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받을 자격 (2)
Notes
Transcript
<고등부설교>
요나서 4:1-11
“사랑 받을 자격”
2019. 1. 20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사랑 받을 자격”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사랑 받을 자격은 어떤 자격일까요? 어떤 자격이 있어야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는 그 아기를 사랑으로 보살핍니다. 사실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죠. 태교를 하면서 초음파 사진도 찍어서 보고, 아기가 입을 옷과 신발도 미리 준비해놓고, 태명은 뭘로 할까 고민도 하고.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사랑을 더해갑니다.
그런데 이때 아기가 부모에게 뭔가 사랑을 받을 만한 어떤 대가를 지불한 것은 아니죠. “엄마, 아빠, 30년 뒤에 효도 할 테니까 저를 사랑해주세요.” 이렇게 거래를 한 게 아니잖아요. 부모는 그저 자신들의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줍니다. 여기 계신 선생님들도 다들 자녀를 낳고 기르시면서 그렇게 사랑하셨잖아요?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아오셨잖아요.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사람이라는 이유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세요. 그래서 시편 8편 3절, 4절에서 다윗이 이렇게 노래를 하죠.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다윗도 이게 너무 궁금한 거예요. 저 광활한 하늘과 저 수많은 별들조차도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로 만드신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데, 그 피조물보다도 작고 너무나 미약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조그만 인간들을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토록 사랑하시느냐는 거예요. 어째서 이런 미약한 피조물인 인간들의 어려움을 살펴주시고, 나약한 신음에도 귀를 기울여주시는지. 그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거죠.
하지만 나중에 다윗이 자식을 낳게 되었을 때 그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 사랑을 자기 아들에게 그대로 똑같이 주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자신의 셋째 아들인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아버지인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도 아들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 신하들을 데리고 도망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패하여 달아날 때도 신하들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고 너그럽게 대우하라고 명령하잖아요. 결국에는 신하들이 그 명령을 어기고 반역자인 압살롬을 죽이고 말았죠.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마음이 심히 아파 울면서 “내 아들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하고 외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아버지를 반역하고 죽이려고 한 아들이라 할 지라도,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다윗이 그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에 마음 아파하는 것처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역시도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볼 본문 내용인 요나서 역시도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요나서는 총 네 장으로 구성된 짧은 선지서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내 말을 외치라고 명령하였는데, 요나가 그것을 거부하고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풍랑을 만나서 선원들에 의해 바다에 던져지고, 바다 깊은 곳에서 물고기 배에 삼켜져서 물고기 뱃속에 사흘간 있다가 나와서 하나님의 명령에 마침내 순종하여 니느웨에 가서 외쳤고, 그로 인해 니느웨를 구했다는 것이 바로 요나서 1장부터 3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볼 본문인 4장은 마치 앞에 3장과는 전혀 다른 성경이라도 된 것처럼 분위기가 바뀝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요나의 태도가 돌변해서 갑자기 분통을 터트리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4장 1절에 보니까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에 3장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마침내 니느웨를 구원해내는 위대한 선교사역을 잘 마친 요나가 갑자기 기분이 팍 상해부렀습니다. 왜 기분이 상해부렀을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니느웨를 구원한 것 자체가 요나의 마음에 안 들었던 거죠. 요나는 니느웨를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냥 니느웨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는데. 첫번째는 니느웨가 이스라엘의 위협적인 적대국이었다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어요.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동북쪽에 있는 이방민족인데 급격히 세력이 늘어나서 이스라엘에 빈번히 쳐들어오는 위협적인 국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수시로 국경선을 침범해서 백성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가는 앗수르가 당연히 곱게 보일 수가 없겠죠. 그래서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앗수르가 그냥 망해버려야 되는데 저놈들을 살리려고 내가 왜 가?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쳐버렸던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니느웨가 이방민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항상 돌보고 계신다는 의식이었어요. 그래서 자신들은 다른 이방민족과는 차별된 고등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이미 많은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고, 제사장들은 타락해서 재물을 모으는데 관심이 있었고, 나라 안팎으로는 부정부패로 썩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여전히 백성들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속죄제사만 드리면 모든 죄가 사함 받고 하나님이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안일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요나 역시도 이런 선민의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더러운 이방민족을 찾아가서 외치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내가 왜 저 미개한 놈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야 하나? 왜 하나님은 저런 미개한 놈들을 동정하실까? 하나님의 모든 관심과 사랑은 오직 우리 이스라엘만 받아야 하는데, 왜 저런 놈들에게 관심을 두실까? 이런 의심과 질투가 요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뒤돌아서서 도망쳐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돌아서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의무도 내버리고 떠나버린 거예요.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도망쳐버릴 만큼 니느웨가 밉고 싫었다는 의미였습니다. 차라리 죽으라면 죽겠는데, 니느웨로 가라는 이 명령만큼은 내가 도저히 따를 수 없다! 이런 생각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요나는 결국 바다에 빠지고 물고기 배에 들어가는 역경을 거친 뒤에 마침내 그 뜻에 순종하여 니느웨 성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니느웨는 회개하여 재앙을 면하였습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불순종하였으나 뒤늦게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이방 땅 니느웨를 구원하였다는 아름다운 스토리로 요나서는 3장이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4장에서 갑자기 요나가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1절에서는 성을 내더니, 3절을 보면, 심지어는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가시라고까지 하나님께 원망의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선지자라는 사람이 하는 말을 보세요. 과연 이런 사람이 선지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내가 하기 싫은 명령을 내리셨다고 해서 도망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고 막말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완전히 영적으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요나는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하는 니느웨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애통스러웠고, 더군다나 니느웨가 구원을 받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큰 분노와 억울함을 느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요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나에게는 분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말의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5절을 보면, 요나가 갑자기 성읍 밖으로 나가 성읍을 지켜보기 시작합니다.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말이죠. 이미 니느웨 성에 재앙이 내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직 40일이 다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어쩌면 혹시 재앙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를 가지고 요나는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 니느웨성을 지켜보기 시작합니다. 