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을 벗고

고린도후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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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고린도후서 3:12-18
“수건이 벗고”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2025. 5. 26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수건을 벗고”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본문에 이어서 영광에 대한 확신을 주는 내용인데요. 지난 시간에는 율법 조문의 직분과 영의 직분을 비교하면서, 두 직분 모두 영광이 있지만, 율법 조문의 직분은 없어질 영광이고, 영의 직분은 영원한 영광이라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이 영원한 영광 가운데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에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 소망을 가졌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 12절에 보니까,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이같은 소망, 우리가 영광 가운데 있다는 소망이죠. 
    자, 그러면서 밑에 13절에 가서 보면 수건이 나와요. 오늘 본문에 수건이라는 말이 총 여섯 번 나오는데요. 이 수건이 오늘 본문의 키포인트입니다.
    자, 13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13절 시작,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아멘.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과거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지 못하도록 자기 얼굴에 수건을 썼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런 말이죠. 
    출애굽기 34장을 보면, 모세가 증거의 두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이 남아서 광채가 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비췄는데, 그 흔적이 얼굴에 희미하게 남은 겁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 희미한 흔적을 보는 것도 두려워했어요. 흔적만 희미하게 남았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이기 때문에 감히 볼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모세가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못 보게 하려고.
    이것을 지금 바울이 오늘날에도 그 수건이 있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과거에 모세가 영광을 가리기 위해서 썼던 수건이, 오늘날에도 있다. 그래서 그 수건을 쓰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우리는 그렇게 안 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말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우리는 그렇게 안 하는데, 수건을 얼굴에 쓰는 사람들이 있다.’
    밑에 14절, 15절에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설명하는데요. 14절, 15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아멘.
    그 수건이 오늘까지도 있다는 거예요. 오늘까지도 벗겨지지 않고 그대로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이 수건을 벗어버려야 되는데, 마음이 완고해서 안 벗어요. 이 마음이 완고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포로오” 라는 말이에요. 포로오. 이 말은 “굳어있다, 무감각하다” 이런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굳어가지고 감각이 없다는 거예요.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없고, 아무런 감동이 없는 상태라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변화를 싫어한다는 겁니다. 지금이 좋사오니.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지 않고, 율법 안에만 머무르려고 해요. 새 언약이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는데도, 여전히 옛 언약에 매여 있습니다. 이것이 수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에요.
    과거에 모세는 자기 얼굴에 남아 있는, 그 희미하고 금방 없어질 영광을 가리기 위해서 수건을 썼지만, 이제는 더이상 수건이 필요 없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됐어요.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은혜의 대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영광을 수건으로 가릴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 마음을 수건으로 덮어서 영광의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어요. 그래서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은혜가 없고, 아무리 열심히 구약을 읽어도 변화가 없는 겁니다. 
    영의 눈이 가려져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영의 귀가 가려져서 제대로 듣지 못하는 영적 장애인으로 남아서, 계속해서 율법의 속박에 매여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몰라요. 조상 때부터 해오던 것이니까, 그게 맞는 것인 줄만 알고, 계속 그렇게 사는 거예요. 변화를 거부하고, 전통을 있는 그대로 지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처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입니다. 낡은 부대에 담으면 터져버려요. 마찬가지로, 새 언약을 딤기 위해서는 새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리라는 결단이 있어야만 새 언약의 영광을 감당할 수가 있어요. 
    복음을 듣고도 여전히 옛 것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결코 그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장막을 걷어야 돼요. 내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수건을 걷어버리고, 진리의 말씀을 바라보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내 삶의 방식과 복음이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복음을 보고 듣는 일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주일에는 쉬고 싶은데, 왜 꼭 교회를 가야 하나? 술도 한 잔씩 하고 싶은데, 왜 술을 끊어야 하나? 세상의 즐거움이 많은데, 왜 다 물리쳐야 하나?’ 이러한 답답함과 고통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복음의 길은 좁은 길이기 때문에 당연히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 고통은 성장통입니다. 그 고통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멀리하고, 세상의 유익을 포기하고, 좁고 협착한 그 길을 걸어갈 때에, 우리가 연단되어져서 마침내 정금과 같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그때에 우리가 주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아멘.
    우리가 계속해서 연단되고 연단되어가다 보면, 결국에 어떻게 됩니까?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되죠. 그와 같은 형상. 여기서 그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형상.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성품과 인격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외모가 변한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성품, 우리의 인격,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을 닮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처럼 보이게 되는 거예요. 얼굴은 분명히 내 얼굴인데, 그 얼굴에 예수님의 성품이 보이고, 예수님의 인격이 보이고, 예수님의 영광이 보여요. 
    바울은 이것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목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누구처럼 돼야 하느냐? 바로 예수님처럼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수건을 벗어버리고, 복음의 길을 따라서, 그 길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에서 내 욕심과 자존심을 깎고 잘라서 더 낮아지고 더 낮아지면, 마침내 가장 낮은 곳에서 예수님을 닮은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닮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을 따라, 말씀을 따라 살아냄으로 말미암아, 어제보다 오늘 더 예수님을 닮고, 오늘보다 내일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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