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허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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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적 허들링
[서론]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과잠을 입고 다니는 대학생들을 보았습니다.
굳이 과잠을 입지 않아도 되고, 집에 입을 옷도 많을 텐데, 왜 그 옷을 입고 다닐까 궁금했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소속감’과 ‘정체성’ 때문일 겁니다.
내가 어느 학교, 어느 학과에 속한 사람인지, 말하지 않아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과잠이죠.
과잠은 단순한 옷이 아닙니다.
그 옷을 입음으로써 나는 이곳에 속한 사람이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중, 고등학생일 때는 모두 교복을 입어야 했습니다.
정해진 규칙이고,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착용해야 했죠.
그런데도 우리는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교복을 벗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느 공간에서는 교복을 입은 채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볼링장이나 당구장 같은 곳에서는, 교복이 우리의 정체성을 방해하는 옷처럼 느껴졌던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어떤 조직에서는 유니폼이 자랑이 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군대입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음으로써 자신이 국가를 위한 사명을 가진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복장에 걸맞은 태도와 책임이 요구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질문해 봐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일까요?
우리의 유니폼은 무엇일까요?
혹시 제가 중, 고등학교때처럼 세상에 나갈때는 벗어던지고 싶은 그런 유니폼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여줄수 있을까요?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빌립보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첫번째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빌립보’라는 도시의 특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에서 유럽 대륙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관문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빌립보에서 옷감 장사인 루디아를 만나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현재 이곳은 그리스 북부에 위치해 있는 조용한 소도시입니다.
제가 예전에 독일에 있을때 선교차 방문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매우 작고 조용한 도시지만 유적지 사진을 보시면 당시에는 화려하고 웅장했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여러 도시들을 연결하는 군사도로이자 상업도로인 ‘비아 에그나티아’라고 불리는 도로가 있었습니다.
그 긴 도로 위에 있는 도시들중 하나가 바로 빌립보입니다.
그만큼 군사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퇴역 군인들이 많이 정착한 곳이기도 합니다.
로마 황제는 그들에게 보상으로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빌립보를 ‘작은 로마’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그곳은 로마의 문화를 그대로 따르며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로 자리잡았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을 얻는 것은 지금의 미국 시민권보다 훨씬 더 엄청난 특권입니다.
로마 시민은 적법한 재판없이 체포당하지 않으며, 억울하면 황제에게 항소도 할수 있었습니다.
또한 각종 세금 감면도 주어졌습니다.
다른 민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빌립보 사람들은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그럼 이런 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극히 소수의 소외된 계층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핍박과 박해를 받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그곳은 소로마로 불릴 정도로 로마 황제를 숭배하던 도시입니다.
그들에게 로마 황제는 단순한 왕이 아니라 그들에게 모든 것을 준 하나님의 아들, 즉 신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황제에 대한 도전이자 반역으로 여겨져 핍박과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말씀의 시작인 1장 2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단호하게 명령합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럼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곧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의 실체이며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시리시는 분이 오직 예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빌립보에 살고 있지만 진짜 주인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복음’이라는 유니폼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 유니폼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요청합니다.
눈을 돌리면 온통 황제의 우상으로 가득찬 빌립보에서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살아가라는 도전입니다.
그럼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빌립보와 다를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도 수많은 우상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좀 더 세련되고 익숙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어 우리가 쉽게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장한평역 근처의 로또가게를 보십시오.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며 마치 돈이 인생을 구원할 것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1등 몇번 나온 곳 이런 문구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우리의 마음을 빼았습니다.
그곳에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신전 앞에 모인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나도 그 뒤에 줄을 서고 싶은 욕망을 자극합니다.
또한 최근에 손흥민이 유로파 리그에서 우승했을때 사람들의 열광하는 모습을 보셨나요?
영국에서 축구는 이미 스포츠가 아닌 종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종교의 열렬한 신도로서 토트넘의 유니폼을 입고 미쳐버립니다.
그것뿐입니까?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의 숏츠 영상은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어느날 조용히 지하철을 한번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모두 머리를 박고 열심히 핸드폰 영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종교 예식에 몰입한 신도들의 모습같아 보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사랑과 관심, 시간과 욕망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이 시대의 우상들입니다.
이러한 우상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에 속해있는지 우리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적외선 렌즈와도 같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실상은 우상으로 가득찬 세상의 정체를 볼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제국 속에서 천국 시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본론]
그럼 과연 천국, 즉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사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일까요?
성경은 두가지 삶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첫번째,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사는 삶이란 함께 싸워나가는 삶입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마치 전쟁터에서 군인들에게 앞으로 전진하라고 외치는 장군의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여기에 나온 ‘함께 싸우라’는 동사는 로마 군사들이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는 모습을 묘사한 단어입니다.
고전 전쟁영화를 보면 로마 군사들이 일렬로 서서 방패를 맞대고, 창을 들어 앞으로 전진합니다.
이처럼 군사들이 발을 맞추어 움직일때 어떤 적도 쉽게 뚫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모습으로 세상과 싸워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을 거부하여 숨어지내거나 세상을 힘으로 정복하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다가 부딪히게 되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혼자서 싸우는게 아닙니다.
교회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로마 병사가 혼자 있으면 무너질수 있지만 여러명의 병사들이 발을 맞추어 함께 나아가면 어떠한 적의 공격도 막아낼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바로 이런 영적인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삶이 쉬운 삶이었을까요?
