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18 주일오후예배: 창세기 1:26-31; 2:7;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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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26-31; 2:7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함께 보겠습니다. 제3주일 6문입니다. 제가 질문을 하면 함께 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3주일
6문: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또한 자신의 형상, 곧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살고, 그리하여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항상 주님의 은총을 받는 여러분. 오늘도 말씀의 자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난 한 주도 우리를 지켜주시고, 오늘도 이 예배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음을 고백하며, 우리를 언제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초대하시는 이 말씀의 자리로 함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성경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시고 좋으신 분이신지 말씀을 통해 깨달았는데요. 오늘부터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말씀, 즉 ‘인간론’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근대와 현대를 지나면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생각, 관념, 가치관은 인간 그 자체로 존엄하고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권의 중요성과 인간의 가치는 현대 사회를 말할 때 결코 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공평하고도 공정하게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는 것은 누구나 다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간에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관련된 모든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가지는 질문은 바로 “과연 인간은 누구인가?”입니다. 이 질문에서 시작하여 인간은 어디서 왔는지, 인간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의 미래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다양한 학문들이 이 질문들을 다룹니다. 이전에 철학에서 인간학이라는 것도 있었으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학문인 심리학도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내면의 삶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인간이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심리로 행동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사회학은 인간의 삶과 관련해서 사회적 관계라는 관점을 가지고 인간을 연구합니다. 법학, 의학, 그리고 윤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두가 인간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하는 학문들입니다. 이 모든 학문들이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학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과는 다른 인간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신학의 목적 또한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성경의 관점에서 인간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만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과 결코 떼어놓고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하나님을 한번도 언급하지 않고 인간 그 자체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현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우리 자체 안에서 우리가 가치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거나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떼어놓고 하나님 없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우리 입장에서 심지어 하나님을 판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결국 하나님 앞에 우리는 단독자 혹은 독립자로 여기게 됩니다. 현대의 가치관에 세례를 받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으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 생각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정의하고 계신지,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 없이 인간을 결코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 성경이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지 이 시간 선포할텐데요. 오늘은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단독자? 절대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 기록된 창세기의 시작, 성경의 시작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도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 피조물이며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근원을 두고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되지 않으신 유일하신 분이시며 유일하게 어디에도 근원을 두지 않는 절대자이시며 그분이 오히려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창조물입니다. 여기에서부터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다른 창조물들도 만드셨는데, 인간 외의 다른 창조물들과 인간은 차이가 없는 것일까요? 모두가 똑같은 창조물이기만 할까요? 정답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인간과 인간 외의 창조물들은 구별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쉽게 말해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하나님을 닮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외모를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반영하는 존재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인간 창조에 있어서 아주 독특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자기 자신 안에서 먼저 숙고하셨다는 점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있으라”라고 하시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만큼은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하시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고대 근동의 세계관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지금 현대의 대통령과는 아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을 우리가 뽑은 국가의 지도자 또는 원수로 여기지만, 고대 근동 때에 살던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을 단순히 통치자의 개념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신의 아들, 즉 신의 형상으로 여겼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형상과 모양은 언제나 사람들이 만든 신의 이미지와 관련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의 형상이 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왕은 단순히 인간 왕이 통치하는 것을 넘어서서 신이 다스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고대 근동의 전쟁도 무슨 전쟁이었습니까? 바로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승리한 국가의 신이 패전국의 신보다 더 강한 신이라는 관념을 고대 근동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과 인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으로 고대 근동 사람들은 인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그 이외에 고대 근동 사람들 간의 차이는 없었던 것일까요? 둘 다 똑같이 인간에 대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고대 근동의 사상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도와주지만, 동시에 성경은 다른 종교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가치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바로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생각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만이 신의 형상이었지만, 성경은 왕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가르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께서 아주 존귀한 존재로 지으셨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고대 근동의 신화와 성경의 가르침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현대인인 우리에게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냥 단순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다른 피조물들과는 구별된 존귀한 존재라고만 인식하지만, 당시 고대 근동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늘 말씀은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대 근동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가치와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가치는 확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고대 근동의 신화로 에누마 엘리쉬가 있습니다. 이 신화는 메소포타미아 신화 중 앗수르와 바벨론의 종교적 서사시인데, 최고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창세 신화입니다. 여기에 보면 고대 근동인들이 인간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에누마 엘리쉬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신들의 아버지인 압수라는 존재가 자신의 자손인 누딤무드의 소란에 괴로워하자 그의 시종을 앞세워 누딤무드 일당들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 계획은 쉽게 말해 자신의 자식들을 다 죽이는 계획입니다. 본인의 자식인 젊은 신들이 시끄럽게 돌아다니는 것으로 자신을 괴롭게 하니 죽인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영웅 신인 에아라는 존재에게 새어나갔고, 에아는 오히려 압수를 죽이고 그의 왕권을 탈취하여 왕권을 쟁취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압수의 아내인 티아마트라는 신이 남편의 죽음에 분노하여 에아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였고, 에아의 자식인 마르두크가 티아마트를 죽이고 신들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마르두크는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하는데요. 어떻게 창조하냐면 티아마트의 시체를 반으로 가른 다음 한쪽은 하늘로 던져 하늘의 물인 비가 되게 했고, 다른 한 쪽은 아래로 흘려보내 땅의 물, 즉 바다와 강, 그리고 지하수가 되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개골은 가루로 빻아서 별들을 만들었고, 침으로는 구름을 만듭니다. 티아마트가 여신인만큼 두 개의 커다란 가슴은 높은 산으로 만들었고, 그곳에 구멍을 뚫자 무수한 젖이 나와 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긴 꼬리는 하늘을 지탱하는 데 사용되었고, 마지막으로 티아마트 군대의 총사령관의 살과 피를 반죽하여 인간과 다른 동식물들을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종합해서 말하자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입니까? 바로 전쟁에서 패배한 신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아주 잔인하게 만들어진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도 전쟁에 의해, 그리고 시체로 만들어진 아주 가치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이 인간에게 신들은 자신들이 하기 싫은 노동을 부과하여 자신들의 노동을 대신하게끔 만드는 노예와 같은 존재로 삼습니다. 고대 근동 신화들에서의 인간의 시작은 어둡고 아주 비참하기만 합니다. 아주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고대 근동 신화들에서의 인간과 다르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왜 성경이 고대 근동의 가치관들이 반영된 것일 순 있어도 그대로 배낀 것은 아닌지 잘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은 신들의 전쟁의 부산물도 아니고 신들이 해야 하는 노동을 대신 하는 노예도 아니라, 무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이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면서 자신이 하는 직무, 즉 일까지 맡기셔서 대리자로 삼으셨습니다. 28절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 근동에서 인간은 그저 신들의 노예일 뿐이고 아주 가치가 없는 존재, 즉 저주받은 존재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복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하기 싫다고 인간에게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이 행복한 직무, 기쁜 일을 인간에도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자신을 대신하여 다스리도록 하시는, 즉 대리자로 삼으셨습니다.
