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이야기-06. 모세-2

주일오후예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2 views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신명기 34장 1~12절(구약 317쪽)
설교제목: 성경인물이야기-06. 모세-2
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하며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함께 예배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설교에 앞서 보여드릴 영상이 있는데요. 먼저 시청하고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영상: 6분 23초
사실, 인류 불변 아니 존재 불변의 진리는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잘 알면서도 막상 죽음에 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일이라던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것 따위로 치부해 버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 우리는 사실 삶에 관해 더 관심할 수 있고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죽음에 관한 이해와 생각이 없이는 좋은 삶을 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요사이에 저는 청년들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해 이야기 나눕니다. 세계관이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안경과 같습니다. 파란 안경을 쓰면 세상이 파랗게 보이고 빨간 안경을 쓰면 세상이 빨갛게 보이는 것처럼요.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을 달리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성경이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데요. 그것이 기독교적 세계관이고요. 그것이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마침 이번 주에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죽음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죽음은 소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고 죽음 후에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둘째로 죽음은 윤회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죽음은 끝없이 반복되는 순환의 과정입니다. 마치 봄이 오고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지만 또다시 봄이 오는 것처럼, 죽음은 우주적으로 반복되는 과정이라 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죽음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죽음에 관해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적 세계관에서의 죽음은 이와는 다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 또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로 죽음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말합니다. 셋째로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극복되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끝으로 넷째로 죽음은 삶에 영향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를 믿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심판의 때에 평가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그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이고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이정표입니다. 이정표는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 우리가 가려는 방향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의 삶은 죽음을 목적에 두지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이정표를 보며, 그 너머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곳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면,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생활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합니다.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모세를 통해 이에 관해 나누려 합니다. 특별히 모세의 죽음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죽음을 맞이하고 어떤 삶과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를 같이 고민해 보려 합니다. 신명기 34장 1~12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습니다.
신명기 34장 1~12절(구약 317쪽)
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은 모세의 죽음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서글픈 것이 있습니다. 1~4절의 내용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땅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해해보면 더 모세의 처지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살면서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 또는 소망이 있으신가요? 가령, 내가 죽기 전에 이것만은 보고 싶다거나, 이것만은 이루고 싶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정말 놀랍게도 내 눈앞에 내 손에 거의 들어올 상황이 되었는데요. 그것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죽게 된다면 얼마나 서글플까요? 그것이 모세가 죽음 앞에 처한 상황입니다.
모세는 모진 고생을 하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집트를 탈출하여, 겨우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의 맞은편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면 꿈에도 그리던 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마치 북한에서 남한으로 건너오는 분들이 고생해서 어렵사리 두만강까지 와서 그것을 막 건너려는 순간에 붙잡힌 것처럼요. 모세도 눈앞에 목적지가 보였지만, 그곳을 갈 수 없었습니다. 정말 괴롭고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죠.
더 서글픈 것은 6~7절을 보면요. 모세는 무덤도 변변찮았고요. 심지어 그의 기력이 여전히 왕성했음에도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제가 모세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하나님께 매우 섭섭하다 못해서 화가 났을 거 같아요. 왜냐하면, 모세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열심히 했거든요. 때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느라 바빴고요. 가장 가까운 가족 곧 아론과 미리암에게서 비방을 받아야 했고요. 무려 40년이 넘는 기간을 정처 없이 떠돌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겨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5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모세는 하나님께 이런저런 말로 따지지 않았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어요. 그래서 10절 상반절에 보면 이렇게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 이후로 그와 같은 위대한 인물은 없었다고 성경이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모세였기 때문에 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30일을 애곡했다’고 나와요. 보통 유대인들은 7일을 애곡하는 것이 일반적인데요. 그것에 4배가 넘는 시간을 애곡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모세가 유일했어요.
다시 말하면, 모세의 죽음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특별한 것이었고요. 성경에서도 특별한 것으로 소개가 되고 있어요. 왜 모세의 죽음이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가 처한 상황 곧 목표가 눈앞에 손에 거의 거머쥔 상태에 있던 것과 그가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살아왔던 것이 그의 죽음을 특별하게 만들었음을 생각해요. 그리고 그의 죽음이 우리가 신앙인으로 본받아야 할 죽음의 모습임을 생각해요.
