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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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비웃음
웃음과 비웃음
유튜브에서 구독자 100만명을 보유한 한국인 코미디언이 있습니다. 코미꼬라고하는 채널을 운영하는 김병선 씨인데요, 이 분이 지금 멕시코로 이민을 가서 거기서 스페인어로 스탠드업코미디를 하시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올리는 농담을 보면 참 문화권이 다른데도 사람들을 웃기는 모습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튜버가 아무래도 활동하는 곳이 멕시코다 보니까 여러가지 인종차별적인 상황도 많이 마주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는 이 사람들이 아시아 국가들을 잘 모르다보니까 아시아 사람들만 보면 중국인이라고 하는 일이 발생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처음에는 막 “난 한국인이야!”라고 하면서 화를 내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직업처럼 그것을 웃음으로 승화해보자 라고 다짐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멕시코 사람들이 자신에게 인사할 때 “니하오!” 하게 되면, 자신도 똑같이 “니하오! 너 중국인이야?”라고 멕시코 사람들한테 했다고 해요. “뭔 소리야? 난 멕시코 사람인데,”라고 하면 “너가 중국말로 하니까 중국인인줄 알았지! 난 한국인인데”라고 대답하면서 비웃음과 인종차별을 기쁜 웃음으로 바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놀리는 비웃음과 기분 좋게 하는 웃음은 어찌보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계속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창세기 말씀을 통해서 보고 있는데요, 사라와 아브라함은 자신들에게 아들이 생길 것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드디어 이삭이 태어나게 되어서 정말 기쁜 웃음으로 바뀌게 되는데요, 그 비웃음과 웃음에 대한 말씀을 창세기 21장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삭=그가 웃기게 하다
이삭=그가 웃기게 하다
먼저 1-2절 말씀을 한번 보시면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던 사라의 임신과 출산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라고 되어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처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부터 하신 말씀이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고향집을 떠나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그런데 이때가 아브람이 칠십오세였다고 12장 4절에 말씀하시는데, 오늘 본문말씀 5절 말씀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칠십 오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것을 이루신 때가 아브라함이 백세일 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의 25년 걸린 것이죠. 인간이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안 이루어지는 것 같고, 기도가 안 이루어지는 것 같은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2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정말로 말씀하신 그대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갖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리고 사라가 그 태어난 아들에게 이삭이라고 지었는데요, 아브라함이 지은게 아니라 사라가 지었다 라고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먼저 하나님께서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 라고 말씀하시긴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름을 주는 행위 자체에는 권위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을 지은 것도 있지만 하갈 때에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는데, 이번에는 사라가 지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굳이 사라가 이삭이라고 이름을 지어야만 했을 까요?
먼저 이삭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을 보시면요 히브리어로 이쯔핰(יִצְחָק)이라고 하는데요, 이 단어는 짜핰(צָחַק)이라고 하는 동사, 웃다, 놀다 라고 하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이삭의 이름을 풀어보면 “그가 웃게 하다” 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모두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에 비웃었던 것을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 웃음은 명백하게 비웃음이죠. 여기서도 짜핰이라고 하는 동사가 쓰였는데, 이 때에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고나서는 어떻죠? 본문말씀 6절에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가 하나님께서 나를 웃게 만드셨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전에는 비웃음이었던 것이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말 기쁨으로 웃게 만드셨다, 라는 뜻에서 사라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짓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보시면 듣는 사람이 다 자신과 함께 웃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온 동네방네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을 만큼 큰 기쁨의 웃음이었다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
하갈과 이스마엘
그래서 정말로 이삭이 자라고 난 뒤에 큰 잔치를 베풂니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젖먹이에서 이제 젖을 떼고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크게 된 후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다 라고 하는데요,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게 됩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는 것을 사라가 보았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지요,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당장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버리세요! 이 종의 아들은 우리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을 받지 못하게 해야해요!”라고 이름도 언급하기 싫었는지 여종과 아들이라고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저희가 한가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정말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는가? 라는 점입니다.
9절에 놀렸다 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메짜헼(מְצַחֶ֑ק)이라고 읽는데요, 이 단어는 저희가 아까 살펴본 이삭, 그리고 웃다, 놀다 라는 뜻에서 사용된 짜핰이라고 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히브리어 성경인 마소라 본문에서는 9절에 “이삭을”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대신에 70인역 성경인 헬라어 성경에만 “이삭과 함께”라고 하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9절 말씀은 굉장히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본문이죠.
그래서 9절을 다시 읽어보면 하갈의 아들이 놀고 있었다, 웃고있었다,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니면 하갈의 아들이 이삭과 함께 놀고 있었다 웃고있었다 혹은 이삭에게 장난을 치거나 놀리고 있었다 등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아니면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이삭과 같은 동사라는 점에서 하갈의 아들이 이삭하고 있었다, 이삭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라는 해석도 가능해집니다. 아마 사라가 본 것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장면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스마엘이 웃고 있었든, 놀고 있었던, 장난을 치고 있었든지 간에 “나와 내 아들이 웃고 놀아야하는데, 저,저,저저 종의 아들이 웃고 놀고 앉았네?”하는 것이 9절에 사라가 본 것입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기쁨의 웃음이었던 잔치의 자리에서 사라는 이스마엘의 웃음을 본 것이 아니라 비웃음을 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결국 원래 온 동네방네에도 소문내서 함게 웃고자 했던 그 웃음이 비웃음으로 바뀌니까 아브라함에게도 근심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요 12-13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사라의 편을 들어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앗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 또한 아브라함의 씨앗이니 한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다, 라고 약속하십니다.
