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 viewsNotes
Transcript
16세기 영국 왕 헨리 8세 시대의 법률가이자 재상이었고, 가톨릭 인문주의자였던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이의 섬이죠. 최상의 공화국 이상을 실현한 소설 속 상상의 나라입니다. 말 그대로 이곳은 어떤 불편도 불공정도 차별도 없는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한 곳입니다. 아마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누구나 살고 싶은 그런 세상이죠.
여러분이 살고 싶은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아마 유토피아에서 언급한 그런 세상은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꿀 것입니다. 이런 갈망이 너무 강하다 보니 때로는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신앙이 방해받고 위협받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애석한 것은 그런 우리의 바람은 결국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지만, 적어도 어느 시점,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구원이 완전히 완성되기 전까지는 바람으로 그칠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신앙을 지키는 것, 성도와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꽤 어렵고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것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0:22-
직접적 박해와 함께 이 시대는 영적 타락과 윤리적 붕괴, 그리고 정체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도 없는 큰 혼란과 혼돈으로 가득합니다. 그런 현실은 순수, 순결, 경건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것이죠. 신앙생활은 어렵습니다. 마치 격랑이 몰아치는 거친 바다를 캄캄한 한밤중에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인은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런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이겨낼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세속이라는 파도
먼저 시인은 1~3절을 통해 우리에게 휘몰아치는 파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이 인식은 새롭지는 않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시인이 말한 이런 세상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관용이 없다. 편 가르기다. 자기들만 깨끗한 척한다.”라는 온갖 오해와 비난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역사 이래로 한결같았던 본질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1절을 보시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편 53:1-
세상이라는 공격적 파도의 본질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부인하고 거부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본질입니다. 없다고 하는 사람들,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있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이들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결과를 보시면 참믿음을 가지고 허용, 공존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부패, 가증한 악행, 선을 행하지 않음”입니다. 이 세 가지는 도덕적인 문제, 즉 현실에서 나타나는 윤리의 부재와 파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부패는 “파괴, 파멸, 타락”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버린 영적인 붕괴는 하나님을 닮아 살아가는 도덕적 삶, 윤리적이고 아름다운 선한 삶의 능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부패는 필연적으로 가증한 악행과 선을 행하지 않는 본질적이고 의지적인 삶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삶에서는 100% 악행은 물론이지만, 더 자주 보는 것은 적정한 선에서의 주관적, 선별적 삶의 오염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말이 거짓말은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서 거짓을 처신과 지혜로 바꾸어 받아들이는 식입니다. 직접적 살인은 하지 않지만, 왕따와 비아냥, 교묘히 상처주는 것을 통해 육체의 생명이 아닌, 마음과 영혼의 생명을 노립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에, 이런 악행은 ‘악랄한’이라는 평가보다는 ‘가증한, 교묘한’이라는 평가가 훨씬 적절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자기의 본질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결말과 그 열매를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그런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통해서,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이런 삶의 윤리적 부패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거부하고 지적하며 다르게 살아가려고 하는 믿음을 가진 성도의 존재가 불편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문제를 깨닫고 본질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가 없다는 것, 즉 영적인 지각이 없어서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를 찾았으나(2절), 그 결과는 절망입니다.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편 53:3-
여러분. 우리는 이것이 단지 다윗의 시대만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대에 신약 시대를 살고 있던 바울 역시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바다에 풍랑과 파도가 당연한 것이듯,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바다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인하고 부정하는 이들로 인한 파도가 찾아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기대할 곳이 아닙니다. 이 곳에서 우리의 삶의 안식과 평안의 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에 불과합니다. 세상 그 어떤 권세와 권력이 등장해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완성하기 전에 “신앙의 유토피아, 신앙적 공화국”은 세워지지 않습니다.
