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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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부름
예배의 부름
삼위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함께 묵상 기도를 드리심으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아멘
사도신경
사도신경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찬송가 10장
찬송가 10장
합심기도
합심기도
1. 주일 말씀을 기억하면서 거듭남의 은혜를 위하여, 거듭남 이후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2.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믿음의 가정, 행복한 가정, 건강한 가정들이 되길 기도해주시고
3 새롭게 신설된 영아부의 은혜, 성장, 부흥을 위해 - 특별히 헌신된 교사들과, 함께 할 가정들을 위하여
4 예배의 부흥, 주일밤 예배, 주중예배의 불씨를 살려내시고, 부흥케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5 또한 비전스쿨 준비에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증축 남은 공사가 잘 마무리되어 만족한 공간으로 사용되길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7 담임목사 오늘부터 한주간 제주 포도나무 신학원에 선교강의를 위해 출타하십니다. 과정 가운데 은혜 충만, 성령 충만, 영육 간의 강건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8 사역자들, 직분자들, 리더, 멘토, 교사들 성령충만 은혜충만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9 몸과 영혼이 연약한 지체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10 나라의 안보와 경제를 지켜주고, 안정을 되찾도록
11 마지막으로 협력 선교 현장의 부흥을 위해
모든 기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말씀
본문 말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서론
서론
공동체의 무너짐
공동체가 깨어져 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교회, 가정, 직장 또는 아주 사적인 친구들과의 모임도 좋다.
끝도 없는 갈등 가운데 산산조각 무너지던가,
어느샌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불편이 쌓여 자연스럽게 멀어졌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물리적인 이유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었던가.
만약 여러분이 살아오는 동안 그런 경험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된 인생을 살아오신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인간은 공동체의 깨어짐을 겪게 되며, 새로운 공동체를 또 다시 찾게 된다.
그렇다면 왜 공동체는 무너지는가?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이유만큼이나 다양한 해체의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은 그 중 우리가 가장 쉽게 경험하며, 그렇기 때문에 주의해야하는 문제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20대 초반 분열된 우리 교회
20대 초반 어느 시점에, 내가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교회에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 너 명의 사람들이 모인 것에 아주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 이상한 일이란 바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비난이 시작된다는 것,
즉, 전문용어로 뒷담화가 시작 된다는 것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모이면 자연스럽게 그런 대화가 시작됐다.
보통 뒷담화의 대상은 교회의 리더들이었지만,
그런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지속되자 목사님파, 장로님파, 성가대장님파 등으로 갈라서서
다른 파에 대한 뒷담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유튜브가 알고리즘 때문에 내 성향에 맞는 영상만을 반복해서 보게 되듯이,
뒷담화에는 알고리즘이 있어서 불만을 내 뱉은 내 주변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가까워지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멀어지게 된다.
그 중에 나는 뒷담화 하는 교인들에 대한 불만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어느샌가 같은 불만을 가진 성도들이 내 주변에서 뒷담화하는 교인들을 뒷담화하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숨어서 돌던 비난이 각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던져지기 시작했다.
뒷담화가 모여 몇 사람의 동의를 얻기 시작하자 어느새 불평이 정의가 된 것이다.
종국에는 목사님의 설교시간에 벌떡 일어나 설교내용을 큰 소리로 비판하시는 분도 생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는 여러 조각으로 분열되었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이렇게 된 것이 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우리는 자신 만이 유일한 정의의 대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각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은 모두 다 비난 받을 행동을 한 상대들의 탓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본론
본론
오늘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너무 명확하다.
너무 명확해서 잘못 이해하거나, 다른 숨어있는 의미를 발견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서로를 비판하지 말아야한다.
마태복음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판을 하는 자는 비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누구의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인가? 다른 사람의 비판인가?
만약 그렇다면 내가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던 것은 정의로운 일이 맞앗을 것이다.
와, 그 교회에서 역시 나만 올바른 사람이었다.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원어에서 사용된 비판은 ‘죄에 대하여 정죄하고 심판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상대의 옳고 그름, 죄와 선을 구별하여 판단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며 얻으려 했던 그 지.혜. 아닌가?
온 인류를 죄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 원죄.
비판하는 자는 감히 심판의 대상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했던 그 자리에 앉으려했던 것과 같은 실수를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5장 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야고보서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매우 유사한 말씀이지만 의미가 좀 더 명확하다.
