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1일 수요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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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도입: 욥기 6-7장 정리 및 우리의 삶과 연결
도입: 욥기 6-7장 정리 및 우리의 삶과 연결
오늘 함께 본문은 읽은 말씀은 사업장이나 가정에 액자로 많이 걸려있었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 말씀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제대로된 해석이 있었는지 이 말씀의 액자 보기가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오늘 8장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엘리바스 발언에 대한 욥의 답이 있는 6-7장의 말씀을 간단히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엘리바스가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으로 보면 욥의 친구들 중에 가장 연장자였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엘리바스는 7일의 침묵 끝에 더이상 참지 못하고 욥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엘리바스 스스로 욥을 향한 조언, 위로라고 생각했지만 당사자인 욥은 엘리바스의 말은 거의 폭력에 가까웠습니다.
왜냐하면 엘리바스 말은 보편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욥에 상황에는 맞지 않는 이야기기이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는 철저하게 규범적 지혜를 바탕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 “인과응보” 원리에 따라 욥에게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이유 없는 징계는 없으며 만약 욥이 고난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 앞에 반드시 잘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에게는 맞지 않는 말이었고 위로가 아닌 정죄로 욥에게 폭력을 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욥이 답을 합니다.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경외하고 싶지만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라는 사람들이 나를 위로하기는 커녕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으니 더욱 괴롭다는 것입니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욥은 6장 25절에 말합니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이제 7장11절 이후로는 그 탄식이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도저히 이해되지도 자신의 생각으로 도저히 해결도 될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 괴롭다고 말합니다. 욥은 이러한 것이 인생이라면 빨리 끝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면 이것 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탄식이 절정이 욥기 7장 17-20절입니다.함께 읽어보실까요?
17.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17절에 말씀합니다. 도대체 나라는 사람이 뭐라고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시고 한 사람에게 마음을 쓰십니까?
18절은 또한 그 사람을 아침마다 찾아오시고 매순간 시험하십니까
19절 대체 왜 당신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십니까? 내가 침 한 번 삼키는 것까지 가만 놔두지 않으시는 건가요?
20절 사람을 감시하시는 분이여 설령 내가 잘못했다 해도 그리 당신께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 됩니까?
만약 자신에게 죄가 있다하더라고 그 크신 존재인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을 것이며 이 작은 존재가 하나님께 관심 조차 받은 존재가 되는가? 질문하는 것입니다. 21절에 만약 그러한 관심을 저에게 가지고 계신다면 “왜 나의 잘못을 용서하지 안으시는 건가요?” “왜 당신은 나의 죄를 눈감아 주지 않으시는 건가요?”
이 문제를 나는 해결 할 수 없고 어느 것도 알 수 없으니 저는 이제 흙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찾으셔도 저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욥이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탄식하는 내용 읽히기 보다는 엘리바스 또는 규범적 지혜로만 사람의 고난과 고통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메시지로 들렸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조금 생각해봐야 할 것은 엘리바스도 욥이 고난을 받는 이유를 모르고 욥도 자신이 고난 받은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어떠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까요? 욥처럼 알 수 없는 고난을 지나는 자들에게 판단이 아닌 진짜 위로를 전해야하는 것 외에 어떠한 메시지를 더 들을 수 있을까요?
만약,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제자의 길을 가고 있는 자라면 욥기 자체가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잘못해서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님의 제자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고난이 필연적이고 비록 이 고난이 너무 고통스럽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신뢰하고 계시구나? 이러한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 받는 것이 오히려 복이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또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포함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는 보편적인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만약 이 세상과 인간이 인과응보의 법칙대로만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욥의 탄식 처럼 아주 작은 것 하나 감시하시며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계신다면 우리의 인생은 고통 자체가 될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누구도 행위로서 하나님을 만족 시킬자가 없으며 하나님의 인내와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엘리바스도 인과응보의 법칙,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을 말하고 있지만 말하고 있는 자신도 그 법칙대로라면 의롭다 평가 받기도 보다는 비난하고 있는 욥과 같은 상태일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생각해보면 우리가 잘해서 얻은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냥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잘해서 무엇인가를 얻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과응보나, 심는대로 거두는 법칙을 말하는 것 자체가 인간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아주 교만한 것이죠. 심는대로 거둔다면 여기에 남아 있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심는대로 거두는 것도 하나님의 인내와 은혜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엘리바스의 그럴싸한 보다는 욥의 탄식이 더 현실적이고 겸손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욥의 탄식을 읽을 때는 욥이 하나님께 대드는 것 같고 불평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욥은 거의 먼지와 같은 존재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다가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지경까지 처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이러한 상태에 있는 수아 사람이 그 욥에 말에 답을 합니다. 여기에서 수아는 아브라함의 아들 중 하나의 이름이자 그의 후손들이 세운 지역 또는 민족 이름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에돔 근처나 아라비아 북부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욥이 살던 우스라는 곳과 인접한 지역에 살았던 자입니다.
한 번 2절 부터 천천히 빌닷이 욥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보실까요?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자네는 언제까지 이런말을 하겠는가? 자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세찬 바람같네
하 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그 욥에게서 나오는 세찬 바람 같은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올바르지 않다.” “전능하신 분이 의롭지 않다니?.”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자네 자식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은 죄의 손아귀 내버려두신 것이야.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너는 지금 네가 죄가 없는데 고난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 고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데 아니야 네 자식들이 죽임을 당한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땅히 벌을 받은거야!!
어떻게 재산도 다 잃고 자녀도 다 잃고 온 몸을 덮은 종기를 앓고 있는 친구에게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맞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일까요?
