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죄

신동조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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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분주한 현대인의 게으름
사실상, 성실함으로 가장한 수많은 사람들의 표면적 분주함 아래에는 치명적인 나태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에게 ‘당신은 왜,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쁘게 지내는가’ 물어보라. 그 대답이 바로 진정한 성실함과 표면적 성실함을 구분하는 지표가 될 것이다. 나태의 치명적 특성을 잘 알고 있었던 사막 수도사들과 중세 도덕 철학자들은 이런 현대인의 모습에서 분명히 나태라는 무서운 죄를 간파했을 것이다.
영혼의 병
나태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는 sloth인데, 이것은 중남미에 주로 서식하는 나무늘보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나태라 하면 ‘몸이 굼뜨고 행동이 느린 모습’을 연상하고, 그 정의를 ‘좀처럼 움직이거나 일하기 싫어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교회가 죄로 규정해 온 나태는 이와는 성경이 무척 다르다. 영혼이 병든 것처럼 의욕과 활력을 잃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 빠진 것으로 이해했다. 나태의 성격은 어원을 통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나태를 뜻하는 라틴어 ‘아케디아’는 헬라어 ‘아케디아’에서 왔는데, 이는 ‘관심 없음’이라는 의미다. 즉 나태는 겉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보다 깊은 내적 태도와 관련 있다. 카시아누스는 사막이나 은둔지에서 수도하는 수도사들이 이 나태의 유혹에 넘어가면 하나님에 대한 몰입이 무너지므로 이것이야말로 수도사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라고 보았다.
사랑하지 않는 죄
나태가 다른 죄들에 비해 독특한 점은 ‘행하는 죄’가 아니라 ‘행하지 않는 죄’라는 점이다. 어떤 흉악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행해야 할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나태는 선을 행하지 않으려는 의지와 같은 능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의지적으로 선을 행하기를 거부하는 행동이며, 의도적으로 악을 범하는 것과 같다. 교회와 신학자들이 나태를 문제 삼는 핵심적인 이유는 이것이 무엇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거스르는 심각한 성경을 지녔기 때문이다. 나태와 반대되는 근면을 뜻하는 영단어 ‘diligence’는 라틴어 ‘딜리게레’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사랑하다’이다. 부지런함이 사랑하는 것에서 온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무엇을 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무엇이든 하기 싫어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나태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몸이 굼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누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나태란 하나님꼐 드려야 할 예배와 섬김과 사랑을 충분히 드리지 않는 것이다. (성경의 예> 달란트 비유 : 하나님에 대해 잘못 이해한 1달란트 받은 자 - 하나님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 그리스도인은 나태를 결코 가볍게 생가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에 대한 가르침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들이 지은 죄는 다름 아닌 사랑을 행하는 데 무관심하고 태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헐벗고 굶주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을 바로 주님께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셨다. (마 25:46) 악을 행한 것 뿐 아니라, 마땅히 돌보아야 할 대상을 돌보지 않고 선을 행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심각한 죙미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나태를 이기는 길
1 목적의식과 소명 : 나태를 예방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가장 우선적인 작업은 ‘자신이 왜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확인하는 것, 즉 삶의 목적을 재수립하거나 재확인하는 것이다. 확고한 목적의식과 소명이야말로 일을 힘차게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이며, 이것이 있으면 도중에 어떠한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사람은 뚜렷한 삶의 목적을 갖게 되면 생활이 달라지고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특별히 가치 있는 일에 부름받았다는 소명 의식은 삶을 이글어 가는 최고의 힘이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서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인생 최고의 목적과 존재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자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2 구체적 목표 설정 : 삶의 목적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자신이 어떤 구체적인 일이나 영역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부름받았는지 안다면 우리는 삶을 훨씬 더 성실하게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부르심’과 이에 따른 실현 가능한 구체적 ‘목표’를 성정하는 것은 결국 인생의 궁극적 소명을 효과적으로 성취하는 지름길이다. 바울 : “잡은 줄로 생각하지 않고 푯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빌 3:13-14) 인생을 여러 단계로 나눌 때, 특히 중년기에 가장 위협적으로 작용하는 죄가 나태다. 갈렙 :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중년기에는 ‘교회와 이웃, 지역의 소외딘 사람들과 극빈국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 드과 같은 좀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목표를 다시금 설정할 필요가 있다.
