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신학 (권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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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자와의 연애 문제
교회 안에서 짝을 찾기 힘들다 뵌, 생각보다 교회 밖에서 찾으러 다니는 경우가 많다. 어떤 자매들은 급기야 비신자와 연애를 시작한다고 한다. 본잉 신앙이 불분명해서 아무 생각 없이 비신자와 연애하고 결혼하는 경우도 있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어쩔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다. 저자는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을 두고 있다. 굳이 비신자와 연애하겠다고 하면 무작정 반대하지는 않는다. 단, 그가 ‘비신자인 상태에서’ 결혼은 하지 말라고 권한다. 이것 은 저자의 권면이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명령하고 있다.
2 Corinthians 6:14–16 NKRV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4절에 보면 분명히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명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혼 문제만이 아니라 당시 고린도 교회의 부정함을 두고 사도가 총체적으로 비판한 내용입니다. 특히 자칭 성도라고 하면서 사도의 가르침을 대적하고 고린도의 우상숭배와 부도덕함을 교회 안에 퍼뜨리 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 음행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결혼 문제에도 당연히 적용할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보듯이, 비신자("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몸을 우상과 결합시키는 가중한 행위입니다. 우리가 그리 스도와 연합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가 비신자와 결합하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를 그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15절에서"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결혼한 부부의 가정에 거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를 원하시는데(16절), 어찌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어기 고 비신자와 결합할 수 있겠습니까? 믿지 않는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 를 꿈꾸는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은 결혼한 부부를 통해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시는데(말 2:15), 하나님을 모르는 배우자를 통해 경건한 언약 자손을 배출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적말 힘들고 안타끼운 현실에서도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크리스천 연애의 구별됨이 바로 그런 데에서 드러납니다. 나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조차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시키고 힘든 현실 가운데 그분의 선한 이끄심을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저는 비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그가 언약 백성으로 거듭 난후에 결혼하는 것은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정말 칭찬 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분별의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그형체가 정말로 거듭났는지 공동체 차원에서 접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혼의 자매들에게 당부합니다 비신자와 연애하고 싶다면 하되 결혼은 형제가 세례를 받고 공적으로 신앙고백을 할 때까지 좀기다려 달라고 말입니다. 제가 지도한 커플 중에 실제로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 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믿음이 좋은 형제가 교회 밖 에서 자매를 데려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남자들의 특성상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거의 감내합니다. 심지어 회심하지도 않았는데 기존 교인보다 더 교인인 것처럼 교희생활에 충실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색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도 그렇게 해서 결혼했는데, 딸이 출생하고 아빠 얼굴을 알아보기도 전에 이혼해 버렸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교회 다니는 여자와 답답해서 남편이 도저히 같이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혼하지 않고 비신자인 배우자와 계속 같이 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신혼 초기에는 사랑 호르본 분비가 왕성하기 때문에 마냥 좋하다가, 호르몬의 영향력이 소멸되면 그때부터 결혼생활의 이유를 사랑외에 다른 것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특히 믿음의 배우자는 본능적의 로 영적 갈망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배우자와 영적인 교제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때부터 답답해하거나 심지어 결혼을 후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평생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계 부 르짖으며 가정을 선교지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교기지이지 선교지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와 명에를 함께 한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면서 살아야 합니다. 물론 주께서 긍홀을 베푸 셔서 믿지 않는 배우자가 빨리 회심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부부를 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믿지 않는 배우자를 전도하려고 정말 오랜 세월을 보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여전도사님은 평생 남편의 회심을 두고 기도했는데, 당신이 죽기 얼마 전에 기도제목이 이루어졌 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평게 삼아 아무 생각없이 비신자와 연애하겠다고 합리화시키지 말기 바랍니다. 여하튼 비신자와의 연애 문제를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에 반응하여 할 수만 있다면 모든 크리스천 미혼 남녀가 철저하게 성경말씀에 따라 믿음의 짝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현실적인 문제로 비신자와 어절 수 없이 연애하게 되면, 반드시 그(녀)가 회심하여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기를 바랍니다. ‘나는 금방 전도할거야!!'라는 생각으로 섣불리 비신자와 결혼할 생각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한 영혼만 전도 하다가 인생을 마감할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수렴도
크리스천 연인은 자신들의 사랑이 서로만을 향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일상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 한순간도 그분의 사랑을 떠나서는 연인들의 사랑조차 의미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사랑은 그분의 사랑에 맞닿아 있을 때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
연인들은 서로의 열렬한 사랑이 혹시 죄악으로 치닫고 있는지를 항상 살펴야 한다. 연인 사이의 불타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깨닫게 하는 탁월한 방법이지만, 자칙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죄의 병기로 전략할 수 있다. 둘 상디의 사랑이 한 방향을 향해 수렴되지 않고 서로를 향해서만 표출되고 있을 때 그렇게 되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결국 둘사이의 거리도 멀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12쪽 그림)
그림(112쪽)을 보면, 연인들이 정점에 계신 하나님께로 각각 가까워 질수록 놀랍게도 서로의 거리도 가까워짐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이 수학 용어를 쓰자면, 선분M'F'가 선분MF보다 휠씬 짧습니다. 반대로 하나 님께로부터 각각 멀어질수록 서로의 거리도 멀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수학적 개념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성을 직관적으로 나타 내는 존재의 원리입니다.
