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자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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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자의 삶
예수 믿는자의 삶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다 보면 기쁨의 눈물도 있지만 이별, 실패, 좌절, 불화 같은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 곧 아직 슬퍼하며 우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근데 그냥 울기만 한다고 복인 게 아니라 왜 그리고 누구 앞에서 우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입니다. 슬픔을 혼자 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가져 올 때 그 슬픔이 복이 됩니다.
1. 자기를 보고 슬퍼하며 우는 성도의 복
사람들은 대개 고통이나 눈물 그리고 슬픔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할 때, 돈이 많은 사람, 표정이 밝은 사람, 무엇인가 뜻한바를 이룬 사람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많이 웃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랍게도 “슬퍼하며 우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히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4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하늘의 위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슬픔이나 눈물을 싫어하는 오늘 같은 시대에도 많이 울라고 하십니다. 사실 누가 사람들 앞에서 우는 걸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슬퍼하며 애통하면서 울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애통은 단순히 그냥 내가 슬퍼서 우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조금 울다 말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마음 아파하며 우는 그러한 슬픔입니다.
“애통하는 자”라고 되어 있는 말은 애통했던 자, 애통하고 만 자, 또는 애통할 자가 아니라 ‘지금 애통하고 있는 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한번 애통하고 마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애통하는 반복적 행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애통하는 것, 슬퍼하는 것이 삶의 습관, 영적 습관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애통이라는 것은 엄청난 비통함을 느끼는 겁니다. 그냥 조금 슬퍼서 우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얼마나 슬픕니까? 그런 것처럼 강한 슬픔을 가져오는 때 어울리는 단어가 애통입니다.
그런데 이 ‘애통하다’라는 헬라어 원어가 ‘수난을 받다, 고난을 받다’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다는 데 학자들이 대부분 동의합니다. 그러니까 이 ‘애통하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수난 당하신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으로 슬퍼하며 우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고통 중에 우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주로 언제 애통합니까? 아주 나쁜 일이 발생했을 때 웁니다. 지진 피해를 당한 뉴스를 보면, 모든 게 무너져 내린 상태에서 잔해에 파묻혀 죽은 자기의 갓난아기 시체를 들고서 오열하는 아빠의 모습, 부모를 다 잃고 혼자 어린아이가 살아남아서 지금 상황이 뭔지 모르고 그냥 우는 그러한 모습, 이러한 것이 애통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사실은 그런 애통이 아닙니다. 첫 번째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였는데,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애통이 찾아온다는 겁니다. 팔복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면 애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난해서 마지막까지 정말 다 비우고 나면 눈물밖에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지금 자기의 영적 상태를 살펴볼 때, 자기가 얼마나 지금 바닥에 있는가를 정확히 보게 되니까, 죄로 죽어 있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니까, 그래서 너무나 큰 충격과 고통 중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성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보며 또 자기를 보며, 사실은 하나님 앞에 비추어진 자기의 모습을 보며 많이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무능과 가난함을 본 사람은 그것을 가져오는 죄악과 영적 어려움과 참함이 그 뒤에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래서 그러한 상태에 있는 자기를 보며 울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있는 많은 죄악과 영적인 어려움을 보면서 애통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는 ‘오늘 내가 왜 이렇게 했을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오늘 올바르지 못한 삶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자기를 보며 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주님, 저는 이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고 슬퍼하며 우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우리가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나’는 바로 그런 나의 영적 상태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걸 가질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파산한 상태인 내가 어떻게 해야 살아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는 겁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내놓을 게 없는 자신의 영적 가난과 무지와 무능과 어리석음을 보면서 절망하고 낙심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도 절망과 낙심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거기서 그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현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 혼자 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와서 우는 사람, 그것이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악과 부패한 모습을 바라보며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울면서 부르짖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즐겁게 살면, 자기가 그런 상태인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간다면 주님이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 가운데서도 바로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내가 낳은 자녀인데 내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면 더더욱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막 화가 나고 ‘내가 너를 위해 해준 게 얼만데?’라는 생각도 납니다. 그러나 내 자녀의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그냥 화를 낼 게 아니라 안타까워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겁니다.
