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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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고등부>
출애굽기 17:1-7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2019. 7. 14
조 정 수
2,000년도에 미국 헐리우드에서 영화 하나가 개봉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은 (ppt) “캐스트 어웨이” 다들 보셨죠? 이 영화는 한 남자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나 비행기가 불시착하고, 주인공 혼자 생존해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살아가게 된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놀랜드인데, 놀랜드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던 환경과 전혀 다른 이 야생에서 먹을 것도 구하기가 어려웠고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 역시도 힘들었습니다.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고, 의식주도 해결이 되지 않는 이런 극한의 상황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시도할 정도로 놀랜드는 절망하였습니다.
온통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다밖에 없는 드넓은 남태평양 한 가운데서, 통신수단도 없고 지나가는 배도 없는 이런 상황인데, 과연 어떤 희망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이한 상황 역시도 놀랜드가 맞이한 이 절망적인 상황과 비슷합니다. 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서 르비딤에 도착하여 장막을 쳤는데, 마실 물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냥 여기까지만 듣게 되면, 에이 물이 없는 거하고 망망대해 무인도에 갇혀 있는 거하고 비교가 되나,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자손에게 물이 없는 상황은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거든요. 거의 200만 명에 가까운 대인원이 움직이는데 소비되는 물의 양이 얼마나 많겠어요. 사람이 하루에 마셔야 하는 물이 2리터 정도라고 하는데, 200만 명이면 400만 리터나 되는 물이 하루에 필요하다는 거예요. 물론 이것은 성인남성 기준이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의 양은 더 적겠죠. 하지만 그 여자와 아이의 양을 뺀다고 해도 그래도 최소 200만 리터의 물은 필요해요.
말이 200만 리터지, 200만 리터가 어느 정도의 양인지 감이 오나요? 저도 감이 안 와요. 그래서 계산을 해보니까 200만리터는 2,000 세제곱미터의 부피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2,000 세제곱미터는 가로, 세로, 높이가 2,000미터인 것을 말하는데, 그만큼 큰 물탱크에 물이 차있다고 생각해보세요. (ppt) 가로, 세로, 높이가 2킬로미터나 되는 초대형 물탱크예요. 이 많은 물을 일주일 먹는 것도 아니고, 한 달 먹는 것도 아니고, 하루에 다 먹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자손이 물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겠죠. 이렇게 엄청난 양의 물을 먹어대니까 이것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항상 물이 풍부한 곳으로 이동을 해야 했어요.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이동할 때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물이 풍족한 곳에 머물렀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을 보면, 그들이 엘림에 이르렀는데, 거기에는 물 샘이 열두 개나 있었습니다. 그 샘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는 모르겠지만 27절 마지막에서 특별히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는 걸로 봐서 그 샘이 200만 명이 마시기에 충분할 정도로 컸으리라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물이 풍족한 곳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백성들이 물이 없는 곳에 도착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강도 없고, 샘도 없고, 우물도 없는 말 그대로 광야인 거예요. 이 광야에서 백성들은 가만히 앉아서 쉬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힘들게 먼 길을 행군하여 장막까지 쳤는데, 이 갈증을 해결할 물이 없어요. 아니, 하나님만 믿고 아무 의심 없이 여기까지 따라 왔는데, 어떻게 여기에 아무 것도 없을 수가 있냐. 여기에 장막을 치라고 했으면 최소한 목은 축일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런 불만들이 흘러나오고, 민원게시판에 글도 올라가고, 급기야는 이제 백성들이 달려와서 시위를 하기까지 하는 이런 상황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2절을 볼까요?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백성들은 사실 지극히 당연한 요구를 한 거예요.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하나님만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완전히 통수 제대로 맞은 거잖아요. 목말라 죽겠는데, 도대체 왜 물이 없는 것인지, 물도 없는데 왜 여기로 오게 한 것인지.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을 직면하게 되면 처음에는 상황을 부정합니다. 아니야. 이거 아니야. 분명히 여기 어디에 물이 있을 거야. 이런 희망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어디에도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의욕상실과 인생 망했다는 허탈함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내 인생 망친 놈을 향해 분노를 터트리게 됩니다. 니가 나를? 나를 이렇게 만들어? 이런 분노가 표출되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바로 이 마지막 단계입니다. 우리를 목 마르게 만든 주범인 모세에게 화가 나서 손가락질하면서 막 뭐라고 하는 거죠. 3절을 보면, 백성들이 모세에게 하는 원망의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정말 극도의 분노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었으면 마시고 싶은 대로 물을 마시면서 살았을 텐데, 왜 우리를 애굽 밖으로 빼내서 이렇게 목말라 죽게 만드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말 분노에 찬 외침입니다. 그런데 이 외침이 이해가 가요. 그렇잖아요. 애굽에서 노예로 힘들게 산 것도 맞고 구해달라고 부르짖은 것도 맞지만,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당하던 때하고 지금 광야에서 갈증에 시달리는 것하고 그 고통에 무슨 차이가 있냐는 거죠.
노예로 죽는 것이나 목말라 죽는 것이나 죽는 건 매한가지거든요. 차라리 애굽에 있었으면 죽을 때 죽더라도 여기까지 두 발이 부르트도록 행군하는 헛수고는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이죠.