29-30절은 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서 사는 인간이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인간에게 먹거리로 주시면서 자신이 만든 이 세상이 얼마나 복되고 행복한 곳인지를 직접 몸으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선언적으로 인간이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가 아니라 신의 은총과 복을 받은 존재임을 못 박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31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조의 가장 정점으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이 인간을 보시기에 그냥 좋으신 것이 아니라 심히 좋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대 근동과 성경의 가르침은 이러한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노동을 부과하는 노예나 전쟁에서 패배한 신의 시체로 만든 저주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과 은총을 받은 대리자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그 어떤 것도 인간이 하나님께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인간인 우리는 너무나도 존귀한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대리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가져야될 사실은 우리가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은 결코 우리 자체 안에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엄성을 넣으셔서 마치 하나님 없이도 우리가 가치로운 존재로 만드셨다고 생각해선 안된다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말했듯이 현대인들은 인간 자체만으로도 가치로운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가치가 없는 존재일뿐만 아니라 공허하며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근원이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뿌리가 잘린 나무는 살아있는 것처럼은 보여도 죽은 나무이듯이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이것을 가르칩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생령, 즉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 생명이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모든 만물에게 생명이 있는 것,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인간에게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없다면, 그리고 이 하나님과 끊어진다면 인간은 죽은 존재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도 허물과 죄로 죽어가고 있는 너희가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말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존재,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존재는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렇다면 하나님을 떠난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이또한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죽은 존재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사데 교회가 있습니다. 이 사데 교회는 하나님 앞에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였고, 죄에 대한 회개가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이 사데 교회를 평가하시면서 “내가 너의 행위를 아노니 너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데 교회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일진 몰라도 실상은 죽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인간에게 주신 직무, 즉 이 세상을 다스리는 대리자를 우리가 수행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 죽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분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어떻게 반영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께서 주신 대리자라는 직무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와 우리 삶의 각 터전에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이 죄와 피흘리기까지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죄는 정말 무섭니다. 우리 안에 깊숙히 침투해 있어서 우리의 모든 본성을 부패시켰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우리는 죄된 본성을 거슬러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살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더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그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위해 살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은 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을 하지 않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우리의 삶이 이해가 되지 않고 재미 없어 보입니다. 술을 먹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제가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제가 술을 안 먹는다고 이야기하면 “그럼 무슨 재미로 살아가냐”라고 저에게 질문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으로 고달프고, 어떻게 보면 불신자들의 시선에서는 특이한 삶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진정한 복된 삶입니다. 우리의 죄된 본성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삶이 복입니다.
시편 1편에서도 뭐라고 합니까? “행복한 사람이여!”라고 외치면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주 아이러니한 말씀을 청중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자신의 말씀대로 살 때 욕을 듣고 박해를 받고 거짓으로 악한 말을 듣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너무나도 아이러니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듯이 이것이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이스라엘의 역할)
고대 근동에서의 인간은 노예이고, 현대에서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그리고 하나님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단독자, 독립자라고 가르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난 피조물인 동시에 대리자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대리자로서의 삶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이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알려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에서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분에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도록 너무나도 큰 일을 하시면서 그 능력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4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시라고 말하면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같이 언급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복음 안에서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의 빛은 복음 전파를 통해서 비치기 시작합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오늘 오늘 본문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가르치는 창세기 1장 26절을 상기하면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그리스도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바울 역시도 하나님을 대리하는 명령과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반영하여 나타내시고, 그분의 모든 말과 행위, 그리고 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알 수 있고 손으로까지 직접 만질 수 있게 되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하셨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완벽한 의미로의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완전한 상태로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만납니다. 죄로 더럽혀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이시며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을 듣고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며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완전히 새로워진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를 통해 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반영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회복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죽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여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비춰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복된 삶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복된 삶은 돈 많이 벌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 그 어떤 사람도 돈을 많이 벌어도 안정을 찾을 수 없으며 마음 한 켠에는 공허함이 있으며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를 나중에 말씀을 통해 나중에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성경은 이것이 복된 삶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는 새순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삶을 사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도 이러한 삶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삶으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며 지금도 우리를 이 삶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형상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비추는 복된 대리자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신 그리스도께 감사
하나님의 형상인 대리자로 살아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