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23 금요기도회: 욥기 3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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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번 한 주도 저희를 지켜주시고, 저희가 알게 모르게 저희에게 각종 은총을 베푸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삶, 인생, 그리고 저희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아가기 위하여 나아왔습니다. 저희의 됨됨이, 그리고 저희가 누구인지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더 알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기독교 신앙은 자기 부인에서 시작됨을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저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신실한 백성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말씀과 기도로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2:10-18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욥기 32:10–18 NKRV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당신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진상을 파악했으나 그를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그가 내게 자기 이론을 제기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이론으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었더라 당신들이 말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하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번 한 주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 주간 삶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위로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그런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먼저 말씀을 듣고, 함께 말씀을 두고 기도하면 좋겠는데요. 오늘 말씀은 욥기 32장의 세 친구와 욥이 끝나고 엘리후가 나타나서 자신의 주장을 하기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욥에게 말하는 이 엘리후의 말을 통해 고난 중에 있는 동료 성도에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깨닫고 하나님 앞에 신실한 성도가 되길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31장에서 이제 욥의 세 친구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끝나게 됩니다. 욥기를 처음부터 쭉 읽어나가는 독자에게, 그리고 심지어 욥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제 침묵하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랑하시는 종인 이 욥의 질문에 응답하시고 위로해 주시길 기대하게 됩니다. 욥이 지금까지 하나님께 요청했던 것처럼 이제는 이유 모를 고통이 찾아와 괴로워하는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정리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침묵하고 계셨고, 침묵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욥의 고통이 더 커지는 상황이 추가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엘리후라는 한 젊은 청년의 등장이었습니다. 이 엘리후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세 친구와 욥의 이야기를 잠잠히 듣고 있다가 이 네 사람의 논쟁이 끝나자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엘리후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왔는지 밝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이 엘리후는 32에서 37장까지 이어지는 여섯 개의 장 분량이나 되는 아주 긴 연설을 늘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엘리후가 한 각각의 연설을 세밀하게 보지 않고 엘리후가 한 연설의 가장 큰 특징을 말씀을 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엘리후의 연설은 세 친구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10절부터 보시면 엘리후가 자신의 말을 들으라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엘리후가 말하는 이유는 간단한데, 16절을 보시면 세 친구가 더이상 욥에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찌 더 기다리라”라고 하면서 엘리후가 말하기 시작합니다. 13절도 보시면 세 친구가 “우리가 진상을 파악했으나 그를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분명히 이들은 욥에 대한 주장을 마무리하면서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의 의미는 그들이 욥을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세 친구 입장에서 욥이 고집스러워 “하나님에게 넘”김으로 이제 설득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이와 같은 말을 하면서 욥을 설득시키는 것을 포기한 세 친구를 향해 자신이 이제 이어서 말을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엘리후의 입장에서 말을 그친 세 친구는 욥의 친구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직무유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엘리후가 말하는 목적 또한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세 친구와 같은 목적인 욥을 꺾고 욥을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세 친구가 결국 욥을 꺾지 못하고, 죄를 지은 욥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있는데 그것을 욥이 깨닫게 하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실제로 욥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 친구와 엘리후의 시선에서 욥이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엘리후가 보기에 세 친구는 이것에 실패하였습니다. 세 친구는 욥을 회개하게 만드는 것을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14절에서 엘리후는 “나도 당신들의 이론으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하면서 세 친구들과 같은 주장으로 욥을 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엘리후가 세 친구들의, 일종의 세 친구들의 사명을 자신이 이어가겠다고 선포한 것은 자신 또한 세 친구처럼 ‘하나님의 영’, 다시 말해 ‘전능자의 숨결’이 자신에게도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18절을 보시면 “내 배 속에 있는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내 영”이라고 되어 있지만 33장 4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여기서 말하는 내 영은 사실상 “하나님의 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도 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영”과 “숨결”이라는 표현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으면서, 첫 번재로는 엘리바스의 환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확실하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엘리바스가 어떤 환상을 보았습니까? 4장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 것은 필히 하나님께 무엇인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후도 이 엘리바스의 환상이 틀림 없는 진리라고 주장하며 욥의 고난에 대한 해석을 세 친구와 같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결국 자신도 세 친구처럼 엘리바스의 환상을 앞세워 욥을 정죄하고 욥이 회개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33장 14-30절에서 엘리후는 엘리바스의 환상을 광범위하게 인용합니다. 