서로 원망하는 형제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심판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우리의 형제들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상대에게 들렸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5장에는 마음에 죄를 품는 자마다 죄를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6장에서는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끼리 하는 뒷담화 또한 상대에게 안들렸다고 해서 이 심판에서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
뿐 만 아나리 한번 동조를 얻은 비판을 우리는 얼마나 정당화하게 되는가.
대상이 또 비슷한 모습을 보였을 때, 이해하려는 노력없이 우리는 ‘역시 저 사람은…’하며 비판하기를 마땅히 여기게 된다.
참 무서운 일이다. 이해하려는 노력까지 멈추면 남는 것은 미움 뿐 아니겠는가?
때로는 앞에서 하는 직설적인 비판보다, 돌고 돌아 들어오는 비난이 더욱 우리 마음을 상처 입힌 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단순히 배신감 때문이 아니다.
내 앞에서는 차마 못할 솔직한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귀에 한 번의 비난이 들렸다는 것은 내가 듣지 못한 수십 수백 배의 비난이 퍼져있음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나무에 감이 열렸다면, 그 열린 가지만 가을이 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가을이 왔다는 뜻인 것처럼 말이다.
이토록 명확한 명령이 왜 교회라는 공동체 내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말씀처럼 외면되고 있을까?
첫 번째, 이 비판이 상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3-5절에서 비판하는 일은 상대의 눈의 티를 빼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
정말 그런가?
눈 속의 티라고 표현한 것이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눈은 얼마나 예민한지, 작은 티끌이라도 하나 들어가면 자기 스스로가 따갑고 불편해서 빼고 싶어진다.
누가 나더러 티끌 빼라, 왜 안 빼냐 할 필요도 없다.
자기가 제일 잘 알고, 빼고 싶은 것이 눈 속에 티이다.
그런데 형제가 눈 속에 티가 들어갔는데도 빼지 않는다?
빼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실제로 티끌이 들어간 것이 아니거나,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비판을 상대방을 위한 일이라며 던지는 자들에 대해 5절 말씀에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외식하는 자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 중 핵심은 위선이다. 위선이란 무엇인가? 가짜 선이다.
상대방을 위한 충고라며 하는 그 부정적인 비판이 실제로는 상대에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위선이라는 것이다.
내 입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비판이 결코 사랑과 선의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인정하자.
비판은 다른 위선적인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남들과 나를 비교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상대를 죄를 들춤으로 마치 상대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처럼 자위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명백하다.
우리가 비판할 때 우리는 티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들보와 같이 명백한 잘못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비판하고자 하는 마음이 싹 틀 때,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비판의 마음은 결코 선하지 않다.
하나님은 각종 동물들의 특징에 따라 분별하여 이름을 지어주라는 선하고 생명력 있는 명령을 주셨지만,
뱀은 옳고 그름, 선악을 판단하는 자가 되라고 왜곡한다.
지체들의 아름다운 특별함이 아닌, 실수와 단점에 집중하는 것려는 마음은 사단이 주는 마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아이러니 하게도 진리의 말씀이 너무나 아름답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본문에서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 기준을 “거룩한 것”과 “진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교훈, 즉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보석보다도 참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값비싸고 귀하니까 다른 사람에게 자랑도 하고 싶고, 내가 깨달은 이 아름다운 진리로 다른 사람도 훈계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진주 목걸이를 가진 사람이 이것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품평하며 다닌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사람은 피부가 너무 검어서 안 어울리고, 저 사람은 목이 너무 두껍고,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이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를 가지고,
어울리지 않는 부분을 지적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지적을 듣고, 내가 피부톤을 저 사람의 진주 목걸이에 맞춰야겠다. 저 진주 목걸이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하고 생각하겠습니다.
그 목걸이 난 필요없으니 너나 해라 하지 않겠습니까?
심지어는 불쾌한 마음에 진주를 발로 밟아 부수고, 목걸이의 주인마저 공격하려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을 손에 높이 들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는 것은 말씀을 잘못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귀한 보석 같은 말씀을 나에게 주셨다면, 나는 그것을 손에 들 것이 아니라 내 목에 착용해야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이 선 검과 같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이 날카로운 검 앞에 선 자들이다. 이 검이 나의 더러운 것, 회개할 것, 돌이킬 것을 날카롭게 도려낸다.