3 수도사들의 덕목 : 1) 에바그리우스가 제시한 덕목 중 가장 핵심적인 세가지는 분별과 자기 절제와 순종이다. 2) 카시아누스는 신약 사도들의 가르침과 모범을 근거로 수도사들을 권고했는데, 몸과 마음이 느슨해져 있는 수도사들에게는 무엇보다 육체적인 노동이 좋은 치유책이 된다고 말했다. 3) 수도사 요한 클리마쿠스는 공동생활이야말로 나태를 이기는 핵심적인 방법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함께 주를 찾고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임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 격려하며 지내는 데 힘쓸 필요가 있다.
4 소망의 끈 : 오늘날의 신학적인 용어로, 종말론적 소망을 가지라는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 암담하고 난관에 둘러싸여 앞이 보이지 않고 스스로 역부족이라는 느낌이 들더라도 그 상태가 결코 영원히 지속될 것이 아니며 결국은 끝이 올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윗은 낙담할 수 밖에 없는 기가 막힌 처지에서도 이렇게 기도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바로 이 소망이 역경과 침체를 극복하는 위로와 힘이 된 것이다.
5 지금 여기서 힘써 사랑하기 : 나태의 본질은 결국 사랑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나태를 극복하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창조자이며 구속자이신 하나님과 그분이 내게 보내주신 사람들, 그리고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터전이요 일터인 이 세상을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배고픈 이웃, 마음이 상한 이웃, 사랑이 필요한 친구들이 나의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이 일들을 시작해야 한다.
(칠죄종)
성경속으로 ㅣ 데살로니가후서의 배경과 특징
데살로니가후서에 나타난 묵시적 종말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또 로마 제국의 갈등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는 정황은 1세기 말엽의 뚜렷한 특징이다.이로 말미암아 종말에 대한 과도한 기대 혹은 두려움으로 현실 도피나 현실 부정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이런 상황에 있던 교회 공동체에게 성경적 종말론에 관한 교훈과 교회가 보여야 할 올바른 삶의 태도에 대한 권면을 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유대 사회가 그러했듯, 그리스도인들 역시 묵시적 종말론 사상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이런 상황이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교회의 결집과 신앙의 열정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현실에 대한 부정 내지는 도피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로마의 핍박과 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그에 따른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최고조에 오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어려움에 처한 대부분의 교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본문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당시 상황으로 말미암아 묵시적 종말론 사상에 빠진 사람들이나 일상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살후 2:1-3) 본래 종말론, 특히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종말론은 사회가 혼란하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일 때 극성을 부리기 마련이다. 한국 교계도 이런 사이비 종말론자들과 단체들이 교회와 성도를 미혹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얘> 신사도 운동) 그런 의미에서 데살로니가후서는 한국 교회에 무엇이 올바른 성경적 종말론인지 잘 알려주는 지표와도 같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한국 교회 내에서 올바른 종말론을 잘 알려 주는 교회는 올바른 구원론을 잘 알려주는 교회만큼이나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데살로니가 후서 본문은 겉으로는 ‘나태’에 관한 교훈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초기 교회가 종말에 관한 잘못된 이해와 유혹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쳐 주신 종말에 관한 올바른 관점과 그에 따른 적절한 삶의 태도를 말해주고 있다.
