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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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고등부>
마태복음 21:6-11
“왕의 귀환”
2019. 4. 14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에 제자들에게 명하여 마을에 들어가서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묶여 있는 것을 보면 그것들을 다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나귀 주인이 왜 나귀를 끌고 가냐고 뭐라고 하면 “주님이 쓰실 것이다” 라고 대답을 해주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그가 나귀를 즉시 보내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대로 마을에 들어갔더니 나귀와 나귀 새끼가 정말로 함께 묶여 있었고, 그래서 묶여 있는 줄을 풀어 끌고 왔습니다. 넘의 꺼지만, 사실 이 나귀들은 주님이 예비해놓으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위에 4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밑에 5절을 보면,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어떤 말씀이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어요.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이 말씀은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에요. 먼 훗날 온 땅을 통치할 왕이 오실 건데, 그 분은 겸손하여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예언이었습니다. 
    잠깐 스가랴서를 볼까요? 스가랴 9장 9절, 10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아멘. 
    스가랴가 말한 이 예언은 모든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소망하는 예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언이 현재 우리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몰아내고 강력한 왕국을 일으켜 세울 왕이 곧 오실 것이라는 예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예언 속의 그 왕이시라는 믿음을 가진 거예요. 왜냐하면 구약의 예언들에 나오는 메시야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셨거든요. 병든 자를 치료하고, 귀신 들린 자를 낫게 하고, 물 위를 걷기도 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는 놀라운 능력들을 보이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분명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런 믿음을 가진 자들 앞에서 그들이 믿는 예언이 눈앞에서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너희가 기다리는 왕, 나귀 새끼를 타고 올 왕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이 굳이 예루살렘을 불과 2, 3킬로미터 남겨 두고 나귀 새끼를 타실 이유가 없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먼 길을 지금까지 잘 걸어오시다가 굳이 왜 나귀 새끼를 타셨겠어요. 그리고 성경에서 예수님이 걷지 않고 뭔가를 타셨다는 기록은 바로 여기, 나귀새끼를 타셨다는 기록밖에는 없어요. 일평생 걸어다니시다가 예루살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뭔가를 타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4절 말씀처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타신 것입니다. 따르는 무리와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옛 말씀에 약속된 왕이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아마도 예수님의 명령대로 나귀새끼를 끌고 온 제자들은 나귀새끼를 끌고 오는 동안에 이런 얘기를 나누지 않았을까요? “야, 이거 선지자가 한 예언 아니냐?” “어, 글지? 나도 그런 거 같애.” “그래, 그 누구냐? 스가랴? 스가랴 선지자가 한 말이잖아!”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왕!”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오지 않았을까요? 자기들이 끌고 온 나귀새끼가 왕이 타실 예언 속의 바로 그 새끼짐승이라는 것을 그들도 분명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아주 들뜬 마음으로 기쁨에 겨워서 달려왔을 겁니다. 어서 이 짐승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왕의 능력을 보여주시라고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안장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편하게 앉으실 수 있도록 겉옷을 벗어 나귀새끼 위에 얹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예수님이 앉으시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도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예언 속의 왕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가진 물건들을 이용해서 왕의 길을 장식한 것이죠. 고급스러운 양탄자나 근위병의 절도 있는 사열은 없고, 흙먼지와 꾀죄죄한 겉옷과 듬성듬성 잘라 온 나뭇가지뿐이지만, 이것은 왕의 입성을 기뻐하는 백성들의 최선의 공경의 표현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이 잘라 온 나뭇가지, 이 나뭇가지는 마태복음에 어떤 나무인지 안 나와 있지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종려나무의 가지였습니다. 종려나무는 유대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왕이나 군대가 퍼레이드를 할 때 백성들이 길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거나 땅에 길게 펴놓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종려나무가 어떻게 생겼을까요? 우리교회에도 종려나무가 있죠. 어디에 있냐면, 여러분 왼쪽에. 벽이 있죠. 벽을 뚫고 봐보세요. 교회 밖에 화단에 종려나무가 있어요. 여러분 교회 들어오다 보면 화단에 야자나무 같이 생긴 나무 있죠. 그게 바로 종려나무에요. 별로 예쁘지도 않은 나무를 뭐하러 심어놨겠어요. 그것을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고 한 번 더 떠올려 보라고 심어놓은  거예요.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바로 이날을 기념하여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면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종려주일이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길에 펴놓았다고 해서 종려주일이에요. 바로 오늘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백성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어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분명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을 몰아내고, 또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깨끗하고 정결한 왕국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제는 오직 승리와 영광만이 있는 왕의 통치가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그들이 이렇게 외치잖아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여기서 “호산나”라는 말은 “구원하여주세요”라는 말입니다. 강한 요청과 애원이 들어 있는 말이에요. “제발 구해주세요.” “제발 좀 구원해주세요.”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부르짖은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이 아니었어요. 영원한 멸망에서 우리 영혼을 구원해달라는 그런 깨어있는 외침이 아니라, 지금 자신들이 처한 현실의 상황을 호소하고 있는 거예요. 로마에 굴복당한 현실과 하루하루 힘들게 먹고 사는 어려움, 가난, 질병, 고통, 자신들이 겪고 있는 그 모든 문제와 환란들을 예수님이 다 제거하시고 오직 평강의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이 해결사나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들의 욕망대로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예수님께 외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구원을 외치는 자들이 예루살렘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고, 또한 예루살렘 안에 있던 사람들도 이 환호의 행렬에 동참하게 되면서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지금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절기 중 하나인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유대인들이 몰려와 있는 상황이었어요. 최소 수십 만명의 사람들이 가득 몰려와 있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한쪽이 들썩들썩 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겠죠. 저긴 뭔데 저렇게 시끄러워? 무슨 일이야? 이렇게 점점 더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기록된 것처럼, 온 성이 소동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도대체 저들이 환호하는 저 사람이 누구나며 궁금해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누구길래 저렇게 환호하며 따르는 것일까? 
