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16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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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감동, 말씀
하나님의 감동, 말씀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모여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모두에게 주님께서 말씀의 은혜 가득 부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지난주까지 함께 디모데전서 3장 말씀을 읽었는데요, 어떤 말씀이었죠? 말세의 때에 나타나는 집단, 즉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적그리스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옛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었다는 것도 함께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그 옛사람으로부터 돌이키기 위해서는 거듭남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함께 나누었었습니다.
이어지는 오늘의 말씀에서 바울은 이전과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 자신의 사역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요,
나의 교훈, 행실, 의향, 믿음, 오래참음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그것은 앞서 바울이 말세에 나타나는 거짓된 자들, 적그리스도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는 그와 반대되는 믿음의 길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믿음의 길, 자신의 사역을 너가 다 보지 않았냐, 정말 많은 박해가 있었지만, 그 모든 것으로부터 주님이 나를 건지셨다.
너가 본 것처럼 믿음의 길은 박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믿는 자들은 박해를 받을 것이다.
이부분에서 사실 우리는 좀 거슬리는 것이 있을거에요. 왜? 아니 적그리스도들이 자신들이 가짜인걸 드러낸다는 건 좋아. 그러면, 반대의 자리는 진짜의 자리니까, 좋아야 할 거 아니에요.
보통 권선징악이 나타나는 옛날 이야기들은 어때요? 선한 자들이 다 보답을 받잖아요. 악한 이들보다는 잘살아가잖아요.
그런데 오늘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반대의 길, 믿음의 길, 즉 선한 쪽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복을 받으리라 가 아닌, 박해를 받으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들어도 사실 기분이 별로에요. 아니 왜 박해를 이야기하는거야.
그런데 사실 더 기분이 안좋아지는 건 무엇 때문이에요? 그게 사실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원래 긁히는 것도 진짜 사실을 이야기할때 긁히잖아요?
오늘 말씀도 그런거에요. 내가 지금 현실이 그리 좋지 않은데, 말씀이라도 좋은 이야기 해주면 그래도 살아갈 힘이 나는데, 말씀에서도 ‘응 너 지금 힘들지? 그거 믿음생활 열심히 하면 당연한거야. 너 앞으로도 힘들거야’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더 짜증이 나는 거죠.
게다가 또 어떤 이야기까지 해요? 믿음의 길을 걸아가는 우리를 괴롭히는 이들, 앞선 적그리스도와 같은 악한 사람들이 어떻게 된대요? 13절을 보면? 더 악해진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을 속이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속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속는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그들의 속이는 논리나 이런 것들이 워낙 강하고 하다보니, 속이는 본인도 그 논리 가운데 잠식이 되어버리는거에요.
이런 거죠. ‘너 믿음생활 하니까 그렇게 힘들지. 우리처럼 살면 편할걸? 앞으로도 좋을걸?’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
진짜 그렇게 삶이 살아지는거에요. 그러니까 그들도 어떻게 되요? 아 내가 말하는게 진짜구나. 이제 앞으로도 그 논리 안에서 살아야겠다. 이렇게 된다는거에요.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당장 우리 삶에서도 잘 보이는 모습이죠.
대표적인 게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물질 중심의 사회 모습이 그러한 모습이죠.
이 세상은 가치가 아닌 물질이 지배해! 라는 논리구조로 사람들을 호도하는 이들이 있었죠. 돈이 짱이고 돈이면 다 할 수 있어!
아주 옛날에 어떤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었죠.
‘사랑? 이젠 돈으로 사겠어. 얼마면 돼. 얼마면 돼냐고’
한국의 이전 시대 대표미남인 원빈씨가 뱉었던 대사인데요, 이 당시만 하더라도 이 대사는 사랑이라는 신성한 가치를 돈이라는 낮은 가치의 것으로 해결하려는 좋지 않은 모습을 그리는 대사였죠.
하지만 요즘은 어때요? 진짜 돈때문에 사랑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들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돈으로 사면 되지. 돈이면 진짜 다 살 수 있어. 이런 식의 사회가 되어버렸죠.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정말 더욱 악해지고 악해지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우리가 살아가니 어떻겠어요? 믿음의 길을 걷는 우리의 길은 수많은 박해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박해가 있음에도 우리가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음을 말합니다.
바로 14절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데요, 한번 읽어볼까요?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비장하게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믿음의 길에 정말 이렇게 어렵고 힘든 박해들이 있어. 그러나!!!
그러나는 언제 써요? 앞의 이야기랑 다른 이야기를 할 때 쓰잖아요?
그러면 분명 힘든일을 이겨낼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이야기해주겠죠?
어떻게 하래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래요. 그 배우고 확신한 일은 뭘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너가 누구한테 배웠는지를 알지 않냐.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가 배운것은 뭐고, 누구로부터 배웠을까요?
우리 오랜만에 다시 앞으로 돌아가봅시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자 이 말씀을 보면 알겠죠.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것은 뭐냐,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누구로부터 온거죠? 어머니와 외조모, 외할머니로부터 온 것입니다.
정리하면 무슨 이야기냐, 디모데야, 지금 삶에 이렇게 고난이 있고 힘들지만, 너 안에 뭐가 있냐, 믿음이 있지 않냐, 너희 어머니와 할머니가 너에게 가르쳐준 귀한 믿음이 있지 않냐.
