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에게 복을?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0 views
Notes
Transcript
<서광고등부>
창세기 27:21-29
“사기꾼에게 복을?”
2019. 5. 5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말씀은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해진 이삭이 자기 둘째 아들인 야곱을 장남인 에서로 착각하고 축복하여 준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삭은 자기 아내 리브가를 통해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 두 아들은 생긴 외모부터 성격까지 모든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창세기 25장 25절을 보면, 에서는 피부색이 붉고 전신에 털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7장 11절을 보면 야곱이 자기가 매끈매끈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야곱은 몸에 털이 별로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에서와 야곱은 외모가 정반대였어요. 그리고 성격적인 면에서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창세기 25장 27절에 두 사람의 성격을 잘 설명하고 있는데요, 창세기 25장 2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 설명을 통해 우리는 에서가 아주 활동적이고 터프한 상남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 몸은 붉은빛을 띠고 또 온통 털복숭이의 모습으로 한쪽 어깨에는 활을 메고, 허리에는 도끼를 차고 온 산과 들판을 누비며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서와 달리 몸에 털이 별로 없고 허여멀건한 피부에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 바로 밑에 28절을 보면 두 형제의 아버지인 이삭은 에서를 좋아하였고, 어머니인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삭은 남자답고 화끈한 에서를 더 좋아하였고, 리브가는 가정적이고 집안일도 잘 도와주는 야곱을 더 사랑하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처럼 에서와 야곱은 생긴 외모에서부터 성격까지 모든 것이 180도로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또 다른 것이 달랐는데, 그것은 바로 야망이었습니다. Boys be ambitious! 잘 아는 말이죠?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둘째 아들인 야곱은 야망을 가졌습니다. 바로 장남인 에서가 갖고 있는 장자권을 자기가 갖고 말겠다는 야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대로 움직였습니다. 형이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시간대에 맞춰 죽을 끓여 놓고, 배가 고파 기진맥진하여 돌아온 형에게 죽 한 그릇을 주는 대가로 형의 장자권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렇게 야망과 또 그것을 실행할 치밀함을 가진 야곱과는 다르게, 형 에서는 야망도 없을 뿐더러 치밀함과는 매우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장자권을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고, 또 죽 한 그릇에 그것을 팔아넘길 정도로 경솔했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준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산과 들에서 사냥만 하면서 돌아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야망이 없는 에서는 결국 야망을 가진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가 장자권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장자권은 장자가 가지는 권리를 말합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죽으면 다른 형제들에 비해 훨씬 많은 유산을 물려받게 되고, 또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모든 일을 주관하는 가장 큰 어른이 되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사냥하러 다니기 바쁜 에서는 자기가 가진 장자권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을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고, 자기가 날마다 사냥해서 만들어 드리는 고기를 먹고 칭찬해주니까 그게 마냥 즐거워서 현실에 만족하고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야곱은 현실에 만족할 수 없었죠. 야곱은 형이 갖게 될 것을 모조리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야곱은 욕심이 많았어요. 창세기 25장 26절을 보면,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였는데, 태어날 때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은 채로 태어났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엄마 뱃속에서 형이 먼저 나가려고 하니까 먼저 못 나가게 하려고 발꿈치를 잡았다는 거죠. 
    야곱은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욕망의 화신 같은 놈이었어요.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사람이었어요.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도 않은 채로 엄마 뱃속에서부터 이미 본능적으로 자기 욕심을 위해 움직일 정도로 야곱은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야곱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또다시 속임수를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아버지 이삭이 이제 나이가 들어서 눈도 침침해지고 건강도 안 좋아지니까 자기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고, 죽기 전에 에서에게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내릴 수 있는 축복을 내려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전통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을 해줄 수 있었는데, 평생에 딱 한번 축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축복은 장남이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삭의 축복도 당연히 에서가 받아야 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을 해주기 위해서 에서를 불렀는데, 문제는 아무도 몰래 에서만 살짝 불렀다는 것이죠. 원래는 모든 가족들이 다 모여서 지켜보는 가운데 축복을 하는 것이 전통적인 관습이었거든요. 그래야 온 가족들이 진정한 가문의 차기 주인이 누구인가를 인정하게 되고 함께 기뻐하며 잔치를 벌일 수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삭은 이런 전통을 깨고 은밀하게 에서를 불렀습니다. 학자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내놓았는데, 크게 세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첫번재는 과거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리브가가 두 아이를 임신했을 때 하나님이 하신 예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서 하나님이 리브가의 뱃속에 두 아이가 들어 있는데, 그 중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신 예언 때문에. 혹시 내가 온 가족이 있는 자리에서 축복을 하다가는 잘못해서 야곱에게 축복을 내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되어 몰래 에서만 불렀다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견해는 에서가 자기 멋대로 이방민족 여자들을 아내로 맞이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가문의 법도를 어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6장 34절을 보면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35절을 보면, 에서의 이런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이삭과 리브가가 마음에 근심을 갖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문의 계보에 이방 민족의 여인이 들어옴으로 인해서 언약 백성으로서의 순수함에 금이 가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견해는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아넘겼기 때문에 아버지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박탈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입니다. 