    11절에서 그 물음에 뭐라고 대답을 했죠?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이 대답은 정확히는 예수님을 갈릴리에서부터 따라 온 무리가 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에 예수님의 집이 있고, 예수님의 가족들이 있으며,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라셨기 때문이죠. 태어나기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인생의 대부분은 나사렛에서 보내셨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요한복음 1장 46절을 보면 나중에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 택함 받는 나다나엘이 나사렛 예수에 대한 말을 전해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아주 촌동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면서 또한 구약의 예언 어디에도 나사렛에서 선지자가 날 것이라는 기록이 없다는 것을 꼬집는 말이었습니다. “무슨 나사렛 그 촌동네에서 선지자가 나와?” 이런 말이죠.
    그리고 이런 생각은 단지 나다나엘만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며 예루살렘에 들어와 왕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 나사렛에서부터 쫓아온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나사렛이든 베들레헴이든 그런 건 생각할 필요가 없었어요.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선지자가 바로 여기 있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심지어 이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오늘 본문 바로 앞 내용인 마태복음 20장 34절에서 예수님이 두 명의 맹인을 눈 뜨게 만드는 놀라운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했어요. 이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이 분은 나사렛 출신이지만 분명한 선지자다! 
    이런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유대인들은 덩달아서 예수님을 환호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예수님은 정말로 예언 속의 왕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이 가장 처음 한 행동은 바로 성전을 찾아가 뒤짚어 엎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어느 마을에 들어가면 그곳의 회당을 먼저 찾아가셔서 기도하시고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가장 먼저 찾으시겠죠. 그런데 성전에 가보니 성전이 성전이 아니고 무슨 돗떼기시장처럼 난장판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짐승을 팔고 물건을 팔고 돈을 바꿔주고, 땅바닥에는 짐승 똥이며 쓰레기며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마치 개선장군처럼 들이닥쳐서 장사꾼들을 내쫓고 상을 둘러 엎고, 정말 영화의 히어로처럼. 지금까지 많은 유대인들이 성전을 깨끗하게 바꾸고 싶어 했지만 로마의 권력을 뒤에 두고 있는 대제사장에게 거역할 수 없어서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그러고는 14절에 보면 뭐라고 기록되어 있죠?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지.” 싹 다 뒤짚어 엎고 나서 바로 거기에서 병자들을 치유해주시고 계신 거예요. 
    정말로 지금까지의 잘못된 질서를 바로잡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선지자처럼, 제사장처럼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선보이고 있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은 그래서 누가 보더라도 선지자이고, 제사장이고, 왕이셨습니다. 메시야가 가진다는 삼대 직분을 다 갖고 있는 진정한 메시야 그리스도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가 무엇을 위해서 온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그것도 유월절을 앞두고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제자들도 몰랐어요.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듣긴 들었어요. 하지만 그냥 흘려들었습니다. 듣기 싫은 말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원하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어요. 그 말이 무슨 말이었습니까?
    마태복음 16장 21절 말씀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아멘.
    예수님은 자신이 결코 권세를 누리거나 왕국을 일으켜 통치하려고 온 것이 아님을 밝히셨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야 하는 이유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을 사망의 저주에서 구할 유월절 어린양, 그 희생제물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마지막 종착지인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나귀새끼를 타시고 능력을 행하시며 정말 유대인들의 모든 염원을 이루어줄 왕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참된 하나님으로서 죄악에 물든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것도, 능력을 행하신 것도, 그리고 오늘 예루살렘에 오신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하신 그대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자신이 한 말씀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앞으로 끌려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하며 그 극진하신 사랑과 은혜를 우리 영혼에 각인시키자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왕을 환호하는 종려주일과 가장 비참하게 죽으신 고난주간은 서로 극과 극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 본질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왜 그 열렬한 환호를 저버리고 목숨을 던지셨는지. 특별히 오늘 그 의미를 깊이 되새기며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에 감격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마치 예언 속 왕이 바로 나라는 것을 자랑하듯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따르는 무리는 그 분을 환호하였고, 그 환호는 길에서부터 예루살렘 성까지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그가 행하신 모든 일은 구약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하는 일이었기에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이시며 강력한 왕국을 세워 통치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과 능력으로 통치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그 흘리신 피로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이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 고백을 했던 유대인들은 이 고백에 담긴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였지만, 오늘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이 고백은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실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소원하며 기대하는 참되고 진실된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를 향하신 그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이 한 주를 경건함과 거룩함 속에 묵상과 기도를 통해 잠잠히 주님께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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