제가 여러분께 여러번 강조드린 것이 바로 고대 근동 사회의 상속 문제였는데요, 사라의 의도는 그 모든 상속을 이삭에게 몰아주기를 바란 것이었고, 실제로 아브라함의 자산은 이삭에게 몰아지게 됩니다. 이스마엘에게는 절대 상속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만 하갈과 이스마엘은 빵과 물 담은 가죽 부대 하나를 가지고 브엘세바 광야로 쫓겨나가게 됩니다.
그 이후에 15절부터 쭉 이어지는말씀을 보시면, 얼마 안가서 가죽부대의 물이 다 떨어지게 되죠. 그래서 이스마엘이 목말라 죽는 것을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다고 해서 덤불 아레에 내려다 놓고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서 아이가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막 우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셨다 라고 하갈에게 나타나십니다. 분명히 방금 운건 하갈이었는데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갈이 울었는데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었다고 하시면서 그 아이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무슨 또 여성차별을 하시는 걸까요? 하갈의 우는 소리는 듣지도 않으신 건가요?
그게 아니죠.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상속이 중요합니다. 하갈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하갈이 쫓겨나게된 그 근간, 이스마엘의 상속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18절에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시면서 샘물을 찾게 하시고 아이에게 마시게 하셨습니다. 또 나중에 이 이스마엘의 자손은 훗날에 게달 족속이라고 하는 아라비아 근방의 활 쏘는 유목민족으로 성장해서 성경에 다른 부분에도 종종 언급이 될 만큼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
그런데 여러분 지금까지 저희가 본 내용은 21장의 1-21절 말씀인데요, 22절부터의 말씀은 갑자기 생뚱맞게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은 정확히 말하면 20장 말씀에서 이어지거든요. 그래서 20장 읽고 바로 21장 22절을 읽기 시작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슨 지난 주에 이주혜 전도사님이 전하신 틈을 보이지 말라 라는 말씀으로 사라를 또 누이라고 속여서 아비멜렉에게 아내로 삼게 했었다가 다시 돌려받은 이후에 본문말씀 23절 말씀에,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비멜렉이 이제 나와 내 자손들을 속이지 말 것을 하나님 앞에서 나와 맹세하라 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맹세할게요 라고 24절에 말하는데요,
25절 말씀을 보시면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이 파놓은 우물을 빼앗았던것 같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맹세하긴 하는데 우리 정산할 건 정산해야죠?”하면서 아비멜렉을 책망하니까,
아비멜렉은 “아니 난 모르는 일인데? 지금 당신이 얘기해주니까 안거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서로 속이지 말것을 언약을 세우면서도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아서 30절에 “이 일곱 암양 새끼는 이 우물이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증하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언약의 맹세를 합니다. 서로 자자손손 속이지 말 것과, 이 우물이 아브라함 것이라는 것에 대한 언약이죠,
그리고 그 두사람이 맹세한 곳을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으로 브엘세바라고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브엘세바, 어디서 들어본 이름 아닌가요? 본문말씀 14절에 하갈이 방황했던 곳이 브엘세바 광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요?
한번 저희가 읽은 1-21절 말씀이 없었다고 상상해봅시다. 브엘세바라고 하는 곳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언약을 맺고 33절 말씀처럼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장소로만 기억되었을 겁니다. 그 와중에 고작 여종일 뿐인 하갈과 그 아들인 이스마엘이 아무런 상속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일은 사라가 이름도 부르기 싫어했던 것 만큼 저희 또한 모르고 지나쳤을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이야기를 지나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자 웃었는데, 이스마엘이 웃는 것은 비웃고 있는 그 비웃음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비웃음을 웃음으로 바꾸셨는데, 하갈과 이스마엘의 웃음을 비웃음으로 바꾸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좋은 맹세와 언약을 마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웃을 때에 그와 사라가 비웃으며 쫓아냈던 하갈과 이스마엘은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비웃음당하고 쫓겨났던 하갈과 이스마엘을 구원하시고, 결국 그 비웃음의 댓가로 비록 재산들, 이를테면 가축과 토지에 대한 상속은 온전히 이삭에게 물려줬을 지 몰라도 하나님의 상속은 이스마엘에게도 분배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애초에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어서 “나는 자녀 못낳으니까 하갈로 낳게 하세요”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결론
결론
오늘 어제, 그리고 수많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의 시간 동안 브엘세바에서의 아브라함처럼 저희는 기쁨으로 웃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저희가 웃으며 예배하는 사이에 저희가 누군가를 비웃음으로 사람들을 고통받게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합니다. 사라는 모두가 함께 웃기를 바랬지만 그 와중에 이스마엘의 웃음은 비웃으며 브엘세바 광야로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비웃음 당한 하갈과 이스마엘을 고통에서 다시 웃게 만드시는, 진정으로 낮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함께 기도하실 때에 먼저 저희가 웃으며 찬양하고 기도하지만, 혹여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삶가운데 비웃은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비웃으면 그건 그 비웃음 당한 사람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이삭의 지분을 떼어서 이스마엘에게도 상속시켜주심과 같이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시는 천국의 상속을 분할하는 일입니다. 정말 하늘의 상급을 바라신다면 비웃음보다는 함께 웃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허락해달라고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구요,
또한 하나님께서는 비웃음 당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우리 주변에 비웃음 당하는 이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 저희와 같은 죄인들에게 웃음을 주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달라고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구요,
어제 대선토론회를 보는데 아주 서로 비웃기 바쁘구나, 라는 생각이 참 많이 듭니다. 서로가 비웃기보다는 이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웃을 수 있도록 지혜롭고 겸손하게 통치하는 지도자가 나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