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자의 복

이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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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온유한 자의 복은 사람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만이 소유하는 독특한 성품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다 예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1.온유란 무엇인가
먼저, 온유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절)
본문에 온유라고 번역된 헬라어로 ‘짐승을 길들여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굉장히 부드럽고 나약하고 순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는 ‘온유하다, 겸손하다, 이해심이 있고 예의 바르다’라는 뜻으로 서로 혼용하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는 우리가 세상적으로 이해하는 온유와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겠습니다.
온유라는 것은 무엇보다 가난한 마음과 애통에서 비롯되는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애통하게 되고, 또 애통하다 보니까 온유한 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온유는 산상수훈 첫 번째 복인 가난한 마음에서 먼저 비롯되는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통곡하고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니까 ‘정말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하고 나아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울게 되고 슬퍼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두 번째 복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자기의 죄에 대해 그렇게 애통할 때, 자기가 정말 가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며 울 때 생깁니다. 그래서 자기에 대해서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 세상의 죄악 때문에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온유함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에 대해서 절망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정말 안 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비하나 저주가 아닙니다. 자기의 진짜 모습, 자기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더러운 모습 때문에 정말로 절망하며 ‘하나님 밖에는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이러한 나를 고쳐 주실 분이 없습니다.’ 하고 나오는 것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천국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그저 와서 한 시간 정도 있다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예배이고, 공 예배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무가치한 존재가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 앞에 가는 것, 감히 그 앞에 갈 수도 없는 그분께 자신을 드리는 것, 그분의 한없는 은혜와 자비의 옷을 입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의 거룩함을 바라보는 그러한 마음, 즉 온유가 없다면 우리 예배는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되지 못하고 자꾸 사람이 드러나는 예배가 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참된 예수님의 제자는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애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사모하면서 예배하며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 영광에 동참할 때 그 결과로 우리의 마음이 온유해지고 온유한 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만 믿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나는 천국 간다. 예수님 믿었으니 구원받았다. 영생을 얻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그것은 ‘받은 구원’ 즉 영이 구원받은 것인데, ‘받는 구원’이 있다는 걸 모릅니다. 지금 성화의 과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도 믿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산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지금 주인으로는 믿고 있지 않는 겁니다. 구주로 믿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되는데,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기가 다 책임지며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해야 하니까 피곤하고 힘듭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진정한 온유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하는 것에 대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온유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지만, 드러나는 것은 사람 앞에서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하는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온유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2. 성경에 나오는 온유한 사람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실제로 온유했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의 대표로 나오는 사람이 구약에서는 모세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세가 원래 상처가 굉장히 많은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태어날 때쯤 히브리인에게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다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고 바로 왕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근데 그를 죽이진 못하고 바구니에 담아서 강에 떠내려 보냈을 때 마침 바로의 딸 이집트 공주가 그걸 보고 입양해서 왕궁에서 왕자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히브리 출신 것을 아는데 이집트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과 배척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또 안락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긴 했지만 그에게는 늘 감추어진 분노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자기 민족을 위하겠다고 나가서 이집트 노동 감독관 한 명을 쳐 죽이고 결국 살인자가 되어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다루시니까 그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혈기가 넘치는 사람, 남을 때려죽일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쓱 만지시고 다루시니까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항상 어떤 사람을 쓰시기 전에 먼저 쓱 만지시고 다루시는 일부터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첫 40년 동안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로 자라게 하셨고, 다음 40년 동안에는 광야에서 양치기로 장인의 양을 치는 양치기가 되게 하셔서 그를 거기서 온유하게 빚으셨습니다. 그 광야 40년 동안 온유한 사람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광야에서 모세는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정말 그에게는 복이었습니다. 이 40년이 힘든 기간이었지만, 그의 인생에는 정말 복된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구스 여자의 일로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의 비방을 받았습니다. 근데 놀랍게도 모세가 거기에 별 대응을 하지 않습니다. 싸우거나 막 변명하지 않고 오히려 묵묵히 참으며 인내하고 또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라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고 그걸 기록하라 해서 기록한 겁니다.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온유가 예수님의 성품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리시기 전에 베드로가 칼을 들고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 중 하나인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잘랐는데, 예수님은 ‘칼을 도로 칼집에 집어넣으라.’ 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천군천사를 불러서 이것을 못 막을 줄 아느냐? 그런데 나는 아버지가 주신 잔을 마시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밑에서 ‘남들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못 구원하네?’라고 하며 마구 조롱하고 놀리며 약을 올립니다. 그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올 힘이 없으십니까? 있으십니다. 앞에서 깐족거리고 막 약 올리니까 얼마나 밉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 마저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그렇게 할 힘이 없어서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구원하셔야 하기에 너무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온유입니다. 바로 이렇게 나를 위해서는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힘을 사용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3.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
온유한 사람이 어떤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까?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말인데, 다시 말해 땅 즉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땅을 받는다거나 어디서 땅이 뚝 떨어진다는 게 아니라, 세상을 정복하게 된다는 것, 다시 말해 세상에서 진정한 성공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의 정복, 세상의 정복이 온유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강한 자가 무력이나 폭력이나 자기가 가진 힘으로 정복하는 게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땅을 정복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편 37편에 똑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시 37:11).