그렇습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세상의 박해라는 거친 믿음의 길을 디모데가 걸어갈 수 있는 것은, 디모데가 이미 믿음을 배우고 확신했으며, 그 믿음은 작고 연약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이어진 아주 강력한 믿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의 토대가 있기 때문에 악한 이들의 공격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그 믿음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이어지는 말씀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5절을 봅시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디모데가 악한 이들의 박해를 견딜 수 있는 믿음,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전해진 강한 믿음의 원천은 바로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어머니로부터, 할머니로부터 말씀을 배웠기에, 그 말씀이 디모데에게 어머니와 할머니가 가진 거짓이 없는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했던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 그 말씀이라는 것이 뭘 준다고 하나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준다고 합니다.
말씀이 지혜를 준다는 것이죠. 자. 여기서 우리 하늘고 교사분들은 떠오르는 말씀이 있으시겠죠?
바로 지난주에 제가 하늘고에서 나누었던 시편 119편이 기억이 나셔야 합니다.
119편에서 시인은 말씀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 그 말씀이 자신에게 지혜를 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라는 것이 우리를 똑똑하게 하는, 무슨 우리를 멘사 회원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지혜냐? 그런게 아닙니다.
바로 잠언에서 말하는 유명한 말씀 있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명철이라고 잠언 말씀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결국 바울이 말하는 말씀의 지혜는 뭐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 15절에 넣어보자구요. 말씀은 디모데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다시 자세히 보자구요. 말씀은, 즉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준다. 그 사이에 뭐가 더 있죠? 어떤게 있나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렇습니다. 바울은 시편 119편의 시인의 고백에 한가지를 더 넣어줍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넣고 있는 것이죠.
시인은 말씀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더욱 잘 알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면,
바울은 거기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말씀을 사랑한다는 게 그럼 뭐냐,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이쯤에서 생각나는 말씀 한 구절이 있으실 것 같아요.
바로 요한복음의 말씀이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말씀이 곧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과 일맥상통하죠. 말씀을 잘 알고 배워 확신하면, 박해를 이겨내고 하나님을 알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 이야기의 말씀에 예수님을 넣으면 어떤 결론으로 맺어지는거에요? 예수님을 믿어야지, 예수님을 사랑해야지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알아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핍박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곧 말씀이시기에 이어지는 16절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죠.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말씀이 곧 성자 하나님이시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놀라운 감동이 있을 수 있겠죠.
그리고 그것을 바르게 교육하고 믿을 때, 17절의 말씀으로 이어지죠.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해질 수 있다. 모든 선한 능력을 갖출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뭐에요? 말씀이 있어야,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알고 믿어야, 하나님의 사람이 구원을 받아 온전히 선한 자가 되어서 선한 능력을 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모든 게 풀렸죠. 디모데가 세상의 여러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을 버티며 걸어갈 수 있는 것은, 그가 말씀을 알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굳은 믿음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었고, 결국에는 온전히 거듭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한 능력을 행할 수 있게 되었기 떄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말씀을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묵상하며 그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 안에 깊이 거해야, 여러 악한 이들의 공격과 핍박, 특히 우리 안에 거하는 적그리스도로부터도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말씀 안에 얼마나 깊이 거하고 계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말세가 오면 올수록 말씀에 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말씀의 자리에서 떠나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 그 자체를 사랑해서 읽고 묵상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위해 말씀을 본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이런거에요. 우리가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대표적인 사랑의 모습, 연애에 비유를 해봅시다.
여러분들이 연애를 하는데,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자주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자꾸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고, 우리 집안 이야기만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상대방은 나를 진짜 사랑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내가 아니라 나를 통해서 우리 집안의 어떤 것을 얻으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거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말씀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통해 다른 것을 얻으려고 한다는 거에요.
나의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말씀을 찾고, 나의 삶에서 어떤 선택지를 고르기 위해 말씀을 찾고 이런 식으로 말씀을 이용하려는 모습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말씀을 사랑하는 이의 모습은 아니겠죠. 그렇게 말씀을 보면 마음 심란할 때 절에 가서 스님 말씀 듣는 거랑 다를게 뭐겠어요.
여러분. 말씀은 여러분들의 어떤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말씀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그럼 뭘 위한 것이냐,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착각하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이 우리가 잘 살라고, 우리가 삶에서 누리며 살라고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에요.
물론 그 자체가 틀리지는 않습니다. 맞아요. 말씀을 잘 읽고 묵상하면,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세상 속에서도 올바르게 살 수 있어요.
근데 그건 말씀이 주는 부가적인 효과일 뿐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통해 원하시는 궁극적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한가지 명령이 있죠. 그게 뭐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말씀을 통해 주님 나라가 전파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에게,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진리이신 주님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이 땅에서 편하게 살아라, 누리면서 살아라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하셨어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해 고난을 받을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너희가 박해를 받을 것이다.
절대로 주님은 우리가 편하게 누리라고 이야기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이 말씀이 우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 이 땅에서 잘 살게 하기 위해 있는 것마냥 말씀을 우리의 삶을 위해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목적은 그게 아닙니다. 말씀은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래서 기꺼이 고난을 겪고,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그래서 말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어요? 우리에게 고난이 올지라도, 그래서 세상을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말씀의 목적,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그 가운데서 주님을 높이는 것,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말씀이 되셨다는 것도 이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셨지만, 그의 제자들이 편하게 살도록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의 제자들은 거의 모두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말하는 진짜 의미가 나 자신이 잘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임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말씀을 사랑하시나요? 그렇다면 말씀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위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비록 그 길은 고난과 박해가 있는 삶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그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유혹하고 힘들게 하는 수많은 적그리스도들과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승리하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거하는 우리는, 결국 이 땅 가운데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이고, 결국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이 되어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임 공동체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말씀을 사랑함으로, 나 개인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위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 : 하나님 말씀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