내 배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귀는 사람이라든지, 부모님이라든지, 친구라든지, 또 교회 공동체라든지, 서로에게서 안타까운 모습이 보일 때 울어 주는 겁니다. 대신 우는 겁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애통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행복을 추구하긴 하지만 불의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바로 그러한 불의를 보면서 애통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이 뭔가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세상의 애통과 다른 애통
첫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세상적인 애통과는 다른 애통입니다. 세상에서 애통은 보통 손해 보거나 남에게 속임을 당하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또 이유 없이 피해나 고난을 당했을 때, 특히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겪는 아픔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영적인 애통입니다. 단순히 감정적인 애통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와 허물을 목격하며 ‘죄의 결과는 결국 죽음일 수밖에 없는데,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죽음에 속한 삶을 살아서야 되겠는가?’ 세상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슬퍼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입니다.
2)죄의 고백과 다른 애통
두 번째로, 그래서 죄의 고백과 애통은 다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물론 죄를 고백하는 우리의 회개가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 인정하며 회개할 수는 있는데, 정말 가슴을 치면서 애통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보통 뭔가를 잘못하면 정말 애통하면서 회개합니까? 저만 해도 뭐 좀 잘못했으면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 정도지, 우리가 정말 가슴을 치면서 ‘나는 정말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할 그러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애통하는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면 몰라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정말 나의 구주로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고백을 한 크리스천이 똑같이 그렇게 죄를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살인이나 강도나 그렇게 심한 범죄는 저지르지 않는다 해도, 법규를 어기는 것이 사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으로 한 것까지도 다 보십니다. 그런데 그 죄를 별것 아니라고 취급하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죄인가를 따져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만 안 걸리면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죄 생각을 하면 괴로우니까 자꾸 그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세상에서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변명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데, 자꾸 죄책감이 올라오니까, 그것을 최대한 느끼지 않기 위해서 뭘 합니까? 술을 마십니다. 쾌락에 취하고, 도박에 취하고, 그런 걸 통해서 이런 걸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뿐이지, 끝나면 또 그것이 몰려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하나님 앞에서 ‘아, 내가 정말 죄인이구나’ 하고 깨닫고 가슴을 치면서 ‘내가 이대로는 안 되는데 그럼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엎드려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3)남의 죄 때문에 하는 애통
특히 중요한 것이 세 번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남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뿐 아니라 남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이 지금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돼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 얼마나 악이 많습니까? 그냥 뉴스만 봐도, 거기에 너무 안타까운 일들이 많습니다. ‘어유, 저런 저런 악한 것들이 있나?’라는 식으로 그냥 욕이 나오는 타락과 거짓과 비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구조적인 약점을 파고들어서 돈을 몰래 빼돌리 일들이 많습니다. 양심 없는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런 못된 것들!’ 하면서 막 분개하고 분노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고, 그런 범죄나 악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애통하는 겁니다. 우는 겁니다. ‘아, 어떻게 저 사람들은 저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 너무나 안타깝다.’ 하며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러한 악함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보면서 슬퍼하시는 그 마음 때문에 애통하는 겁니다.
제가 병원에 있을 때 드는 생각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만나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정말 복 있는 사람인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백성, 성도는 자기 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도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구약 에스겔서를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데 천사에게 다니면서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겔 9:4) 하셨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사회악과 여러 가지 악한 일들 속에, 그걸 보면서 그 가증한 일 특히 우상숭배 같은 것을 보면서 탄식하고 우는 사람의 이마에 표를 그려서 표시를 남겨두라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을 나중에 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사람들을 찾았는데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게 된다고 에스겔 선지자가 탄식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신 사람은 바로 애통하는 사람 한 명입니다.
