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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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찬송가 364,365
빈틈을 주지 말아라
빈틈을 주지 말아라
요즘 저와 안전도사님이 사순절을 지내고 나서 굉장히 많이 살이 올랐습니다. 저녁금식을 열심히 하다가 이제 부활의 기쁨을 몇주간 너무 만끽하다보니까 조금씩 살이 올라 최근 몇년간 처음 보는 몸무게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서로 안아주면 꼭 안기는 기분이 들었는데 이제는 중간에 뱃살이라는 존재를 한번 느끼고 내가 안겨있구나 알게 되어요. 그래서 지금의 몸무게가 건강을 헤칠 것 같아서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이어트 할때마다 꼭 무슨 약속이 생기고, 꼬옥 맛있는게 눈에 보이는 일들이 허다해요. 그런데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아시겠지만 몸무게 감량에 있어서 무조건 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실 운동 보다 식단 조절입니다. 아무리 많은 운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저희가 먹은 칼로리 만큼 하루에 운동으로 그것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식단은 필수적인 요쇼인데 이것을 마음 먹을 때 마다 맛있는데 방송되고 있고, 맛있는데 눈 앞에 있고, 맛있는게 어느세 손에 들려 있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다이어트 중에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는 거에요. 그 중에 하나가 유혹받는 자리에 아예가지 않는겁니다. 제가 헬스장에서 회원님들을 보면 자주 실패하고 무너지는 분이 계세요. 그분을 잘 보니까 약속자리에만 가면 한주간 잘 해오셨던 걸 그날 못견디시더라구요. 그래서 딱 한달만 유혹받을 것 같은 자리에 아예 가지 말아보시라고 이야기하고 나서 정상적인 감량이 이루어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처럼 빈틈을 보여준다는 것은 하지 않아야 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하게하는 틈을 내주게 됩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이야기하는 말씀이 등장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비멜렉에게 그 틈을 줍니다.
아브라함의 빈틈
아브라함의 빈틈
오늘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이야기하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잘 보면 아비멜렉이 찾아와서 사라를 보고 이사람이 누구냐, 누이냐?고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동하는 와중에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그랄”에 거류하고 있는데 그랄 왕이 었던 아비 멜렉이 사람을 보내서 사라를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스스로가 사라를 누이라고 하고, 사라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지금 사라가 너무 예뻐서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당시 이러한 행위는 그 시대 관습에 의해 가능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당시 일국의 통치자는 어떤 처녀라도, 심지어는 그 땅의 일시적인 방문자 일지라도 마음에 들면 후궁으로 취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여기서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한 이유는 90대가 다 된 사라의 미모에 반해서라기 보다 정략 결혼을 통해 자기 영토권내로 이주한 부유하고 강력한 족장 아브라함과 동맹 관계를 맺기 위해서 사라를 아내로 맞이했을 경우가 더 큽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한 것은 단지 말 한 마디의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애굽에서 한 번 같은 실수를 저지른 경험이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합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한번도 아닌 두번이나 했을까요?
그 뿌리는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1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그랄의 사람들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 아브라함은 자신이 머무는 지역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꾀를 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꾀한 그 지혜가 자신도, 아내도, 그리고 그 땅의 왕도 곤란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빈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저희도 관계 속에서 상황속에서 저희의 연얌함을 가추기 위해 빈틈을 내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이 작은 타협이 영적 구멍을 만들고, 그 틈을 사탄은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빈틈처럼, 우리 삶의 영역 가운데에도 아브라함처럼 ‘누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는 순간의 상황 속에서 그냥 넘어가고 싶고, 누이가 말하는 것 처럼 순간적인 대처로 넘어가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순간이 바로 영적 빈틈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영적 빈틈은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사탄은 강한 성도보다 빈틈 있는 성도를 더 좋아해요. 왜냐하면, 기도하면서 어렵지만 정지하게 살아가는 강한 자는 넘어뜨리기 어렵지만, 빈틈 있는 자는 잘 가는 것 같더라도 스스로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사탄은 이 빈틈을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는 이시간에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두려움 빈틈이었다면 나의 빈틈은 무엇인지 기도하면 나아가길 원합니다. 내가 알고도 넘어지고 견디기 어려워 하는 그것을 주님 앞에 솔직히 기도로 올려드리는 저희가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신실하심
저희는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목격합니다. 아브라함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 속였고, 이로 인해 사라가 다른 남자의 손에 넘어갈 뻔한 큰 위기를 자초했음에도, 하나님은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문제 앞에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꿈에 직접 개입하시며 이 문제를 바로잡으십니다.