본문에 따라 생각해보기 ㅣ 나태의 의미
데살로니가후서는 대부분이 종말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만큼 당시 교회들이 종말론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혼란을 겪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바울 역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교회들이 잘못된 종말론을 전파하는 이들 떄문에 그 기반이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임을 보여주는데, 교회를 어지럽히고 잘못된 종말론을 퍼뜨리는 이들이 바로 본문에서 중요하게 언급하는 ‘게으르게 행하는 자들’이다. ‘게으른 자들’은 단순히 일을 귀찮아 하고 싫어하는 사람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살후 3:6)에 ‘게으르게 행함’에는 뒤이어 나오는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바른 성도는 사도들의 말과 편지를 통해 가르침을 받는 전통 위에 서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게으른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과 기준을 거부하고, 이를 가르친 사도들의 교훈에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여 그 반대로 행동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게으른 자들’은 본문의 정황상 교회의 지도자급 인물을 가리킬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다른 성도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첫째, 사도들이 준 전통을 거부하고(6절), 둘째, 다른 성도들에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음식을 먹으며(8절), 셋째, 자신들은 수고하지 않으면서 다른 일들만 만들고 다니는 사람들이었다.(11절) 더불어 이 ‘게으른 자들’에는 종말론에 빠져 정상적인 삶을 살지 않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사회에서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책무를 외면하고, 잘못된 종말론에 빠져 틈만 나면 교회에 나와 종교적인 행위만을 하려고 했다. 이런 자들은 교회 외부에서 오는 환난과 핍박보다 교회에게 훨씬 더 위험한 존재이다. 실제로 교회는 외부의 환난과 핍박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 보다 오히려 내부의 변질과 부패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심판은 받은 일은 교회 역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게으른 자들’이 보이는 나태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첫째, 소극적으로는 성도에게 맡겨진 마땅한 직분과 책무를 거부하고 태업하는 것이다. 둘째, 적극적으로는 교회가 가르치고 지켜 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싫어 고의적으로 훼방하는 것이다. (11-12절) 즉, 자신들의 목적과 입맛에 맞게 교회를 바꾸려고 일부러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 사도들의 권위를 거부하는 고의적인 모습들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게으름’(나태)의 본질이다. 이런 교회 내의 ‘게으른 자들’에 대한 중요한 비유가 유명한 ‘달란트 비유’(마 24:14-30)이다.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겼다가 돌아와서 종들과 결산할 때에 주인은 그 종의 ‘게으름’만 지적한 것이 아니라 ‘악함’도 지적한다. 이는 그 종이 자신의 주인을 부당하고 불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비유 속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단순히 일하기 싫어 게으름을 부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을 싫어했고 그의 뜻을 우습게 여겼기 때무네 고의적으로 주인의 명을 듣지 않았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이것을 ‘게으름’(나태)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게으름’(나태)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대해서는 태업을 일삼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한 일을 행하는 것엔는 열심을 내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런 불의하고 악하고 게으른 자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미혹하지 못하도록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보다 올바른 믿음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또 그렇게 할 수 이씅려면 성도들 스스로가 성경의 내용들을 바르게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성도가 성경을 늘 가까이하고 숙지하고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성도라면 이 세상에서 주어진 자신의 책무들 역시 소홀히 여기지 않고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감당해야 한다. (사랑)
(일곱가지 치명적인 죄)
세상에서, 교회를 위해, 마음으로부터
나태는 모든 피조물이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환경에서 번성하도록 창조되었다고 오해한다. 이는 동물의 세계에서 명확히 드러아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태한 삶의 반대는 다음 세 가지 균현 잡힌 환경에서 번성하는 온전한 삶이다. (1) 세상 속에서 나의 일상, (2) 교회를 위한 나의 소명, (3) 하나님과 누리는 기쁨. 우리는 세상에서, 교회를 위해, 마음으로부터 일한다.
1 세상 속에서 나의 일상 (살전 4:11-12) 하나님은 우리 일상에 관심이 많으시다. 우리가 지각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가정을 잘 관리하기 원하신다. 우리가 직장과 가정에서 매일 하는 일은 다른 이들 눈에 띈다. 조용하고 신실한 삶을 하나님의 가치를 드러내는 담대한 증언이다. 우리는 자신의 안락함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하나님 사역을 지원하기 위해 산다. 근면한 일상이 나태를 해소한다.
2 교회를 위한 나의 소명 (살전 4:9-10) 교회가 성장하려면, 교인들이 재정적으로 자립해야 한다. 지역 교회가 지역과 국가, 세계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려면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나태는 게으른 사랑이다. 나태한 사람들은 필요를 기회가 아니라 방해거리로 본다. 바울은 우리가 먼저 자신의 일상을 잘 단속하고 그 열매를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적용할 때 교회를 향한 형재애가 생긴다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일깨운다.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재정적으로 자립하고 가정을 잘 다스릴 때 그들의 재능과 시간을 활용하여 지역과 세계 교회를 섬길 수 있다.
3 하나님과 누리는 기쁨 (살전 4:13-18) 세상 소에서의 일상이나 교회를 위한 소명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으로 부름받았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실재를 감탄하면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구세주를 기대하고 믿는다.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장차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우리 몸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소망을 그리스도께 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가운데 또 다른 세상을 산다. 우리는 살아 있는 소망과 보이지 않는 것을 즐거워하는 하나님 중심의 기쁨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역사 속에서 모든 것이 어디로 향하는지 완전히 알지 못한 채 자신이 하나님의 계획에 사로잡혀 지주하고 있음을 생생히 인식할 때 나태는 죽는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삶이 놀라운 삶이 될 것을 안다. 그래서 안심한다. 우리는 무기력한 사람처럼 ㅅ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고 삶의 모든 걸음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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