때문에 백성들의 분노와 그 원망은 참으로 이해가 갑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화를 낼 수밖에 없어요.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주신다더니 조금도 다를 것 없는 똑같은 고통의 현장으로 인도하시는데 과연 누가 거기에 대해서 감사를 할 수 있겠어요.
그렇기 백성들의 분노는 타당했고 그들이 모세를 찾아가 항의하고 원망하는 것 역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원망은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근본에 너무나 잘못된 신앙이 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2절 말씀을 보면, 마지막에 모세가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백성을 꾸짖는 모습이 나오죠.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 말은 백성들이 지금 물이 없는 상황에 대해서 모세에게 원망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음을 꾸짖는 말입니다. 여기서 시험한다는 말은 7절 말씀과 상호 연관되는데, 7절에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라는 말과 이어지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를 시험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백성들이 당시에 갖고 있던 신앙이 얼마나 얄팍하고 모자랐는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갖고 있는 신앙은 바로 이런 거예요. 우리가 복을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이고, 우리가 안 좋은 일을 당하면 그것은 지금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라는 겁니다. 아주 일차원적인 신앙이죠. 하나님은 애초에 이런 미약한 신앙을 가진 백성들을 위해 눈에 보이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아주 직관적으로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직접 눈으로 봐야 믿고 따라 올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언제까지고 눈에 보이는 것만 좇을 수는 없어요. 믿음이 성정함에 따라 하나님의 표적도 믿음의 수준에 맞게 변화되고, 또 그에 맞춰서 영혼을 연단시킬 거룩한 시련들도 찾아오게 되는 것이거든요.
오늘 하나님이 백성들을 물이 없는 르비딤으로 인도하신 것도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제 진정으로 시작해야 하는 광야 생활은 풍족함이나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고난의 생활이에요. 우리가 교회 나왔다고 해서 죄와 완전히 작별하고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자신을 절제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경건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홍해를 건너서 시작되는 광야 생활은 끊임없는 훈련과 연단의 연속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르비딤에서의 일은 이제 본격적인 광야 생활을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맛보기로 보여주는 작은 시련에 불과해요. 앞으로 너희가 겪어야 하는 시련의 프롤로그라는 거죠.
그런데 백성들은 그것을 이겨내지 못했어요.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리고 원망의 말을 내뱉었습니다. 우리가 목마른 이유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냐며 하나님의 존재를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이 왔겠느냐? 애굽에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고, 그 수많은 애굽의 군대를 다시 홍해로 다 쓸어버린 그 엄청난 능력의 하나님이 지금은 어디에 가셨길래 우리에게 물조차 주지 않으시느냐?
이렇게 원망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린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신앙은 너무나 초라한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구원하시겠다고 마음먹을 만한 그런 대단한 민족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요. 오히려 왜 하필 저런 민족을 구원하시려고 하신 걸까 하는 실망감만 들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기록된 이 모습을 우리는 단지 비난이나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한심하고 초라한 모습이 지금 우리 안에도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양과 형식만 다를 뿐, 우리 안에도 지금 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나약하고 어리석은 모습이 들어 있어요. 내가 기대한 일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내가 하나님께 구한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또 생각지도 못한 힘든 일이 다가올 때 쉽게 원망하고 짜증내는 그런 모습들을 누구나 안에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들을 우리 안에서 떠나보내야 합니다. 우리의 나약함, 우리의 교만함, 우리의 부정함, 우리의 모든 악함을 우리 안에서 분리해 밀어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게 된다면 좋겠지만 쉽게 되지가 않아요. 쉽게 된다면 이미 우리가 예수님이겠죠.
악함과 죄악을 밀어내고 멀리하려 해도 쉽게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찰싹 달라붙는 일도 허다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하고 초라한 모습일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조그만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결코 비웃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칭찬하시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예비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칭찬이 필요하면 칭찬을, 시련이 필요하면 시련을, 상이 필요하면 상을, 훈계가 필요하면 훈계를 그때그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에게 물이 없는 시련을 주셨던 것 역시도 그때 백성들에게 그것이 꼭 필요한 시련이었기 때문이었고, 이후에는 그들에게 물을 주셨어요. 모세의 지팡이로 반석을 때려서 그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했습니다. 원래는 지팡이로 백성들의 뚝배기를, 아니 후두부를 강타했어야 되는데, 하나님은 선하셔서 반석을 때리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거기서 물이 흘러나와서 백성들이 물을 마셨습니다.
잠깐의 시련이 백성들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하나님의 더욱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원망으로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주어진 물을 공급받고 그저 허겁지겁 마시는데 급급했을 뿐이었습니다.
광야생활의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앞으로도 계속 신앙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만약 이 첫 단추를 잘 꿰었다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앞으로 펼쳐질 40년의 광야생활이 많이 단축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복을 받을 때나 시련을 당할 때나 동일하게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기를 의지하였다면 어쩌면 1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떠나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냥 손놓고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며 순간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그때그때 공급해 주고 계십니다. 때론 복을 주시고, 때론 시련을 주시며 우리를 주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으로 만들어 가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한걸음씩 그 길을 걸어가서 마침내 영원한 생명과 평강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