예수님이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군사적인 침략과 정치적인 압제와 경제적인 빈곤과 사회적 혼란에서 자기들을 해방해줄 정치적 메시아, 강한 메시아, 군사를 이끌고 나오는 그러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물질적일 뿐 아니라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천국관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은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자기들의 해방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즘과도 굉장히 비슷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떤 싸우는 걸 통해 뭔가 자기 뭔가 쟁취하는 것을 통해서, 집단의 힘을 통해서, 돈의 힘을 통해서 세상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기대와 정반대로 천국은 침략이나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강한 힘을 가진 영웅이나 군사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이라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개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겁니다.
지금 여러분 대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온유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 험한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출세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온유하면 안 된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면서 일을 척척 해야 한다. 온유하면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십시오. 실제로 역사를 지배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같은 사람들이 잠깐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것 같았습니다. 승리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철저한 패배였습니다. 그들 중에 지금 인류를 지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에서 무능한 것처럼 죽임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여러분과 저의 마음을 사로잡고 계시고, 지금도 온 세계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온유의 능력이고 온유의 복입니다.
공산주의는 사람들의 마음에 미움을 일으켜서 세상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계급 투쟁을 통해서, 미움의 힘을 통해서 전 세계의 아주 큰 영역을 차지했습니다. 테러리스트도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적개심을 부추겨서 테러를 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미움에도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움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한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 진정한 성공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만이 땅을 차지한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성공의 기준이 다릅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성공을 할 것이냐,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을 좇아갈 것이냐?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도 좋지만 얼마 못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성공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어떻게 하면 온유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온유해질 수 있을 것인가?
먼저는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온유한 성품이 원래 없습니다. 혹시 있더라도 그 사람을 구별해서 온유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강퍅하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온유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 세리, 창기, 바리새인 등 모두에게 온유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만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에게까지도 온유를 보여주신 그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보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자기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시라고 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열등의식과 우월감에서 해방되고 마음의 상처의 치유를 받을 때 온유한 모습이 됩니다.
셋째로, 어떤 경우에도 내가 가진 힘을 나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누르면서 나의 이익을 챙기는 그런 일에 힘을 사용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긍휼을 의지하면서 힘을 절제하는 겁니다. 또 이기려 하지 말고 져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이기는 겁니다.
넷째로, 무엇보다 실질적으로 화를 안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는 분노와 화는 온유의 적입니다.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지금 내 주변에 혹시 화날 일이 많이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만이라도 화내는 일을 내가 포기한다고 선언해 보십시오. 그때 온유가 우리 안에 승리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온유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온유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만드시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온유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저 사람은 원래 온유한 사람이고 나는 아니야. 나는 성격이 강해.’라고 할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가능합니다.
이러한 온유함을 사모하며 나갈 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온유함을 주시고 그래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이 땅에서 성공하는 하늘의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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