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15) 예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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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확장
삶의 확장
예수님은 선생이 아닙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저 한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에 올 때 식당에 가거나 일터에 가거나 지인들의 집의 가는 것과 같이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오는 것은 목사나 성도를 만나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구원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예배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기 위해
사마리아를 지나 가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이야기입니까?
온 우주가 나를 찾아온 사건입니다.
이 여인은 잘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다섯이나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삶이 이렇게 된 것이 남자를 잘못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꾸 바꿔보았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계속 더 안좋아집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좋은 남편을 줄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예수님은 남편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알려주셨습니다.
예배가 나의 삶을 바꿉니다.
고단한 삶에 필요한 예배
고단한 삶에 필요한 예배
사랑하는 30·40대 성도 여러분, 특히 영·유아부터 초등 자녀를 키우느라 밤에도 완전히 쉬지 못하는 부모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오늘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새벽같이 울어 대는 아이를 달래느라 체력은 고갈되고,
직장에선 ‘프로’로, 집에선 ‘엄마·아빠’로, 교회에선 ‘헌신된 성도’로 살아야 하는 다중(多重) 역할 속에서 정작 ‘나’는 점점 희미해지고,
주말조차 가족 행사, 학원·레슨, 부모님 모임으로 촘촘히 채워져 주일예배는 리스트에서 밀려나기 쉬운 일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쁜 일정 가운데 고단한 삶 가운데 우선순위에서 예배가 멀어져버린 우리에게 다시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라고 초대합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사마리아 여인은 일상에 지쳐 예배의 자리에서 멀어져 버린 사람입니다.
예배의 가벼움
예배의 가벼움
1.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16절)
1.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16절)
예수님의 무척이나 현실적인 요청은 여인의 숨겨 둔 부끄러움을 끄집어냈습니다. 그녀의 본능적 반응은 장소 논쟁(20절)으로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지요. 장소·방식·전통 같은 외형적 이슈에 매몰될수록 인간은 내면의 상처를 가벼운 종교 행위로 덮으려 합니다.
📌 문화적 배경 짧게: 사마리아인들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한 뒤 이방 혼혈이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 출입을 금지당하자 그리심 산에 자체 성전을 지었습니다. ‘어디서 예배해야 하는가?’는 정치·민족·신앙이 뒤엉킨 400 년 묵은 갈등이었습니다.
2. ‘장소’ 대신 ‘일정’에 얽매이는 우리
2. ‘장소’ 대신 ‘일정’에 얽매이는 우리
“주일에 놀이터를 못 가면 아이가 스트레스받아요.”
“평일엔 야근인데, 주말에라도 쉬어야죠.”
“온라인 예배 틀어 놓고 집안일 하면 효율적이잖아요.”
이런 말들은 본질적으로 “예배를 경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친 영혼의 자기방어입니다.
몸과 마음이 무너질수록 예배는 ‘가장 덜 중요한 옵션’으로 밀려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무너질수록 예배는 우리에게 더욱 더 필요합니다.
지친 우리의 삶에는 회복을 주고, 밝고 건강한 삶에는 기쁨을 줍니다.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결정적인 이유는 복음을 피상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즉, 겉모양만 보았지 본질에 대하여 맛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수박을 먹어보니 너무 맛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수박을 주었습니다.
어찌나 수박이 맛있다고 칭찬을 하던지 기대하며 집으로 가져갔는데
어떻게 먹는지 방법을 몰라서 한입 베어 무는데 너무 딱딱하고 입안에 풀향이 짙게 베었습니다.
당연히 이게 뭐가 맛있냐며 버려버렸죠.
다른 사람은 사과처럼 껍질을 깎았습니다. 그랬더니 하얀 속살이 나와서 하얀 속살을 먹었습니다.
식감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맛은 밍밍하니 별 맛이 없었습니다.
얼마간 먹다가 또 버렸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수박이란 징하게 맛이 없는 과일이라고...
예배할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
예배할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
이 여인은 예배할 마음이 없어진 사람입니다.
나름대로 ‘이 산’(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봤지만 삶은 나아지질 않고,
남자를 여섯명이나 만났지만 삶은 더욱 더 괴롭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멀리하던 그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가 주신 것입니다.
예배할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은 내 안에 무엇인가 망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예배는 기분이나 컨디션이 좋을 때 괜찮을 때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무너졌을 때 주님은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심 산이든 우물 가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삶 가운데 가장 골치아픈 부분을 지적하셨습니다.
남편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배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이 여인은 지금 삶과 예배를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삶이 곧 예배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심산에서 형식을 갖추고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진심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에
그냥 일을 하면 그곳은 그저 반복되고 힘들고 고단한 일자리 일 뿐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일을 시작하면 그 일터는 예배의 장소가 되고
내가 하나님의 의식하며 하는 일들은 예배의 행위가 됩니다.
그 안에서 사랑과 자비와 은혜와 용서와 긍휼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족들이 모여서 식사를 할 때에 그냥 식사를 하면 아무런 특별함이 없는 일상이지만
기도로 식사를 하게 되면 그 먹고 대화하는 내용이 예배가 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
예배를 진정으로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예배를 논하고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수박을 줬는데 딱딱한 겁질이나 하얀 겉살만 먹은 것과 같습니다.
예배는 교회에 와서 자리에 앉아서 눈으로 강단을 살피고 귀로 소리를 듣는다고 예배가 아닙니다.
영적인 감각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예민하고도 세심한 과정입니다.
또한 물리적이나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도 없기때문에 초자연적인 역사가 필요합니다.
예배 중에 스마트폰을 한번 살짝 보는 것 만으로도 전전두엽의 깊은 몰입이 깨지며, 다시 집중되기까지 평균 23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중간 중간 딴 짓을 하는 사람은 깊이 있게 예배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최소한 10분 전에는 와서 기도와 찬양으로 준비해서 처음부터 깊이 몰입하여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배를 맛봐보세요.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찾아와도 알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 가운데 어려움과 문제들이 해결될 엉뚱한 결론을 찾아 기다리지 마세요.
예수님은 지금 우리 곁에 찾아오셨고, 그분을 통하여 예배할 때에
우리의 삶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주일 예배를 통하여 예배를 배우고, 또 3일간 삶이 예배가 되도록 살아가고
수요 예배를 통하여 예배를 배우고, 또 3일간 삶이 예배가 되도록 살아가세요.
이것이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영적인 원리입니다.
일상의 삶 가운데 하는 모든 행위들이 예배로 바뀌는 경험을 해보세요.
이것은 정말 경이로운 것입니다.
늘 먹는 식사자리에서 기도하면 그 식사교제는 예배의 자리로 바뀝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 기도로 시작하면 그 일터는 예배의 자리가 됩니다.
사업을 할 때에 사업장 예배를 하는 것은 그 사업이 예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가정에서도 심방예배를 드리면 그 가정은 예배의 처소가 됩니다.
예배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고 더 큰 축복입니다.
예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