    이런 여러 견해들이 있는데, 아마도 어느 하나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이유가 종합적으로 작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예언과 에서의 무분별한 결혼과 장자권을 팔아넘긴 일, 이러한 일들 때문에 이삭은 어쩔 수 없이 에서를 은밀하게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에서에게 곧바로 축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그것은 밖에 나가서 짐승을 사냥하여 그것으로 맛있는 음식을 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내가 먹고 나면 그때 축복을 해주겠다는 거죠. 이것은 아마도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에서에게 퀘스트를 내주고 그것을 완수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축복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최소한의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자 하는 얄팍한 계책이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27장 4절을 보면 이삭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내 마음껏 축복하게 하라.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내가 지금 마음껏 축복을 해줄 수 없는 상태라는 거죠.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아서 지금 축복을 해주기가 어렵다는 말이에요. 이삭의 이 마음상태를 재구성해보면 이런 상태가 아니었을까요? “야, 이 자식아. 왜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가지고.. 아유~ 또 야곱한테 왜 장자권을 팔아넘겨가지고.. 아오~ 내가 미친다 미쳐.” 
    이렇게 막 가슴도 치면서 답답해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삭이 생각해낸 방법이 바로 사냥을 해서 음식을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을 겁니다. 내가 내주는 임무를 네가 완수하면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을 덜고 마음껏 축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에요.
    이삭은 정말 이렇게라도 해서 에서에게 축복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에서를 사랑했다지만 이 정도면 편애가 지나치죠. 이 정도면 그냥 야곱에게 축복을 해도 될 텐데 기어이 에서에게 축복을 해주려고 얄팍한 꾀를 낼 정도로 이삭은 편애가 심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이삭만 편애가 심한 게 아니라는 거였어요. 리브가의 편애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했어요.
    그래서 이삭과 에서가 하는 대화를 몰래 엿듣고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축복을 받아야한다고 생각을 한 거죠. 내가 더 사랑하는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부리나케 야곱에게 달려가서 야곱을 준비시켰습니다. 이삭을 속일 준비를 시킨 거예요.
    이삭이 눈이 침침해서 앞이 잘 안 보였기 때문에 눈으로는 에서와 야곱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에게 에서의 옷을 입히고 또 피부에 염소가죽을 붙여서 야곱을 에서처럼 위장시켰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별미를 만들어서 에서에게 건네주었어요. 
    그래서 야곱은 에서처럼 털이 많아 보이려고 몸에 염소가죽을 붙이고 에서의 냄새가 나는 에서의 옷을 입고, 염소 고기로 만든 별미를 들고 이삭에게 찾아갔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세요. 이삭은 자기가 사랑하는 에서를 축복하기 위해서 은밀하게 에서를 불러서 임무를 내렸고, 리브가는 그것을 엿듣고 자기가 사랑하는 야곱에게 달려가 계략을 써서 야곱을 위장시켰어요. 그리고 야곱은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리브가의 계략대로 행동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런 상황을 우리가 전문용어로 뭐라고 할까요? 이런 상황을 우리는 “콩가루 집안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죠. 완전히 무슨 이런 집안이 있습니까? 부모는 자식들을 편애하고, 둘째 아들은 호시탐탐 형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잖아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집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세상적이고 악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가문이 어떻게 저 모양일까?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계략과 속임수를 써서 자기 야망을 이루려고 하는 야곱이 계획대로 이삭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사건의 배경을 계속 이어서 보면, 에서로 위장한 야곱이 이삭을 찾아가니까 이삭은 아들이 너무나 빨리 돌아온 것에 놀랐습니다. 사냥하러 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언제 짐승을 잡아서 또 언제 음식을 만들어서 이렇게 빨리 돌아왔을까? 그래서 아들에게 물어봤어요.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사냥을 마쳤냐? 그러니까 야곱이 대답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가 빨리 사냥을 마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답을 듣고 나니까 이삭은 의심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목소리가 야곱의 목소리거든요. 아니, 이거 야곱 아니야? 그래서 아들을 가까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피부를 만져봤어요. 에서는 털이 많고 야곱은 털이 없으니까 만져보면 알잖아요. 그런데 만져보니까 털이 북술북술하거든요. 염소털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 22절에 이삭이 이렇게 말을 해요.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목소리는 야곱인데 손을 만져보니까 에서가 맞다는 거죠. 하지만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아서 24절에 이삭이 야곱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봅니다.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러니까 야곱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하니이다.” 