손해를 감수하고 미움을 받고 조롱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강해도 정말 어려운 삶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함께 걷는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삶이야 말로 구원받은 증거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복음을 위해 손해와 미움을 감수하며 살수 있을까요?
어떤 삶을 사느냐가 우리가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증명합니다.
예수님만 부른다고 구원받은게 아닙니다.
교회만 다닌다고 구원받았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지만 고난을 견딜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29절입니다.
믿음도 은혜이고, 고난도 은혜입니다.
새번역에서는 은혜를 ‘특권’이라고 표현합니다.
복음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은혜의 특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인해 우리 삶에 고난이 있습니까?
믿음대로 살다가 손해 본 일이 있습니까?
믿음대로 살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거나 미련하게 산다며 조롱받은 일이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런 공개적인 박해가 없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고난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제가 교회를 올때마다 꼭 지나가는 아파트가 있습니다.
원베일리 래미안 아파트인데요.
24평인데 가격이 무려 40억이 넘습니다.
일반 직장인들은 평생 일해도 살수 없는 집입니다.
설령 살수 있을때가 되더라도 아마 죽어서 관에 들어가는 순간일 겁니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암호화폐나 주식에 투자해서 한방에 부자가 되려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짜증나면서도 또다른 한편으로는 은밀한 욕망이 꿈틀거릴 때가 있습니다.
믿음대로 사는 삶이 초라해 보이고, 손해보는 것 같고, 미련한 것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 우리가 세상 가치관을 따르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 자체가 믿음의 싸움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
이런 삶이야 말로 구원의 증거이며 복음을 위해 싸우는 삶입니다.
이처럼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교회 밖에서는 세상과의 믿음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가지가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사는 삶이란 성도들과 연합하는 삶입니다.
우상의 유혹이 판치고, 핍박과 고난의 시험이 있는 세상과 싸우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성도들의 연합입니다.
안으로 똘똘 뭉치지 않고는 세상의 큰 위협과 도전을 이겨낼수 없습니다.
바울이 연합을 강조하는 이유는 교회 내부에 분열의 기운이 있기 때문입니다.
4장 2절을 보면 빌립보 교회의 두 여성 지도자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이 언급됩니다.
어떤 문제인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분명히 공동체의 연합을 위협하는 갈등이었을 것입니다.
2장 3절을 보면 다툼은 경쟁심과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이런 죄들의 뿌리는 결국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해결책으로 겸손을 강조합니다.
이기심은 내 이익만 좇는 태도라면, 겸손은 남의 유익을 더 귀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럼 그냥 어떤 경우든 자신을 마구 낮추는게 겸손일까요?
“당신이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겸손일까요?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만 하는게 겸손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겸손이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와 연약함을 정확히 직면할때, 다른 사람을 판단의 대상이 아닌 긍휼의 대상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말합니다.
같은 생각, 같은 사랑, 뜻을 합해 한 마음이 되라고 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려면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도 얼마나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까?
넬슨 만델라가 감옥에서 27년을 살았고, 40도가 넘는 사막에서 강제노역도 견뎠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6개월만에 아내와 이혼했습니다.
그만큼 사람사이의 갈등을 이겨내기가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공감보다는 판단에 익숙하고,
기도보다는 비난에 빠르며,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는 내 권리와 입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겸손하게 한 마음으로 연합할수 있을까요?
내 힘으로, 내 의지로 안됩니다.
이 비결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2장 1절입니다.
그리스도의 격려,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가 등장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견뎌내는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격려가 있습니다.
또한 자주 넘어지지만 우리를 조건없이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시며, 한 마음으로 나아갈수 있게 도우시는 성령의 교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향한 겸손이 흘러나옵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를 작게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를 잊어버리고 주님을 계속 바라보는 것입니다.
물론 겸손이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이런 겸손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넘어지고, 함께 일어나며 조금씩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서로를 낮게 여기지 않고, 서로를 더 낫게 여기는 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자신의 책 ‘겸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겸손은 피조물인 인간이 돌아가야 할 본래의 자리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일그러진 자아를 새롭게 빚으셔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도록 변화시켜 주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전에 황제 펭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습니다.
거기보니까 극한의 추위를 이겨내는 그들만의 방법이 있었습니다.
허들링이라고 부르는데요.
펭귄들이 서로 모여서 큰 원을 그려가며 조금씩 움직입니다.
그때 안에 있던 펭귄은 밖으로 빠지고, 추위에 떨던 밖에 있던 펭귄이 안으로 들어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위치를 서로 바꿉니다.
이런 식으로 영하 50도가 넘는 추위를 견뎌냅니다.
그 모습을 보며 교회 공동체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거센 바람이 불어닥치는 영하 50도의 추위처럼 매섭기만 합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진리를 붙드는 것이 손해처럼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게 쉽지 않습니다.
함께 싸우는 용기와 함께 연합하는 겸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누군가 지치고 힘들어 할때, 우리는 황제 펭귄처럼 그 사람을 안으로 품어줘야 합니다.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겸손의 마음으로 서로를 더 낫게 여기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 하나님 나라 시민의 삶입니다.
함께 품고, 함께 버티며 영적 허들링을 회복하는 우리 함께걷는 교회 식구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