엘리바스의 환상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면서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엘리바스에게 환상을 주신 것은 욥이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함이며 욥에게 임한 고난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 사인’이기 때문에 욥이 이 환상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메세지에 순종한다면 회복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금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을 경고합니다. 그래서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겁니까? 1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 의견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엘리후는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을 세 친구와 욥에게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총 정리하면 무엇입니까? 엘리후는 갑자기 나타나 세 친구들의 실패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주장을 할 줄 알았지만, 결국 엘리후의 주장도 세 친구와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엘리후의 연설 내용, 그리고 연설하는 목적은 세 친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엘리후의 주장이 지혜로운 것처럼 보였지만, 엘리후의 말도 결코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세 친구가 날카로운 말을 쏟아부어 욥에게 엄청난 상처를 줆으로 욥의 고난이 더 심해졌기에 말을 그만해도 될 듯한데, 또 엘리후라는 청년이 일어나 욥을 정죄한느 말을 쏟아붓게 됩니다. 분명 엘리후의 열심은 대단하지만, 잘못된 열심이라는 점에서 안타깝습니다. 엘리바스의 환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사탄이 보여준 환상이었기에 엘리바스의 환상을 인용하면서 욥을 정죄하는 것은 결코 의로운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엘리후도 본인이 하나님의 위치로 올라가 마치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말인 것처럼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엘리후 역시 세 친구처럼 ‘하나님의 통치 지혜’를 함부로 논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습니다. 분명 엘리후가 말한 보응 원리, 즉 의인에게는 상을 주시고, 죄인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이 원리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잠언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보응 원리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응 원리로 욥의 고난을 해석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욥의 고난은 욥이 잘못했기 때문에 찾아온 고난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응 원리로 욥의 고난을 해석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엘리후는 스스로 하나님의 길을 알며 하나님을 자신이 대변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2차원적인 지혜인 ‘보응 원리’라는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이 엘리후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고난의 문제 앞에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특히 안 그래도 세 친구를 통해서 욥의 고난이 더 극심해졌는데 엘리후처럼 자신이 마치 하나님인냥 나타나 욥의 고난을 더 힘들게 만드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도 32장부터 37장까지 여섯 개의 장이나 되는 아주 많은 말로 말입니다. 엘리후는 세 친구가 실패한 것을 자신이 성공할 줄 알았겠지만, 세 친구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욥에게 더 큰 고통을 선사한 것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동료 성도가, 동료 신자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어쩌면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해석하고 싶어하는 강박증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나타난 현상에 대한 해석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욥기, 특히 오늘은 이 엘리후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안 그래도 고통받고 있는 자에게 더 큰 고통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욥은 장장 여섯 개의 장이나 되는 아주 고통스러운 말을 대꾸하지 않고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엘리후 때문에 욥의 고통의 시간이 더 길어지기만 하였습니다. 고난받고 있는 성도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엘리후와 같은 자세가 아니라 고난 당하는 자 옆에서 그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보여줘야 했던 진정한 지혜있는 자의 모습은 세 친구가 잘못을 범하였을 때 그들의 폭력적인 말을 끊고 욥을 그들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슬픔에 동참하여 그를 위로하며 감싸안아주는 것이 엘리후가 했어야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고난받는 동료가 있다면 우리는 그가 더 극심한 고난을 받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합니다. 엘리후와 같이 그에게 더 큰 고난을 주는 방식을 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가르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에게 찾아온 고난,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찾아온 고난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이것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고난받는 자가 우리 주변에 있을 때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고난받는 자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로하며 그가 세 친구로부터 받은 것과 같은 더 큰 고난을 받지 않도록 그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입니다. 세 친구의 말을 끊고 욥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오늘 말씀에 따라 진정한 지혜자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새순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지혜의 길을 걸어가 이 교회가 고난받는 자와 함께 고난을 이기게 되는 복된 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후는 세 친구를 통해 가중된 욥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욥의 고난에 대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욥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고 욥이 세 친구들에게서 더 고난받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욥의 고난을 더더욱 가중시키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엘리후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고 우리 주변에 있는 고난받고 있는 성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함으로 고난을 함께 이겨나가는 복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더 큰 고난을 받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보호해주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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