    여러분, 야곱 진짜 나쁜 놈 아닙니까? 앞도 잘 못 보는 불쌍한 아버지 앞에서 전혀 죄송한 기색도 없이 그냥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잖아요. 어떻게 사기 칠 사람이 없어서 아버지한테 사기를 칩니까? 형한테 사기를 치더니 이제는 아버지한테 사기를 쳐요.
    시편 1편 6절에 보면, “악인들의 길은 망”할 것이라고 했거든요. 누가봐도 야곱은 악인이잖아요. 그럼 당연히 사기친 게 걸려서 아버지가 화를 내고 집에서 쫓아내는 스토리가 되어야 정상인데, 오히려 무사히 이삭의 축복을 받게 됐어요. 
    28절, 29절에 이삭이 축복을 하잖아요.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정말 이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축복입니다. 땅에서 얻는 곡식이 풍성할 것이고, 모든 나라와 모든 형제들이 너를 섬기게 될 것이다. 
    이 축복이 끝난 뒤에 이제 야곱은 밖으로 나가고 얼마 안 있어 에서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축복을 해버렸기 때문에 더 축복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축복은 오직 한번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삭은 깜짝 놀랐고 에서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습니다. 당연히 자기가 받아야 할 축복을 동생이 속임수를 써서 훔쳐가 버렸다는 사실에 분노와 좌절이 몰려와서 에서는 통곡을 하다가 야곱을 죽여 버려야겠다면서 야곱을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야곱은 사기 친 대가로 집에서 도망쳐 멀리 떠나게 된 것으로 그럭저럭 권성징악 적인 결말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멀리 도망치던 야곱이 피곤하여 길바닥에서 잠을 잘 때 그 꿈속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축복을 해주셨어요.  축복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야곱에게 “내가 너에게 땅도 주고, 많은 자손도 주고, 항상 너와 함께하면서 너를 지켜주겠다”는 축복을 해주신 거예요. 
    그 축복대로 나중에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는 역사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런 사기꾼에게 이토록 엄청난 축복을 내리신 걸까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기를 치는 이런 악인에게 왜 심판을 내리지 않고 복을 내리셨을까요?
    여러분,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고 거짓말이나 일삼는 이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면, 그리고 그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그가 자신의 죄악과 타락과 악한 본성을 벗어버리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야곱의 이름이 바뀌는 장면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야곱은 “속이는 자, 사기꾼, 빼앗는 자” 이런 뜻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꽉 붙잡고 밤새 씨름을 하다가 하나님에게 엉덩이뼈를 맞아 탈골되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고 버티는 놀라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이겼다”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만난다면, 하나님을 만나 간절함으로 붙잡는다면 반드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태어날 때부터 욕심이 많았고, 자라면서는 자기 이름처럼, 자기가 가진 야망을 이루기 위해 형을 속이고 이후에는 아버지까지 속이는 사기꾼으로서 축복을 훔쳐 달아났지만, 이후에는 하나님을 만나 인격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고, 마침내 이름까지 변화되는 놀라운 모습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야곱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태어날 때부터 악한 본성을 가진 죄인들입니다. 야곱처럼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살아가는 악인입니다. 악인은 멸망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악인에게 악에서 벗어나 선한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물론 그 길을 간다고 해서 단번에 악인이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연단을 통해 거룩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성화”라고 합니다. 거룩할 성, 될 화. 거룩하게 되어져 가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그 과정은 매우 힘겹고 어렵습니다. 어쩔 때는 그냥 포기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제약이 많거든요. 주일에 늦잠도 못자고, 거짓말도 하면 안 되고, 질서도 어기면 안 되고. 항상 그냥 바보같이 손해만 보고 얻는 것은 하나도 없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 되거든요. 안 그래도 나오기 싫은 교회에 헌금까지 내. 돈을 받아도 오기 싫은데 말이죠. 안 그런가요?
    왜 내가 이렇게까지 교회에 나와야 하나. 그냥 집에서 쉬고 싶고, 새로운 한 주를 위해서 힐링도 하고 충전도 하고 싶은데. 
    전도사인 저도 그래요. 한 주만 쉬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저도 해요. 나도 좀 쉬고 싶고, 여행도 가고 싶고, 주님께 매인 이 족쇄를 풀고 그냥 어디 멀리 떠나고 싶은 그런 욕망이 안에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네, 짤릴까봐. 짤릴까봐 그렇게 못 하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에서 짤릴까봐 걱정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짤릴까봐.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짤릴까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서 짤릴까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는 겁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품 안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서 탈락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구원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떠한 죄인이든, 얼마나 악한 사람이든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막연히 미래에 변화될 것을 기대하면서 오늘을 흥청망청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힘들지만 성화의 과정을 겪으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모습을 향하여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뿅 하고 변화되는 게 아니에요. 하루하루 순간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내는 것이 바로 변화의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고, 또 이런 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수고와 인내를 보고 계시고, 칭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고, 반드시 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어려움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그 모습대로, 조금씩 조금씩 거룩해져서 마침내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아 영원히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소망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