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7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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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편의 내용은 앞선 어떤 시편보다 심각하고 절망적인 기도다. 1절 시작부터 ‘이방 나라들이 주님의 땅으로 들어왔다. 성전을 더럽혔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돌무더기로 만들었다’고 시작한다. 그리고 5절에 ‘주님 언제까지입니까?’라는 기도는 아직 이렇다할 기도 응답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은 후반 12절에 ‘갚아 주십시오’라는 간구와 13절에 그렇게 할 때에 ‘감사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겠다’는 앞선 시편의 찬양 구조와는 차이가 있다.
심판에 대해서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의 큰 일임을 믿고 찬양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79편은 그렇게 해 주시면이라는 요구에 따른 찬양이라는 면에서 지금 상황의 고통이 극심함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패망인 기원전 586년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심각성은 2,3절에 확연히 드러난다. 시체(주검)가 새들의 먹이가 되고,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2), 사람들의 피가 물같이 흘러 예루살렘 사면에 넘친 다거나(3) 그로인해 소문으로 빠르게 번져 4절에는 이웃의 웃음거리, 조롱거리가 된 이스라엘의 모습은 불연듯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을 떠오르게 한다.
경제적 성장을 이룬 나라, 민주주의를 꽃피우던 나라에서 국제적인 언론 지수, 민주주의 지수 등 대표적인 수치가 모두 하락하고 이제는 마지막 보루에 서 있는 것 같은 극단적 고통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묘하게 겹친다. 이럴 때 기독인들은 ‘주님 언제까지입니까?’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 정치와 분리를 말하지만 기도는 그런게 아니다. 미가는 사람에게 하는 하나님의 요구가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인자(인애)를 따라 겸손히 행하는 삶을(의)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고 선언하고 이러한 심판은 에돔(옵), 앗수르의 니느웨(요나, 나훔) 그리고 바벨론(합)까지 예외가 아니라고 선언하신다.
앞서 78편 후반부에 여호와의 책망은 예루살렘 성소와 다윗의 선택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돌아보는 역할을 했다면 79편은 ‘하나님의 진노’는 성소가 더럽혀지고 돌무더기 즉 파괴되는 준엄함으로 나타난다 . 7절 그들은 야곱을 집어 삼키고 그가 사는 곳을 폐허로 만들었다. 전쟁의 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자의 울분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해석되어야 한다. 신자의 삶은 때론 넘어지고 깨지고 그래서 싸매기도 하면서 ‘주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나 넘어지고 깨지는 이유가 하나님의 도를 따라 사는(시편1, 의인의 길) 길에서 떠난다면 심판의 날 우리의 기도는 79편처럼 눈물과 고통의 기도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아끼시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주님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에게 던지신다. 마치 그리스도를 성난 군중에게 던지듯 말이다. (4) 보이는 부끄러움은 성전의 파괴요 주님의 성도들의 죽음일지 모른다. 그러나 5절에 부끄러움 보다 중요한 ‘주님의 진노하심이 불길처럼 타오’른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니 기도자에게 ‘기억하여, 긍휼하심, 영접하여, 비천하다’는 표현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기도의 단어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는 여전히 ‘비천한 상태’이다. 다만 하나님의 품 안에서 마치 주인의 부름을 받은 준비되지 못한 손님으로 보장 받을 뿐이다. 그렇기에 걸맞는 옷을 입으라는 요청은(마22:11-13, 사61:10)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내는 것이지만 79편은 쫓겨남을 당하는 현실의 심판을 기도자는 마주하고 있다.
시편 139:7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우리는 하나님을 피해 갈 곳이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기도해야 한다. 용서해 주세요. 고통 받는 신음소리를 주님께서 들어 주세요, 죽게 된 사람들을 주님의 능하신 팔로 살려 주세요(11). 대부분의 신자가 오랜 경력(?)으로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심판을 이야기하지 않고 심판을 향하여 걸어 가는 것도 아니라고 믿으며 에둘러 기도한다. 간절함에 처해 보지 못한 자는 간절함을 경험하지 못한 자이다. 기도는 그래서 신사의 모습으로 앉은 자가 아니라 나라를 잃고 자녀를 잃은 슬픔으로 땅에 앉은 자의 것이다.
우리는 다행히 시편 기자를 통해 간절함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우리 현실의 고통이 바로 내 옆에 있고 기도자들의 관심을 바라고 있다. 소금이 녹아 사라져도 짠 맛으로 소금의 있음을 증명하듯 세상에 녹아 없는 듯해도 올바름을 드러내는 관심으로부터 우리는 간절함의 짠 맛을 낼 수 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