크리스천 연인들은 <사랑의 삼각도>를 통해 사랑의 수렴성과 함께 죄의 수렴성을 늘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서로를 향한 불타는 사 랑이 하나님께로 수럼되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그 방식으로 삼위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려고힘 쓰는지 서로를 살펴줘야 합니다. 그림대로 표현하자면, 나와 그(녀) 사 이의 가끼움과 친밀함의 정도는 서로가 각각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서있는 것으로 입증된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둘 사이의 그 사랑이 하나님을 배제한 채 흑시 서로에게만 향하고 있는지도 점검해야 합니다. 만약 서로를 향한 성적 각성 상태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강렬해져 있다면, 그 틀은 명백 해계 기의 수렴성으로 치단고 있는 중입니다. <사랑의 삼각도>에서 보듯이, 이 경우에는 나와 그(녀)가 서로 강렬히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실 재료는 각각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 서로 간의 거리`도 멀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정해진 짝인가? 선택인가?
커플 상담을 하다 보면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과연 그가 하나님의 정해 주신 짝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우리가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
저자는 묻고 싶다고 한다. 그러한 질문이 성경적으로 타당할까? 우선 2가지 그릇된 전제를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날 위해 이미 정하신 짝이 있다는 운명론적인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 선택에 문제를 하나님의 뜻으로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한다고 결혼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혼을 인정해 주시기 때문에 결혼이 성립된다고 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은 나를 위해 어떤 짝을 정해 두시고 그를 찾아가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오류 없는 예지의 맥락에서 내가 누구를 만나게 될지 내다보고 계신다고 조심스럽게 표현할 수 는 있다. 물론 이때도 선택에 대한 나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의도를 철저히 배격하는 상태여야 한다.
하나님이 특정한 짝을 정해 두셨다는 운명론적 생각은 우리의 자유의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런 생각에는 ‘단 하나의 길이 나에게 최선’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나를 위해 예비된 최고의 짝이 ‘특정한 그’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최선의 길은 단 하나가 아니라,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른 수 많은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다만 그것이 죄의 영역으로 치닫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우리는 결혼에 대한 나의 선택보다 그 후의 ‘결혼생활’에 눈을 돌려야 한다. 선택 행위도 중요하지만 그 후에 지속되는 결혼생활이 훨씬 큰 결혼의 의미와 행복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미리 정하신 그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또 나의 자유의지로 그를 선택하는 것을 마치 하나님의 뜻의 차원인 것처럼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나의 자유의지로 짝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나의 선택 행위보다 그 후의 결혼생활에 관심을 더욱 집중시켜야 한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킨십은 어디까지?
오래 전에 있었던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대학의 기독 동아리에서 연애 강의를 하다가 민감한 질문을 청년들에게 던졌습니다. 결혼 전에 허용 가능한 ‘스킨십’이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는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형제가 둘이 사랑하면 끝까지 가도 된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 친구가 의미하는 “끝까지”는 당연히 부부 사이에서나 가능한 성관계(sex)를 가리킵니다.
결혼 전 스킨십의 허용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크리스천 연인들의 큰 관심사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 스킨십을 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면 뇌가 극도로 활성화되어 여러 가지 ‘사랑 호르몬’을 몸에서 분비하게 된다. 그중에서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스킨십에 대한 갈망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연인들은 강렬한 성적 각성 상태를 사랑이라고 대부분 착각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 신체 반응이 그에게는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를 사랑한다는 기준을 진한 스킨십이 있어야 하는 걸로 생각해 버린다. 연인들의 스킨십은 두 요소 중에 특히 ‘감정’에 거의 절대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큰 걸림돌이 된다.
크리스천 연인들은 일단 스킨십을 하려는 이유를 곰곰히 살펴봐야 한다. 보통 스킨십을 진하게 할수록 상대방을 더 깊이 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스킨십을 진하게 할수록 그를 향한 성적 이끌림이 강화되고 자신의 흥분 상태가 극대화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특히 남성은 자신의 성적 각성 상태를 ‘사랑’하게 된다. 상대방의 마음 상태와 반응보다는 자신의 성적 흥분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결혼 전 스킨십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킨십의 표현 기준을 획일적으로 정할 수는 없다. 나라마다 문화마다 사람마다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킨십을 추구하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과, 타협할 수 없는 최후의 지점을 설정해야 한다. 만일 스킨십을 하다가 서로 불타올라서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순결에 대한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고 싶은 충동이 올라온다면 그 즉시 멈추어야 한다. 사실 이 상태가 되면 이미 스킨십을 멈추기가 거의 불가능 하다. 또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마음 상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성적 흥분을 탐닉하려고 스킨십을 하는 것도 즉시 중단해야 한다. 이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사랑’하는 이기심에 불과하다.
저자는 타협할 수 없는 스킨십의 최후 지점은 키스라고 생각한다. 결혼 전에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키스는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의 키스 행위는 단순한 인사 행위가 아니다. 그와의 키스는 깊은 존중심과 은밀한 연합과, 또 다른 대상이 끼어들 수 없는 배타적인 관계를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부부만이 누릴 수 있는 관계이다. 제3자가 끼어들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를 향해 가장 은밀하고 가장 깊은 친밀감을 표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키스에 담긴 그러한 의미 때문에, 아직 한 몸 됨을 이루지 않는 미혼의 거플들은 키스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크리스천 연인은 세상과 구별되게 연애를 해야 한다. 청춘 남녀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를 하나님 중심으로 표현하고 절제하는 것이야말로 크리스천 연애의 큰 사명이다. 가장 양보하기 힘든 그 욕구를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시키는 행위가 정말 아름다운 ‘순종의 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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