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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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당하신 고발 그리고 사마리아 심판
하나님의 정당하신 고발 그리고 사마리아 심판
지난주 8개 나라 또는 도시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심판의 메시지가 끝나자 선지자는 3장의 시작을 ‘들으라’로 시작을 합니다. 2인칭으로 ‘너’는 들으라는 명령형의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4장과 5장에서도 같은 표현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유사한 형태의 3,4,5장의 공식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명령을 시작한 내용은 ‘너희에게 내리는 심판의 말’이라고 정의합니다. 특히 이집트 당에서 데리고 올라온 모든 족속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현실은 남쪽의 유다에 거주하는 아모스가 북쪽의 사마리아에 올라와 심판 메시지를 전하는 상황이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된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왕이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백성이 되는 것을 담고 있는 내용인 것이죠.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2절에 ‘이 땅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다’라고 선택하심과 그들의 백성됨 그리고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모든 악을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마땅한 처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에도 하나님께서 너무하신 것이 아닌가? 택한 백성이라면 좀 눈감아주고 그래도 보호해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내가 너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안그런것처럼 말하겠지만 우리 주변뿐만 아니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최근 우리나 검사 또는 판사처럼 엘리트 주의 속에서 특권을 누리고 사는 집단들의 행태가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잘못을 해도 식구끼리는 바주고 그러는 것이다 라는 사고는 그들이 특혜를 많이 받는 사회의 지도층이기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 뿐이지 우리 모두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하나님의 공정하심 즉 공의는 이런 팔이 안으로 굽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공정함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해를 위해서 우리의 형식으로 바꾸다보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a->b , b->a)오직 너희만을 선택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처벌하겠다는 두려움만 강조되는 것이죠. 그러나 언약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언약은 어떤 법적인 처벌을 두고 하거나 항목을 적어서 서로가 주고받는 형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일종의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알려주고 백성이 동의를 할 때 하나님과 쌍방이 함께 지켜 가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때 눈에 보이는 의식을 하는데 동물을 죽이고 각을 떠서 나눈 뒤 그 곳을 당사자들이 지나가게 함으로 계약 파기에 해당되는 죽음으로 보응을 하겠다. 본문에서는 ‘내가 너희를 처벌하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계약이 깨어진 상태는 인간편에서는 갈라지면 끝이죠.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보면 반드시 계약의 이행자로 완전하게 이루어져야 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걸 모르고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 삶에서 간혹 부모나 자녀가 서로에게 간 이식과 같은 생체 장기를 기증함으로 인해서 유사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 뿐인 심장을 기증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당사자는 죽음을 심장을 이식 받는 자는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경우가 기증에 의한 경우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12선지서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심판 메시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생명을 버리고 한 쪽에서는 결과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말씀까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먼저 ‘들으라’는 말씀은 지금 계약이 깨어진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다시 돌아올 가능성에 대해서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처벌 하시겠다는 하나님께서는 8-9가지의 질문을 통해서 처벌의 정당한 이유를 본문에서 질문하는 방법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3절부터 이러한 질문을 수사적 질문이라고 하는 것인데 (다시 확인, 어떤 질문들인지) 먼저, 두 사람이 미리 약속하지 않았는데 같이 갈 수 있냐라는 질문입니다. 계속해서
2. 사자가 먹이를 잡지 않았는데 -> 부르짖는가,
3. 젊은 사자가 움겨잡은 것 없는데 - 소리를 지르겠는가
4. 덫을 놓지 않았는데 = 덫에 치이겠느냐
5. 아무것도 걸린 것이 없는데 - 새 덫이 튀어오르겠는가
6. 성읍 비상나팔이 울리는데 -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7. 성읍에 재앙이 덮치면 -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리고는 7절에 의미 심장한 말을 합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앞선 수사적 질문처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해가 뜨면 낮이다’는 것처럼 일어난 현상 그대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가 부르짖는건 먹이를 잡고 있기 때문이고, 덫에 걸리는건 덫을 놓았기 때문이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일이 성읍에 비상나팔이 울리면 적이 처들어 왔다는 신호이기에 두려움이 당연한 것이라고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성읍의 재앙이 덮이면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1장에서 지진이 일어나기 2년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지진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남께서 심판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과학의 발달로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우주의 법칙이 어느 정도 밝혀졌고, 지진이 일어나는 이유도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는 흔하게 보는 자석의 성질이 왜 그러한지도 밝히지 못했고 여전히 그렇다에만 머물러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일어난 일을 사람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자가 왜 먹이를 움켜잡고 부르짖는지 그냥 조용히 차분하게 먹이를 먹지 않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려 주어야만 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알리고 싶어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참으로 비밀을 그 종 예언자들에게 미리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알려 주셨습니까? 피조물로 우리가 행해야 할 마땅한 바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선백 받은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삶의 모든 것을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거부하고 결국 자신이 그 이상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있는데 중국에 천하를 통치했던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꿈꾸었고 그중 하나가 수은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밝혀졌습니다. 죽은 사인도 수은 중독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전해지는데 왜 그렇습니까 수은이 피부를 백옥처럼 만들어 주는 현상에만 몰입한 나머지 ‘불로장생’을 해준다는 잘못이 결국은 죽음으로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이죠.