저는 그것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삶이라 생각해요. 모세의 처지에서 억울할 수도 있잖아요. 설령 억울하진 않더라도 모세가 자신이 해야 할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여길 수도 있지요. 자신은 아직 기력이 쇠하지 않았고 또 새로운 터전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잘 정착해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아직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길 수 있지요. 그러나 앞서 5절을 통해 본 것처럼요.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고요. 어떤 항변도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삶을 끝마치게 된 것이지요.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도 모세를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과 대면하여 본 자로 소개하고 계시지요. 이런 점에서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대단한 성취를 이루거나 많은 재화를 쌓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어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관계를 온전케 하는 일인데요.
맨 처음 보여드렸던 영상을 기억하시나요? 간호사로 일하시던 분이 몇몇 임종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삶에서 행복을 주는 것에 관해서 얘기하잖아요. 그것은 다름 아닌 좋은 관계 맺음이라고요. 임종을 앞둔 분들이 죽음 앞에서도 관계의 문제 때문에 돌아가시지 못하고 계시다가요. 관계 문제가 해결됨으로 이생을 끝마치게 되었다는 얘기가 기억나시죠. 그만큼 우리의 삶에서 사실 중요한 것은 좋은 관계 맺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맺음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이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때, 모세와 같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에 아무런 대꾸하지 않고요. 그분의 계획을 믿으며 순전히 그 뜻을 따를 수 있지요.
끝으로 한 분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마치려 합니다. 이 분은 이은상 선교사님입니다. 이분의 남편이 미국 공화당 대통령 보좌관으로 일을 해서요. 이분은 미국 정계에서 이른바 미국의 상류층의 삶을 살아오신 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일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너, 뭐 하다 왔니?”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그의 내면은 완전히 흔들립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은혜 베풀어 주셔서 많은 것들을 받았는데요. 자신이 그저 하나님 앞에서 잘 먹고 잘살았다고만 얘기하는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훗날 돌이켜보니 이 일은 선교사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쉽게 삶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삶을 벗어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목회하면 자신은 그것에 뒷받침하겠다고 다짐하며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정말 남편은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의 입에 뜻밖의 말이 나왔습니다. ‘이제 순종할 때가 된 것 같아?’ 사실 그동안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계속 거절해왔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자신이 목회자가 되기를 바랄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실은 남편은 절대로 그와 같은 얘기를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음을 깨닫고 ‘주여 순종하겠습니다’라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단하였고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오지로 가서 주의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로부터 시작된 선교사의 길은 30여 개국을 누비며 아프리카의 모잠비크, 동남아의 미얀마, 인도, 중앙아시아로 이어졌습니다. 그가 가는 곳은 늘 낯설고 험했습니다. 하지만 주의 말씀이 임하는 곳에서 늦은 시간까지 하나님을 노래하며 춤추는 사람들이 있었고요. 잡초가 무성했던 땅에 예배당이 지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천국을 보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하지만 매순간이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산비탈을 내려오다가 차량이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한 일도 있었고, 약을 싸 들고 와서 피를 토하며 집회를 인도하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통해 일하시고 모인 곳에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시니 어려움 중에도 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사랑하는 남편이 암투병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때에도 남편의 지지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역을 멈추지 않고 행하였습니다.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났지만, 아내를 원망하거나 믿음 없는 모습으로 죽음을 맞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당당한 모습으로 죽음 앞에서 신앙의 힘을 보여주었고요. 의연한 죽음 통하여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였습니다.
이은상 선교사님은 여전히 복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얀마에 세운 신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육하고 고아와 과부를 위한 고아원 사역까지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언제나 험난한 것이어서, 사역지로 떠날 때 자녀들에게 늘 얘기합니다. ‘엄마가 이번에 못 돌아오면, 천국에서 만나자’라고요. 여성의 몸으로 오지를 다니며, 힘에 부치는 사역을 하는 것이 절대 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를 기대하며 기쁘게 살아갑니다.
일전에 이분의 이야기를 짧게 다른 설교를 통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여성의 몸으로 어떻게 오지라는 환경에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지 참 놀라웠습니다. 무엇보다 항상 죽음을 가까이 두고서도 의연하게 사역을 이어가는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또 우리는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처음에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죽음은 소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 죽음 너머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고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무런 관심도 없이 살아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신앙인의 삶은 죽음을 이해하고 이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로는 모세와 같이 주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길 바랍니다. 끝까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아름다운 삶을 이루는 우리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