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부터 시작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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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고등부>
창세기 12:1-5
“나로부터 시작되리”
2019. 3. 31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면서 아브람을 축복하셨고, 그 명령대로 아브람이 가나안 땅을 향해 자기 가족들을 다 데리고 떠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ppt)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여호와께서 처음으로 아브람에게 말씀 하시는 장면이에요. “이르시되”라는 말은 “말하다”, “말했다” 이런 뜻이거든요. 여호와께서 아브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아브람에게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씀을 하셨냐면,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하셨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첫번째 명령이에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떠나” 라는 말이 없어요. 이거는 한글 성경에만 있는 말이에요.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떠나” 라는 말을 집어넣은 거죠. 그래서 원래는 어떻게 번역을 해야 하냐면, (ppt) 이렇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라고 번역을 해야 돼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는 거예요. 이 1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이 약속된 땅으로 가는 것에 중점을 두고 계세요. 아브람이 그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비로소 다 이루어지게 될 거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입장이에요. 아브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어떨까요? 아브람의 입장에서는 고향을 떠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당시는 같은 씨족기리 무리를 이루어 살던 부족사회였어요. 부족의 크기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부족을 떠나서 독립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족의 족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다가 패배해서 떠난다든지, 아니면 큰 범죄를 저질러서 쫓겨난다든지,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결코 부족을 떠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떠나면 삶이 고달파지거든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강도와 사나운 짐승들의 위협을 피해야 하고, 또 부족 안에 내가 일구어 놓은 논밭에서 안정적으로 식량을 얻을 수 있던 때와 달리 먹을 것을 구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던 아브람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바벨탑 사건이 일어난지 약 200여 년 뒤에 태어난 아브람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아브람이 실제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오늘 본문 1절이 처음입니다. 초면에 인사도 좀 하고 해야 될 텐데, 다짜고짜 “가라.” “가.” 황당하죠. 
    집에서 가족들하고 쉬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갑자기 “이사 가세요.” 이렇게 말하는 거하고 똑같은 거 아니겠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사 가래요. 그러면 아저씨한테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죠. “어디로 가라고요?” 그러면 아저씨가 뭐라고 대답해요? 1절에 써있는 대로 대답하는 거죠.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에게 이사 갈 곳을 보여줄 건데, 지금 보여줄 거는 아니고. 일단 떠나면 나중에 보여줄게. 이런 말인 거죠. 우리는 그 목적지가 가나안 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브람은 앞이 깜깜한 상황입니다. “거기가 도대체 어딘데 떠나라고 하는 걸까?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가기 위해서 잘 살고 있는 고향을 떠나야 되다니. 여기에 내 친척들이 다 살고 있고, 내 땅도 여기 다 있는데 이걸 다 버리고 가야 한다니.”
    너무나 고민이 되고 걱정이 되는 명령이죠. 지금 내가 가족들을 다 데리고 고향에서 나왔는데, 나중에 도착한 곳이 알고 보니 사람이 살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라면 완전히 망하는 거잖아요. 농사도 짓기 힘들고, 가축도 키우기 힘든 그런 황무지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길을 가다가 강도떼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까 고향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더군다나 지금 아브람은 자기 가족들하고 자기 소유만을 가지고 가야 하는 상황이에요. 자기 친척들하고 다같이 가면 숫자가 많으니까 다른 부족이 쉽게 건들지 못할 텐데, 아브람 가족들만 따로 떨어져서 가야 하니까 숫자도 적고 무력도 약하겠죠.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겨우 누가 따라옵니까? 롯 한 사람 따라와요. 물론 롯만 온 게 아니고 롯과 그의 식솔들도 같이 오는 거지만, 그래도 숫자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후에 11절부터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옵니까? 아브람이 아내 사래를 여동생으로 위장시켜서 자기목숨을 부지하려고 애굽 사람들에게 넘겨줘버리잖아요. 그만큼 아브람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지레 겁을 먹고 자기 목숨을 부지할 방도를 미리 마련할 정도로 겁도 많고 쪼잔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인간이 과연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을까요? 아무래도 고민고민 하지 않았겠어요? 떠나야 되나? 떠나지 말아야 되나? 떠나? 말아? 이리저리 재고 생각하고 고민했을 겁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것도 신뢰하지 못하고 아내를 넘겨줄 정도로 믿음이 약한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자마자 순순히 따랐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죠. 
    그런데 어쨌든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오늘 본문 2절과 3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축복을 듣고 난 후에 그의 마음이 움직였어요. 2절과 3절에서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나자 4절에서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라는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난 후에 아브람이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아브람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부족사회에서 이 복은 가장 최상급의 복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자손을 낳아서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던 모든 사람이 꿈꾸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단지 굶지 않고 배부르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넘어서 내가 큰 민족의 조상이 된다는 것, 이 땅에 태어났으면 이 정도 꿈은 있어야죠. 이 정도 꿈 없어요? 사실 저도 없어요. 여러분과 함께 구원 받고 영생을 누리면 그걸로 족합니다. 
