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1-7) 성도라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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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첫머리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그 거룩한 정체성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도라 부르심”입니다. 이 시간, 2000년 전 고린도 교회를 향했던 메시지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성령의 조명하심 가운데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서론: 혼돈의 도시, 그곳에 보내진 편지
서론: 혼돈의 도시, 그곳에 보내진 편지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는 당시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지리적으로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으며,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서 경제적으로는 풍요했지만, 도덕적으로는 심히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혼재하며 우상숭배가 만연했고, 성적인 문란함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 세워진 고린도 교회는 놀랍게도 영적인 은사가 풍성했지만, 동시에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파벌이 형성되어 분열했고,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와 성도들의 삶을 어지럽혔습니다. 자랑과 교만이 넘쳤고, 심지어 근친상간과 같은 끔찍한 죄악이 용인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혼란과 문제의 한복판에, 바울은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책망과 질책으로 편지를 시작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교회”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첫마디에 이미 문제 해결의 열쇠가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누구인가? 너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바울은 그들이 처한 현실의 문제 이전에, 그들이 누구로 부름받았는지를 먼저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1. 거룩하여진 성도들에게 부르심 받은 사도가 보내는 편지
1. 거룩하여진 성도들에게 부르심 받은 사도가 보내는 편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1-2절).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의 사도됨은 자천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의 수신자인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도 동일하게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칭합니다. 여기서 ‘성도’(ἅγιος, 하기오스)라는 말은 ‘거룩한 자’,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들의 도덕적 완벽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죄 많은 고린도 교인들은 결코 성도라 불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성도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자격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룩하다고 인정해주시고, 구별하여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라는 호칭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용되어 그 의미의 무게를 잃어버렸습니다. 마치 교회 다니기는 하는데, 집사도, 권사도, 장로도 아닌 사람을 부르는 가장 가벼운 호칭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도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받은 자들, 세상의 가치관과는 구별된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과거 고린도 교인들이 직면했던 세속 도시의 유혹과 혼란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물질만능주의, 극단적 개인주의, 쾌락주의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과연 ‘성도’라는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고린도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발전된 문화를 누리고, 잘 살아서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즉 성도입니다.
2. 은혜와 평강을 바람: 모든 성도에게 필요한 영적 자양분
2. 은혜와 평강을 바람: 모든 성도에게 필요한 영적 자양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3절).
바울은 서신서에서 반복적으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닙니다. 은혜(χάρις, 카리스)는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호의입니다. 평강(εἰρήνη, 에이레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내면의 평안과 삶의 조화, “샬롬”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성도의 삶에 필수적인 영적 자양분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분쟁과 다툼, 불안과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 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지치고 낙심합니까? 예기치 않은 인생의 문제들 앞에서 얼마나 불안해하고 염려합니까? 세상이 주는 잠깐의 위로나 만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만이 우리의 영혼을 참으로 만족시키고 견고하게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은혜와 평강은 특정인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이 아니라,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약속된 보편적인 축복입니다. 당신에게 지금 은혜가 필요하십니까? 평강이 메말랐습니까? 주님께 구하십시오.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3. 인간적인 능력만으로 부족함: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하고, 은혜로 살아야 함
3. 인간적인 능력만으로 부족함: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하고, 은혜로 살아야 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4-5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합니다. 특히 그들이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웅변술과 철학적 지혜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안에는 실제로 이러한 은사들이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풍족함이 교만과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를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능력이나 자랑거리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스펙과 능력, 지식과 정보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인정받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능력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면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성도다운 성도가 되는데, 자꾸 세상의 조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것은 그들의 언변과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능력과 성취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망각할 때, 인간적인 능력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은혜를 알아야 하고, 은혜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예배 시간만 그ㅡ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은혜를 통하여 산 제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4. 인간의 능력은 도리어 그리스도의 증거를 흔들 수도 있음: 우리의 예
4. 인간의 능력은 도리어 그리스도의 증거를 흔들 수도 있음: 우리의 예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6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은사들(언변, 지식 등)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그들 가운데 견고하게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이는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은 분명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는 데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이후 상황을 보면, 그들의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은사 사용에 있어서의 무질서와 자기 과시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증거를 약화시키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후에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1:21)고 말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선포합니다(2:2).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교회가 세상의 방법과 기준으로 성공을 추구하고,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을 과도하게 의지할 때, 그리스도의 증거는 오히려 흐려질 수 있습니다. 화려한 건물, 세련된 프로그램, 유창한 설교, 많은 교인 수와 같은 외적인 모습이 그리스도의 증거를 담보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잘남’과 ‘능력’이 오히려 연약한 자들을 소외시키고, 복음의 순수한 능력을 가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낼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증거는 우리를 통해 견고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열심과 재능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의 단순하고도 강력한 십자가 복음을 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삶과 교회가 세상에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5. 우리가 바라고 기다려야 할 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5. 우리가 바라고 기다려야 할 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7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다시 한번 칭찬하면서, 그들의 시선을 궁극적인 소망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즉 주님의 재림입니다. 성도는 현재 주어진 은혜와 은사를 누리며 살아갈 뿐 아니라,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와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종말론적인 기다림은 성도의 삶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기다림은 현재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재의 삶을 더욱 의미있고 목적 있는 삶으로 이끌어줍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습니다. 주어진 은사를 따라 충성스럽게 살아가며, 주님 맞을 준비를 합니다. 또한 이 기다림은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줍니다. 세상의 것들은 일시적이지만, 주님의 약속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의 성공, 안정된 노후, 자녀들의 형통만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그것들도 귀한 바람일 수 있지만, 성도의 궁극적인 소망은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나타나심을 기다릴 때, 우리는 오늘의 삶에서 겪는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은사와 축복은 장차 주님께서 오실 때 완성될 영광의 작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결론: 성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향하여
결론: 성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향하여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첫머리를 통해 “성도라 부르심”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이 존귀한 부르심은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약속하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부르심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인간적인 능력이나 자랑이 그리스도의 증거를 흔들 수 있음을 기억하고, 오직 겸손히 주님만을 의지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시선은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고린도와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성도’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날마다 구하며, 그 안에서 참된 만족을 누리십시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하고,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도 믿음의 경주를 힘차게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냄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