3절에 아비멜렉 왕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르시기를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그러자 아비멜렉이 그가 나에게 누이라고 했고 그 여인도 오라비라고 했습니다. 나는 온전함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했다.라고 말하니 6절에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너의 온전한 마음을 알아서 너가 범죄하지 않게 하려고 나타났다고 설명하시면서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빈틈으로 만들어진 문제를 바로잡으십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다시 상황을 정리하는데
그리고 본문 15절을 보면,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보라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고 말합니다.
즉, 방목권을 허락받는 것, 이것은 단순한 보호 그 이상, 축복의 확장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라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은 천 세겔을 받고, 아브라함의 명예가 회복되며, 그 땅에서 거주할 권리까지 얻게 됩니다.
그리고 17-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들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이 있는데, 나그네 처럼 왔던 한 족장에서 이제는 그들의 위해 기도해주는 권위를 세우시고, 아비멜렉과 관련된 가족의 태를 다시 열어주시는 일을 허락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기도의 능력이 회복되고, 선지자로서의 사명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넘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 약속을 끝내 이루십니다.
결론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실패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두려움에 의해 생겨난 작은 빈틈, 순간적인 타협, 신뢰의 흔들림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말씀이 알려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빈틈을 줘서 악화되는 상황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실수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의 실수 가운데 개입하셔서 보호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한 자매가 SNS를 보며 자주 낙심합니다.
“쟤는 취업도 빨리 하고, 연애도 잘하고, 집안도 좋고, 생긴 것도 예쁘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취업에 떨어지고, 인간관계도 꼬이고, 하루하루 불안하기만 합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싶어 기도를 쉬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순간의 두려움 때문에, 관계의 긴장 속에서, 혹은 유혹 앞에서 '누이입니다'라고 말하며 타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도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무너졌을 때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의 기도를 다시 회복시키시며, 우리의 실패 너머에서 여전히 우리를 향한 약속을 이루어가십니다.
적용 연결:
우리는 종종 ‘나는 실패했다’고 느끼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마지막 장면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실패했을 때도 하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듯,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SNS 속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 속 고백을 보십니다.
저에게도 이런 빈틈이 있는데 뭐냐면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또 사람도 좋게 보면 좋아지고 안좋게 보면 안좋아지잖아요. 그래서 저에게 있어서 마음가짐이 너무 중요했어요.
그런데 이걸 알게 되었냐면 제가 방학때 마다 부모님이 여름수련회를 엄청 돌리셨는데, 월화수 갔다가 목금토가고, 다시 다음주 월화수 갔다가 목금토 가고, 다시 월화수 갔다가 목금토 가면서 4주 5주를 보냈셨어요. 그런데 수련회를 하다보니까 제가 은혜 충만하게 있으면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해도 은혜가 되고 이해가 되는데, 그냥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설교, 좋은 말씀이라도 귀에 안들어 온다는걸 알았습니다. 속담에도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말처럼 내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점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어떤 상황 앞에서, 또 사람을 놓고 기도할때 안좋게 보면 안좋아지고 좋게 보면 좋게 보아지는 것 처럼 제 보는 눈에 주님 함께해달라고 매번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렇게 제 연약한 부분을 놓고 기도할때 주님께서는 제 마음가짐을 달라지게 하셨고, 그로 인해서 정말 놀라운 일을 얼마나 많이 경험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빈틈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올려드리기 원해요. 아브라함처럼 넘어졌더라도 다시 주님 앞에 서서 회복을 구합시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틈을 메우시고, 다시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크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잡고, 오늘도 다시 담대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실패는 분명 실수였지만, 하나님은 그 실패마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신실하심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 기도 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부활의 기쁨이 계속되는 이 아침, 저희를 깨우시고 주님의 전으로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어두운 밤을 지나 새 날을 주신 것처럼, 오늘도 저희의 삶을 새롭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의 실패를 보며, 저희 안에도 두려움과 타협의 빈틈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상황을 피하려 했던 순간들이, 오히려 믿음의 자리를 놓치게 했던 때가 많았습니다.
주님, 그런 저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오늘 아침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아브라함의 실수 가운데서도 개입하시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시며 선지자로 다시 세우신 주님처럼,
저희의 실수보다 크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합니다.
오늘 하루, 작은 틈도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과 기도로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두려움이 아닌 믿음이, 타협이 아닌 순종이 자라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