잘려가고 깎여져 가고, 다듬어져 갈 때, 비록 생살을 찢는 것 마냥 힘들고 아프겠지만 우리는 말씀 앞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간다.
그런데 이 날카로운 검의 손잡이를 내가 쥐고 이웃들에게 휘두르려 한다면 성화를 이루기 위해 주신 검이, 그저 정죄를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마다의 사람을 세워가시는 방법과 과정이 너무나 다릅니다.
세상의 지식은 시기마다 배워야하는 진도가 있습니다면, 이 하나님의 학교는 꼭 그렇지많은 않습니다.
누군가는 사랑부터 다루시는 때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에게는 희락부터, 온유함부터 다루십니다.
학생들과 청년들을 담당하여 사역하다보면, 때때로 40년을 신앙생활 해 온 저보다 어떠한 영역에서는 저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는 합니다.
어떤 청년은 새로운 사람들을 환영할 때 어설프고 낯가리는 저보다 훨씬 여유 있고 성숙한 태도를 보여주곤 합니다.
어떤 청년은 어찌나 성실한지 맡겨놓고 저조차 잊고 있었던 일들을 매번 놓치지 않고 충성스럽게 해냅니다.
어떤 청년이 가진 겸손함은 아마도 제가 평생을 가도 따라잡지 못할 것만 같아 놀랍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여정을 가고 있지만, 각자가 걸어가는 과정이 순서가 조금씩 다른 것입니다.
기회가 되어 제가 알게 된 것을 나누고 가르치지만, 지금 당장 청년들이 저처럼 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당장은 그들처럼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언젠가 그들이 제가 가르쳐준 영역의 성숙을 이루어야할 인생의 순서가 왔을 때,
제가 나누었던 것이 기억나서 조금은덜 고생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저의 엄청난 말씀 선포와 가르침으로 청년들을 싹다 뒤집어놓겠다는 조급함에서 자유할 수 있어서
요즘 청년부 사역자로서의 사는 것이 얼마나 평안하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주 보혈 아래에서 우리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나를 향한 정죄함에서 자유할 뿐 아니라, 상대를 향해 정죄하고자 하는 유혹에서도 자유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희 첫 아이 모아가 처음 태어난 모습을 봤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눈 코 입도 뭉뜽그려있고, 피부는 양수에 팅팅 부어서 붉으면서도 창백하며, 눈도 못 뜨는 그 못생긴 아기를 보며, 그 존재 자체로 감격하고 기뻤던 순간이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걷지도 기지 못한다고 불평하지 않았고, 아빠를 알아보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서운하지도 않았습니다.
웃기는 커녕 울 줄 밖에 모른다고 그만 울라고 윽박 지르거나 혼내야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중 가장 하나님의 시선과 닮아 있는 것이 바로 이 갓난 아기를 바라보는 시선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전혀 사랑스럽지 않을 때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볼 때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해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노래하시며 기뻐하신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서로를 바라봅시다.
우리는 때떄로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사랑할 때 콩깍지가 씌였다고 말합니다만,
사실은 우리 눈 안에 들보를 걷어내고 제대로 바라볼 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오해가 벗겨지고 감격함으로 서로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뒤에서 비난의 알고리즘이 쌓이지 않게 합시다.
돌고 돌아 들린 비난이 우리에게 큰 상처를 주는 것처럼
돌고 돌아 들려오는 축복과, 사랑의 말과, 칭찬의 말들은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합니까?
비판을 끊어내고 축복을 전파합시다.
정죄를 멈추고, 사랑과 감격을 고백합시다.
그리스도가 먼저 본을 보이신 사랑으로 갈라지고 무너져가는 회복시키는 하늘사랑의교회가 되길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의 말씀을 가르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죄성과 위선으로 인해 많은 지체들을 정죄하고 비판하였음을 회개합니다.
주님의 심판의 자리에 올라서려는 교만을 끊으시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을 허락하소서.
우리 눈에서 정죄와 비판의 들보를 걷어내시고, 사랑과 감격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하소서.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결단한 우리 하늘사랑의교회 모든 성도들이 서로의 입술에서 나오는 축복의 말들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덕을 세우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며, 십자가로 사랑의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신 말씀과 각자의 기도 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