일의 계시를 볼 무렵이 왕에 대한 정보와 그때에 지진이 일어나기 이 년 전이라고 기록합니다. 먼저 드고아의 목자라는 표현은 우리가 읽기에는 목자라는 긍정적 단어로 계시 받았다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체적 표현이 앞선 다른 선지서와 달리 ‘말’ 즉 아모스의 말이다는 표현이 더 중요한 것을 염두해 두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 그가 목자였다라고 하면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아는 목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다른 구절에서 자신을 소개한 표현을 보겠습니다. 아모스 7:14 “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어떻습니까? 자기 소개에도 있듯 뽕나무를 재배하면서 한편으로는 목자로 요즘 말로 보면 두 가지를 해야 먹고 살 수밖에 없는 자기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의 ‘말’을 우리는 과연 신뢰하고 의미있게 여길 수 있을까요? 아모스는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모스라는 이름은 ‘무거운 짐진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었고 자기 생계에 두 가지 일을 해야만 했던 아모스의 이름처럼 생활에서도 무거운 짐진 자요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하는 면에서도 ‘무거운 짐진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아모스의 말’이라는 제목은 아모스가 하나님께 받은 말을 ‘자신의 말’로 전하는 의미는 내 생각대로 썼다, 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기록의 의미’에서 아모스서가 갖는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는 구두의 형식이라면 아모스는 받은 말씀을 글의 형태로 기록해서 전한 ‘아모스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북 이스라엘의 멸망전에 받은 말씀을 기록했다면 이 기록은 멸망 다음의 세대에게 알려주는 기록물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모스가 유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북 이스라엘에 가서 멸망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 이스라엘에 목자로 뽕나무 재배자로 살다가 비록 같은 민족이라고는 하지만 북 이스라엘에 가서 심판 메시지를 전하고 메시지의 내용이 기록되었다면 읽는 독자는 누구이겠습니까? 1차적으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북 이스라엘이겠지만 기록은 아직은 기회가 있는 유다 즉 남 이스라엘일 가능성이 큰 것이죠.
그리고 당시는 남유다가 웃시야가 왕이고, 이스라엘 즉 북이스라엘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은 명확하게 구분이 안되어 유다 왕, 이스라엘 왕으로 말하는데 아무튼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시대는 매우 번영한 때였습니다. 어느 정도냐하면 솔로몬 왕에 버금갈 정도인데 아모스 3:15 “15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렇게 궁이 겨울과 여름에 따라 다를 정도로 그것도 상아로 만든 정도라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아모스 6:1 “1

너희는 망한다! 시온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사는 자들아, 사마리아의 요새만 믿고서 안심하고 사는 자들아, 이스라엘 가문이 의지하는 으뜸가는 나라, 이스라엘의 고귀한 지도자들아!

지도자들의 그릇된 태도를 경고합니다. 물질에 의조낳면 결국 높은 산에 사마리아 성을 쌓아 안전하다고 믿게 됩니다. 좋은 동네로 이사가고 비싼 학원에 다니고 레벨 높은 학벌이 성공이라고 굳게 믿는 세상은 지금 너무나 견고하지 않습니까? 그나마도 서울대 법대를 나온 이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보여준 덕분에 엘리트 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는 있지만 과연 다음 정권이 이를 타파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까요? 여전히 그런 길이라도 가야 그나마라도 살지 않겠냐 하면서 나는 그런 길을 싫어하고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모스가 말하는 시대는 오늘 우리의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시 바랍니다.
비록 나라는 부국강병의 길로 갔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떠난 길이라면 그 길 끝은 패망이라고 하는 것을 일관되게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 그리고 2년 후에 있을 지진은 마치 심판이 지진처럼 모든 우리의 것을 집어 삼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모스가 선포하였다.
‘주님께서 시온에서 부르짖는다. 예루살렘에서 큰소리로 외친다. 목자의 초장이 시들고 갈멜산 꼭대기가 마른다’는 메시지로 시작하는 심판의 메시지는 누구라는 특정이 아니라 모두에게 임하는 심판임을 다시 한 번 아모스는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는 내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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