    자, 어쨌든 우리가 2절을 끝까지 봐보면, 뭐라고 써있습니까? “너는 복이 될지라.” 이 말은 “아브람 네가 복일 될 것이다” 라는 예언이 아니에요. 명령형입니다.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너는 복이 되어라.” 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먼저 복을 부어주시고, 그 뒤에는 아브람이 세상에 복을 주는 사람이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람을 고향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하시는 이유입니다. 아브람 한 사람을 창대하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세상을 복되게 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죄인들을 한 영혼까지도 놓치지 않고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일은 아브람 한 사람을 통하여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아브람이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지금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었겠죠. 먼 훗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셔야 할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손으로 태어나셔야 했을 거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아브람에게 3절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말씀을 보면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이 복을 내리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이 저주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을 환영하고 아브람에게 선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고, 아브람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아브람은 걱정 없이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를 축복하는 내편은 복을 받아서 더 잘되고, 나를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몰락할 테니까 어디를 가든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라는 구절을 보면 두 개의 “저주”라는 단어가 서로 다른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나오는 저주는 히브리어로 “칼랄”이에요. (ppt) “칼랄”은 저주라는 뜻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경멸하다, 멸시하다” 이런 의미가 강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직접적으로 아브람을 해코지한다기보다는 “아브람을 멸시하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 더 알맞는 해석이에요.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저주는 말 그대로 저줍니다. 이 저주는 히브리어로 (ppt) “아라르” 라고 하는데, “아라르”는 형벌적인 저주를 뜻해요. 이 저주를 받는 자는 반드시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직역하면, 이렇게 돼요. (ppt) “너를 멸시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려 형벌을 받게 할 것이다.” 아브람에게 직접적으로 공격을 하지 않고 단지 멀리서 그냥 경멸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결론은 아브람에게 선하게 대하는 사람은 복을 받고, 아브람을 조금이라도 악하게 대하는 사람은 엄청난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바로 3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2절의 마지막 부분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이에요.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람을 통해 복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단지 아브람과 그 가족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려고 아브람을 떠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람을 통하여 세상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하여서 아브람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아브람에게 그만큼 큰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다른 민족을 복 받게 할 수도 있고, 저주받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다시 말해서 아브람이 그들을 구원할 수도 있고, 멸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한 사람의 영향력이 그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단지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자신도 복을 받고 또 그 복을 다른 민족에게도 전해주는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 간 것이었어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서 목적지가 어딘지도 알지 못한 채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에서 출발해서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는 위험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해서 여행하였습니다. 이후에 그가 비록 믿음을 잃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실수하기도 하는 나약한 죄인의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브람은 근본적인 신앙은 잃지 않았어요. 자신이 복의 근원으로서 세상에 복이 되어야 한다는 그 사명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자신에게 보여주신 약속의 땅,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 결단으로 인해서 아브람은 나중에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고 그 이름처럼 민족의 아버지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아브람과 같은 결단이 있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겁도 많고 엄살도 심한 아브람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결단을 내렸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주신 일을 위하여서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결단이라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단 하나면 돼요. 참 쉽죠?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할 때 우리에게 복 주고 복 주신다고 약속하셨어요. 비록 우리에게 그 복이 얼른 오지 않아서 기다려질 때가 많지만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순종할 때에 반드시 복이 우리에게 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너에게 보여줄 그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을 때는, 비록 아브람이 그 땅이 어딘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분명하게 그 땅을 이미 아브람에게 주셨어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이미 그때 아브람에게 넘겨주셨어요. 물론 거기에 도착해야 진정으로 그곳에서 누리면서 살게 되겠지만 이미 그 땅의 주인은 아브람이 되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복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복을 주셨어요. 다만 그것을 우리가 아직 누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가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하면 택배가 오죠. 그런데 택배를 경비실에 맡겨놓고 갔어요. 그러면 이 택배가 누구 꺼예요? 내꺼죠. 내가 주문을 했고, 상품을 보낸 회사에서도 내 이름으로 배송을 했으니까. 내가 아직 택배를 안 찾았을 뿐이지 내꺼 맞잖아요. 그런데 내 것이 맞긴 맞는데, 아직 내 손에 안 들어왔어요. 택배를 갖고 와야 내가 이걸 사용을 할 텐데 아직 사용을 못해요. 경비실에 있으니까.
    하나님의 복도 마찬가지에요. 이미 우리는 복을 받았는데 그 복을 아직 누리지 못하고 있어요. 이 복을 반드시 우리가 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 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을 누리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세상에 복을 전달하는 일꾼으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세상에 복을 전하는 자로 사용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여서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거룩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그런 복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안주하고 있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저 망망한 바다로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거친 들판으로 복음을 들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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