파도는 흩어질 뿐
이 맹렬한 파도는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키고 거침없이 질주합니다. 그러나 이 힘이 영원할까요? 우리의 믿음의 소망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까요? 믿음은 그 앞에서 철저히 무기력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통해서 이 파도의 결국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심판”입니다. 5절입니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시편 53:5-
이 파도는 결국 스스로 두렵게 될 뿐입니다. 4절을 보면 이 힘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합니다. 떡 먹듯이 먹는다는 것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한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다 하는데 얼마나 기세가 등등할까요? 하지만, 5절은 세상이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던 바로 그곳,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렵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의미적으로는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평안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돈이 많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래서 후회도 없고 가장 만족스럽다는 바로 그런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하고 안심하고 있던 바로 그 뿌리에서부터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 세상이 그렇게 발전하고 있는데, 온갖 편의와 문명이 발달했는데, 우울증과 심리적 불안 증세가 더욱 커진 것은 이 말씀의 의미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비참함은 이들에게 결정된 결국입니다. “뼈를 흩으셨다.”라는 것은 죽음과 장례와 연관이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해서 무덤조차 제대로 없이 그 뼈가 흩어진 것은 혼란, 불안, 그리고 비참함을 나타냅니다. 전쟁과 같은 혼란 속에서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한 후, 생사를 알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뼈가 흩어진 상태입니다. 힘이 있다고, 질주한다고 했지만,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쌓지 못하고 흩어질 뿐입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21:44-
여러분. 우리는 믿음에 저항하고 믿음을 훼방하는 세상을 바라볼 때, 성경의 이 선언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대감과 배척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파도는 결국 흩어지고 불안하고 무너질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우리가 기대고 의지할 대상도 아니지만, 또한 우리가 두려워하고 적대해야 하는 곳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들의 이러한 실상을 아는 자로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스데반처럼 그들이 용서받고 구원의 은혜를 깨닫도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파도가 아무리 강력해도 해안에 이르면 결국 부서지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게 됩니다. 의미 없는 반복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정말 안타깝고 불쌍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극복: 하나님의 약속(위로, 심판)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입술을 통해 이 파도 앞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5절에서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도 모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겠다는 심판도 모릅니다. 심판을 비웃고 코웃음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5절을 잘 보십시오. 세상이 자신하던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두려움이 없다고 하는 곳에 두려움이 왔습니다. 힘을 결집하고 뭉쳐서 전진한다고 생각했지만, 뼈가 흩어지듯이 비참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의 자랑과 자부심은 결국 수치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금 당장의 모습에 현혹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똑같은 힘을 추구하고 높은 곳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것을 바르게 하며, 오직 참되고 진정한 것만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진짜를 가장한 가짜는 사라지고 소멸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히브리서 12:9-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시편 39:11-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의 위로가 되십니다. 시편 53편은 시편 14편과 거의 같습니다. 시편 53편에서는 악인과 세상의 심판을 좀 더 강조합니다. 그런데 14편은 이런 심판과 함께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약속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시 14:6절입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시편 14:6-
세상의 방해, 믿음을 향한 공격, 하나님에 대한 모욕적 언사와 무례한 무시는 성공하는 것 같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가난한 자의 계획’, 즉 믿음을 좇는 연약한 사람들의 소망, 뜻,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약한 자들, 세상에서 실패하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힘든 이들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자가 되신다는 것이죠.
밤에 거센 파도가 몰아쳐도 바다에서 살아남는 것은 그런 거친 바다에 있지 않습니다. 길을 안내하는 하늘의 별자리와, 먼 수평선에서 조그맣게 보이는 등대의 불빛이 항해자의 구원입니다. 위로는 어둠에 있지 않습니다. 바다에 있지 않습니다. 하늘을 봐야 합니다. 등대의 불빛을 보아야 합니다. 짙은 어둠이 우리의 마음을 불안과 두려움으로 채우고 손에 힘을 뺄 때, 우리는 사력을 다해서 진정한 위로이신 하나님의 별빛과 등대를 찾아야 합니다. 이 약속의 빛을 통해 우리는 바른 방향을 찾아서 위기를 극복하고 믿음의 전진을 할 수 있습니다.
빛을 따라 길을 찾는 법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깨닫고, 밤과 같은 인생을 극복하는 빛, 길을 안내하는 그 길을 우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