마른 나뭇가지와 마른 풀을 주워다가 그늘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허술한 초막을 짓고 그 밑에 주저앉아서 니으웨 성에 재앙이 내리기를 바라며 하염없이 기다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 당시에 니느웨 성 바깥 땅은 매우 황폐했고 먹을 음식이나 마실 물도 구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니느웨 성만 쳐다보면서 막연하게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거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악독하고 괘씸하기 짝이 없는 요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땡볕에 고생하는 요나의 머리 위로 박넝쿨을 자라게 하셔서 그늘을 드리우셨습니다. 6절 후반에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라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선물인 박넝쿨을 받고서 마냥 기뻐하기만 할 뿐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하지 않습니다. 크게 기뻐하긴 했는데 그냥 기뻐한 걸로 끝납니다. 마치 당연히 자기가 받을 것을 받았다는 식입니다. 박넝쿨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값없이, 조건 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즉, 아가페입니다.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는 거룩한 사랑이에요. 이것을 받는데 요나는 어떠한 대가를 하나님께 드린 적도 없고 돈을 지불한 적도 없습니다. 본문 10절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박넝쿨은 요나의 노력이나 의지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값없이 요나에게 내려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오, 박넝쿨! 야, 이제 좀 살 만 하네. 하나님 좀 진작 주시지 그랬어요? 어차피 주실 거면서....
여러분, 혹시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습으로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인간관계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생명을.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계시진 않습니까? 내가 태어난 것조차 하나님의 사랑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모든 상황과 환경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박넝쿨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뜨거운 동풍과 해를 통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부모님은 자식을 오직 따스한 온기만으로 키우지 않습니다. 때로 자식이 잘못된 길로 빠질 때면 사랑의 매로 때리고 훈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과 해러 요나를 훈계하셨습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요나는 반성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또다시 똑같은 원망의 말을 내뱉습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9절에서 요나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 네가 가엾고 불쌍해서 대가 없이 주었던 박넝쿨을 내가 다시 가져간다고 해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물어보십니다. 만약 요나가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다면, 이 질문에 이렇게 답을 했겠죠.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성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 박넝쿨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다시 가져가신다고 해서 제가 어떻게 화를 내겠습니까.” 이렇게 대답을 해야 마땅한 일이에요.
그런데 요나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나님께서 9절에서 요나에게 마지막으로 질문하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이 질문 속에 하나님께서 요나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주는 사랑이 얼마나 큰데 왜 고작 박넝쿨 하나에 네가 매달리느냐? 왜 그것에 빠져서 너의 시선이 나를 향하지 않느냐?
또한 하나님의 이 질문은 요나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최후통첩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요나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결국 요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아니라 끝까지 박넝쿨을 손에서 놓지 않겠다 말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10절과 11절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토록 박넝쿨을 아낀다면, 그래, 나도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큰 성읍 니느웨를 아낄 것이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네가 아끼는 그깟 박넝쿨보다 훨씬 가치 있기 때문이다.”
니느웨가 재앙을 면한 것만 해도 요나는 억울해 죽을 지경인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지어 아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을 들은 요나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우리는 요나가 과연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나 그 어떤 문헌에서도 요나가 하나님의 이 마지막 말씀에 대해 무슨 대답을 하였다거나 어떤 반응을 하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이 눈앞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아마도 그는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은 뒤로 약 30년 뒤에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멸망당해버리고 앗수르는 150여 년간 최강국으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 역사를 미루어볼 때 요나와 이스라엘은 결국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요나가 바라던 멸망은 앗수르가 아니라 이스라엘 그 자신에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멸망했습니까? 바로 박넝쿨 때문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으며, 요나서에서 그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요나가 박넝쿨을 아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박넝쿨을 아꼈다는 것입니다. 박넝쿨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주신 은혜이고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받은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박넝쿨에 얽매여서 그것만 바라보며 그것만 아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박넝쿨을 자신들의 소유물로 여기고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것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들의 기쁨으로 삼고 심지어는 그들의 우상으로까지 여기며 하나님이 아니라 박넝쿨을 그들의 주인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갖고 있는 박넝쿨을 손에서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인 것들, 친구들과의 우정, 연인과의 사랑, 내가 쌓은 지식들 그 모든 것이 내가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향하고 있는 시선을 주님께 돌리십시오. 나에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 분을 찬양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제목을 다시 볼까요? 오늘 제목이 뭐죠? “사랑 받을 자격”이죠. 저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사랑 받을 자격, 없음” 여러분 우리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고, 우리에게는 선한 부분이 조금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해주신다는 거죠. 사랑 받을 자격은커녕 오히려 미움 받을 일만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님은 희한하게도 사랑해주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수고도 하지 않았고 재배한 것도 아닌 박넝쿨을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루하루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대가 없이 주어진 사랑을 받은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풍성한 복을 누릴 때 당연히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반대로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을 때 역시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에 처한다면 그것 역시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뜻하신 바를 이루시려는 크신 계획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136편 23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멘. 우리가 비천한 모습과 상황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빈틈이 없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기억하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듯, 여러분도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는 호흡하며 살아 움직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고 여러분의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절로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시작.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아멘. 이번 한 주간 손에서 박넝쿨을 내려놓고 주님께만 시선을 향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라고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