그러면서 이어서 말합니다. 욥기 8:5-6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만일 자네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전능하신 분께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하면
또 자네가 아무 잘못이 없고 올바르다면 그러면 그분께서는 자네를 다시 회복시키셔서 자네에게 합당한 자리를 회복시켜주실거야.
앞에서는 욥의 자녀들이 그들이 죄때문에 죽었다고 막 말해놓고 회개하고 돌아서면 원래대로 돌아갈거라고 욥의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이 바로 옆에서 이 상황을 보고 있었 다면 빌닷에게 꿀밤 한방 매기지 않았을까요? 앞에 욥의 탄식을 보았지만 욥은 현재 거의 무의 상태에 가깝습니다. 죽음의 상태입니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강한 햇빛이 아니었습니다. 메말라 버린 그 심령을 젖셔줄 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계속해서 바른 말이라고 하여 강한 햇빛을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메마른 식물에 햇빛을 꼐속 비추면 어떻게 될까요? 그 식물은 말라 죽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아주 유명한 말씀이 이 상황 가운데 나오는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딱, 욥기 8장 7절만 떼어놓고 보면 너무 멋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빌닷과 욥의 대화 속에서 이 말씀을 읽는다면 아주 폭력적인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독한 고난 가운데 있는 자에게 “너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합당한 벌을 받은 것이다.” 말을 하고 뒤에 이어진 말인 것입니다.
지금도 이 말씀이 꿈과 용기를 주는 말씀으로 들립니까?
너의 시작 - 레이쉬트 과거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네 나중은 - 아하리트카 미래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너의 시작으로부터 그의 나중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요.
그 미래에 “창대하게 되다.” 히브리어 “이스게”라는 단어를 씁니다.
“크게 되다.” “자라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욥기 전체 상황에서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잘 못 사용했는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만 가져가면요. 사업장이나, 어떠한 새로운 시작을 하는 분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 중에 있는 자에게는 특히, 욥과 같은 고난 중에 있는 자에게는 옳지 않는 말입니다.
욥의 상태는 현재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가능성 있는데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그러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죠. 모든 것을 잃었고 심지어 자신이 믿던 하나님께도 버림 받은 것은 상황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가능성이 있는 자에게는 미리 영양제도 먹으라고 하고 응원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심장이 멈춘자에게는요? 피가 모잘라서 죽어가는 자에게는요? 산소호흡기가 필요하고 특별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심장을 다시 뛰게 하기 위하여 심페 소생술도 해야하고 수혈도 해야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이 크게 되는 꿈이겠습니까?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이겠습니까? 아니죠. 단지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하면에서 빌닷은 욥에게 폭력의 말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빌닷은 말을 계속 이어갑니다. 규범적 지혜에 특징적인 표현이 나오는데요.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제발, 옛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라,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 지혜자들에 비하면 어린 아이에 불과하니까 잘난척 하지말고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르쳐 준 지혜가 무엇입니까?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여기에서 왕골은 히브리어 고메라는 단어인데요. 옛 종이를 만들 때 사용했던 파피루스 말합니다. 갈대의 한 종류였겠죠. 그 파피루스는 습지인곳에서 잘 자라지 맨땅에서 잘 자라지 않으며 갈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순종하며 사는 자가 형통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는 자는 14절입니다.
14.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16.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17.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18.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19.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그것에서 벗어난 자는 좋은 결말을 기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끊어지게 되어 있고 무엇을 하더라도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으며 형통한 삶을 사는 것 같다가도 인생이 꼬이게 될 것이다. 열매 또는 꽃은 커녕 그 인생은 뿌리째 뽑히고 풀이 물성하게 자라날 것이다.
20.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너무나 옳은 소리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욥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말처럼 들립니다. 왜그럴까요? 앞에 지독한 고난 중에 있는 욥의 상황을 신경쓰지 않고 교리를 외우듯, 그대로 읊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고난 가운데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고난을 버틸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재 당장 원인을 해결하고 그 이유 대해서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선은 그 고난을 버틸 에너지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원인이 분명한 고난들도 있습니다. 예측이 가능한 고통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고난도 고통도 이겨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은 자에게 찾아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이라면요? 그 지독한 고난 가운데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면요? 그 앞에서 고난의 원인을 찾고 미래의 크게 되는 것을 빌어주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죄인된 우리를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존재 자체가 소망이 없는 죄인된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 자잘못을 따지고 정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바스나 빌닷의 말에 따른다면 그 여인은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과응보의 법칙이고 심는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힘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율법의 정죄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헤세드의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더럽고 추한 그대로 우리를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마무리
마무리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대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쉽지 않습니다. 그대로 받아 주고 사랑하기 보다는 판단하기를 즐겨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높은 자리에 서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조언하기를 좋아하고 충고하기를 좋아하며 원인을 찾고 답을 내는 것을 좋아하죠.
마치 만달란트 탕감 받은 종이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은 감당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면서 타인에게는 가혹한 잣대를 대는 그러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혹 우리의 모습이 누구를 닮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저번에도 이야기드렸습니다. 판단과 심판은 주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은 판단과 심판이 아니라 사랑의 사명입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욥의 친구들이나 욥을 본받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나 빌닷 엘리후 그리고 욥은 바로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그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천상회의에서 일어난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누구든지 알 수 없는 고난과 고통 앞에 겸손 할 수 밖에 없으며… 특히 믿는 자들의 고난 앞에 우리는 더욱 그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될 일은 함께 그 고난을 버텨주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고난과 수치를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위로이며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될 것입니다.
판단 보다 위로
해결책/답을 내는 것 보다는 그냥 함께 해주는 것.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함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