‘남들은 다 법을 어기고 그러는데 나 하나 잘 지킨다고 되겠습니까? 그냥 나도 적당히 살죠.’가 아닙니다. ‘나 하나가 한다고 되겠습니까?’ 예, 됩니다. 나 한 사람이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사람. 그런데 한 사람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애원해서, 의인 50명에서부터 10명까지 내려갔습니다. 의인 10명만 있으면 멸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10명이 아니고 한 명이 없어서 그냥 망했습니다. 거기 한 명만 의인이 있었어도 되는 건데 없어서 망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세상이 악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악한 세상에 나 혼자 제대로 살면 너무 티 나고 남들이 뭐라고 그럴 텐데, 내가 굳이 그렇게 살아야 하겠는가?’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놀라운 복을 내려주십니다. 무엇보다 그런 악을 보면서 슬퍼하는 겁니다. 슬퍼하면서 우는 겁니다. 그리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애통하는 자로서 복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말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위해서, 왜 저 영혼은 저렇게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사람의 죄를 위해서 애통하는 겁니다.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애통하며 기도해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냥 비난하고 욕하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4)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애통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애통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같이 하는 겁니다.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정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같이 애통하는 겁니다.
예레미야, 느헤미야, 호세아, 바울 등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믿음의 조상들은 정말 이웃을 위해서 애통했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예레미야 같은 사람은 눈물의 사역자였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죄로 인해서 아픈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그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유튜브를 보고 있으면 중간중간 광고가 나옵니다. 굉장히 불쌍해 보이는 아프리카나 중남미나 아시아 출신 아이들이 나옵니다. 아주 비쩍 마르거나 병에 걸려서 배가 많이 나온 아이들이 나오면서 “여러분의 도움이 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만약 내가 뉴스를 보다가 그런 광고가 나오면 ‘에이’ 하며 다른 데로 돌리십니까? 아니면 유심히 보십니까? 우리가 꼭 물질로 항상 도울 수는 없지만, 지금 이 광고를 내가 바로 이 시간에 보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지금 내 눈에 왜 이런 게 보입니까? 지금 하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 안타까운 처지에 있는 저 어린이 또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마음 아파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애통하는 자이고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눈물의 사람이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슬픔의 사람’이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예수님은 굉장히 많이 웃으시고 재미있고 유머가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슬픈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무덤 앞에서 우셨는데, 물론 그가 불쌍해서 우신 건 아니지만 죽음이란 인간의 현실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또 예루살렘이 곧 멸망할 걸 아시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면서 우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라고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이십니다. 특히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정말로 간절히 기도하실 때, 바로 그것이 애통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갖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위해서 슬퍼하고 울면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게 필요합니다. 정말 최고로 복 있는 사람이 예수님 아니시겠습니까? 애통하는 것은 그 예수님을 닮는 길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애통하는 자입니다.
3.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늘의 위로
애통하는 자가 왜 복이 있습니까?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의 위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겁니다. 눈물이 많은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과 위로를 찾아 방황하고 있습니다. 정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게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를 보면서 울고, 그다음에 또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울며 하나님 앞에 아뢸 때 정말로 복 있는 사람이 되는데,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위로를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비결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정말로 애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위로를 주십니다.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서 ‘너무나 안 됐다. 안타깝다.’라고 생각하며 너무 안타까운 마음으로 잠시라도 기도했을 때,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이 어떠시겠습니까? ‘너도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너의 마음을 드리고 행동까지 하며 섬기느냐?’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위로하지 않으실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부모의 마음으로 자녀를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렇게 하는 우리를 위로하지 않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슬퍼하는 자에게 분명한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복, 하늘의 위로를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위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슬픔이 힘이 되고, 슬픔이 소망이 되고, 슬픔이 위로가 되고, 슬픔이 평화가 되고, 또 슬픔이 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다스리시고 내가 정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바로 그게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더 귀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또한 애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도 그 속에서 애통하는 사람이 이 땅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지금 나 자신을 보며 애통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 즉 사랑하는 가족과 성도들과 친구들의 삶을 보며 그 죄 때문에 애통하고, 또한 이 세상에서 악한 것들을 보면서 애통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서 애통할 때, 그런 우리가 이 세상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참으로 애통하는 자, 슬퍼하며 우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그 위로를 세상에 전달해 줌으로 이 땅의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