때론 심판하기도 하시고 싸매기도 하시고 등등 어떤 일들을 하게 됨으로 사람들은 ‘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구나’하고 자신을 살펴볼 기회를 얻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주 하나님이 말씀하지는데 -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은 아모스가 전달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알려 주심으로 일하시는 다시 말해서 처벌하겠다는 예언은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처벌의 이유를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세계는 이방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처벌의 이유를 아는 세계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세계의 차이를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이라면 이어지는 순서는 받아들이는 것과, 아니라고 말하는 것 둘 중 하나의 선택 외에 어떤 길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스라엘이 그런 하나님의 회개의 말씀을 버렸고 그로 인해 북이스라엘도, 남 유다도 패망하게 되는 것을 지금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패망으로 끝나는 결론은 계약에 맞는 우리의 처지일 것이지만 (아주 중요한) 하나님께서 계약의 만족 상태가 되지 못하십니다. 우리와의 관계를 더 나은 관계로 만드는 것이 ‘계약’의 목적입니다. 지금과는 좀 의미가 다릅니다.
내가 할 약속, 상대가 할 약속이 성실이 지켜지는 계약서 누군가 계약의 내용울 위반하면 계약은 자동적으로 파기되고 상대에게 민,형사상의 처벌과 배상이 이루어지는 순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편에 ‘완전함’을 이루시는 유일무이한 형태의 계약을 ‘언약’이라고 한다는 것을 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거나 잘못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역사의 시간을 당겨보면, 하나님께서는 계약의 당사자로 이미 깨어진 계약의 완성을 위해 값을 치루는 대속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많은 신자들이 머무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다시 오시는 왕이십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개념에서 본다면 다시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영원한 왕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 살펴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가서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신 것은 통치권을 가지신 메시아 예수께서도 그대로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인가. 섬기는 방식인데 그냥은 안되죠. 둘 중 하나입니다. 돈 때문에 섬기든지, 사랑 때문에 섬기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방식은 돈 때문에 섬기는 방식을 따라 사는 삶이 되는 것이죠.
9절부터 사마리아에 내리는 심판이 소개됩니다.
그들이 요새처럼 성읍을 쌓고 그들끼리 모여서 하는 것은 9절 하반절에 ‘그 속에서 자행되는 억압’이라고 고발합니다. 10절에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라고 합니다. 멀리 볼 것 없습니다. 계엄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대통령인데 내가 하려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한다. 그래서 내가 권력으로 바로 잡겠다는 그들이 ‘자기 궁궐에 모여서’ 한 행동인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일을 ‘바른 일’로 여전히 주장하고 일부의 교회들이 동조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디에서 잘못되었을까요. 물론 분석하고 이유는 다 알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른 일을 행할 줄 모르는 이들이’ 하는 행동이 ‘폭력과 강탈로 탈취한 재물을 저희들의 요새 안에 쌓아 놓는’일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 동조합니다. 당연한 자신의 생각을 바닥에 두고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돈을 벌고 좋은 투자처가 있으면 투자하고 하는 일들이 무슨 잘못이냐 할 것입니다. 물론 정당성을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당연한 것이 좋은 가치를 갖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함께 있어야 할 가치를 빼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약자의 권익이나 인권에 대해서는 칼보다 예리한 몇몇 성경 구절을 이용해 철저하게 반대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니 이런 돈을 버는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폭넓게 이해하고 관용을 말하면서도 절대 안된다는 여러 개의 규정들에서는 말 그대로 절대 양보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법이 정하는 바 범위 안에서 충분히 자신이 누려야 할 돈을 벌고, 쓰고, 이용하는 것을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가치는 빼 버린 너무나 가벼운 나의 유익만을 최고의 판단 기준으로 해석하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인 것을 그래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주님께서는 경고하시고 이제는 한 나라의 멸망이 아니라 전 우주적 종말의 시계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멸망은 핵폭탄이 터지고 전쟁이 터지는 것처럼 극단적인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돈을 버는 집단이 각종 법으로 무장해 개인들의 몇백원을 긁어 몇 천 억대의 이익을 챙기는 플랫폼 사업자들이나 대기업도 마찬가지이며 그들이 주는 편안함, 편리함에 이미 몸이 반응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당연함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일반적 사고도 당연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에서 쌓여가는 사회적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이 많을수록 더 빠르게 한 나라는 경제적 침체로 빠지면 스스로 타락할 것이고 지구적으로는 환경 오염과 더불어 파괴는 가속화 되는 거대한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한 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다만 12절 하반부 ‘조각만 겨우 남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될 것입니다. 가졌던 것에 비하면 ‘겨우 남은 것’은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을 통해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셔서 먼저, 약자와 소외 받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많이 가지면 좋고 그만큼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누가 있는 것을 싫어 하겠습니까? 하지만 마땅하게 사용되어야 할 소위 사회적 책임이 다해지지 않을 때 개인이든, 기업이든, 나라든 우주적이든 결코 하나님이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아모스의 심판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지성은 지구가 달을 당기는 중력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달은 더 이상 끌려 오지 않는 정확한 위치에서 자신의 힘만큼 또 다시 지구를 당기지만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을 당겨 유지합니다. 그런 지구와 태양은 다시 태양을 중심으로 한치의 오차없이 공전합니다. 그런 태양 역시 우리 은하를 태양계에 속한 행성을 마치 이끌고 가듯 엄청난 중력으로 잡아 끌고 우리 은하를 어마무시한 속도로 주파하고 있습니다. 한번 공전하는 데 2억2천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보내시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고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운동을 시작한다면 건강함과 아름다운 육체미를 미래에 가질 것이고,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훈련한다면 그 재능을 가지고 만족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이상한 법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올바른 길을 좋아하도록 만드시고 알아가는 즐거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