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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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
성경봉독
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14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15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서론
서론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는가?
수고많았다.
옆 사람과 인사하며 격려하자.
오늘 하루 동안 수많은 선택과 그에 따른 행동을 하게 된다.
오늘 하루 중 있었던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를 떠올려 보라.
그 일 속에 내가 행한 선택이나 행동을 떠올려 보라.
그 안에 믿음이 들어있었는가?
믿음으로 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 장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
라고 말씀한다.
물론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다.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이다.
이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때로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고 확증할 필요가 있다.
나의 선택과 행동이 믿음인지 어떻게 확신하고 확증할 수 있는가?
학교 다닐 때 과학실험을 해 보았는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에 하나
어떤 물질이 산성인지 염기성인지 확인하는 실험
이 때 사용하는 것이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빨간색 종이가 파란색으로 바뀜 -> 염기
파란색 종이가 빨간색으로 바뀜 -> 산성
믿음에도 이런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이 있을까?
이떤 말이나 행동이 믿음으로 한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나 지표
일명 ‘믿음의 리트머스 시험지’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사무엘상 14 장 말씀을 통해
믿음의 리트머스 시험지 3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오늘 본문 -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 이야기
내용이 많고 길다.
그런데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루 동안 사울과 요나단은 많은 선택과 행동을 한다.
이들의 선택과 행동을 살펴보며 믿음의 케이스 스터디를 해보자.
본론
본론
담대함, 믿음의 첫번째 리트머스 시험지
담대함, 믿음의 첫번째 리트머스 시험지
믿음의 리트머스 시험지 3가지 중 첫번째가 무엇인가?
담대함
내가 한 선택이나 행동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따라 한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뛰어넘는 담대함이 있었는가?
이것을 통해 우리는 그 안에 믿음이 있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담대함은 무모함과는 다르다.
믿음은 신뢰를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 신뢰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뛰어넘는 담대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다윗은 시편 18 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을 보면
나를 죽이려는 적군들이 진을 치고 있다.
높은 담이 내 앞을 막고 있다.
현실만을 바라볼 때는 도저히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적군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다.
담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담대함의 케이스 스터디: 요나단
담대함의 케이스 스터디: 요나단
오늘 본문 사무엘상 14 장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음
이스라엘 - 베냐민 땅 게바에 진을 침
블레셋 - 믹마스에 진을 침
서로 대치상태가 길어짐
돌파구가 필요했음
그러던 어느 한 날
요나단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과 단 둘이 적진으로 건너감
눈 앞에 험한 바위와 골짜기가 가로 막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요나단은 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같이 읽어보자.
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 속에 ‘담대함’이 느껴지는가?
요나단에게는 담대함이 있었다.
현실을 뛰어 넘는 담대함이 요나단에게 있었다.
그 담대함은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어떠한가?
적의 숫자는 자신보다 많았다.
또한 그들 앞에는 험한 바위와 골짜기가 있었다.
그러나 요나단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일하실 때
사람의 많고 적음을 뛰어 넘어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이 요나단을 담대하게 만들었다.
담대하게 적직을 향해 달려가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
14-15절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14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15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블레셋 진영에 큰 공포와 떨림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요나단이 믿음으로 행한 담대한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다.
담대함의 케이스 스터디: 사울
담대함의 케이스 스터디: 사울
반면 그의 아버지 사울은 어떠했는가?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누구보다 믿음의 본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블레셋 적군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머리속 계산으로는 싸워 이길 승산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현실의 두려움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블레셋 진영의 큰 소동을 보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요나단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사울은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블레셋 진영을 공격했을 때 승리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사울은 어떻게 하는가?
18-19절이다.
18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19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사울은 제사장 아히야를 불러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한다.
아마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전쟁의 승패를 하나님께 묻는 의식, 즉 신탁을 하려 한 것이다.
하나님께 묻는다고 하니 사울에게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의식을 행하는 중에 점점 더 블레셋 진영의 소동이 커져 간다.
전쟁의 승리 가능성이 점점 더 크게 보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사울은 제사장에게 ‘네 손을 거두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승패를 물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물으나마나 승리할 것 같다는 말이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 행하던 의식을 중단하고 전장을 향한다.
이러한 사울의 선택과 행동은 어떠한가?
현실을 뛰어넘는 담대함이 있는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는가?
그의 행동을 믿음 있는 행동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울의 행동에는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께 묻는 신탁을 행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했고,
눈 앞에 현실 앞에서 그 형식마저 무시해 버렸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기도해보고 결정한다는 말을 한다.
기도가 정말 필요하다.
하나님 앞에 묻는 태도는 중요하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이나 내 판단, 내 계산을 내려놓는 마음의 태도이다.
말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한다 하면서
머리로 이미 현실적인 계산을 하며 답을 정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주신다 할지라도
현실을 뛰어넘는 담대함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믿음의 담대함이 있기를 축복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상황을 보고 가능성을 보며 따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담대함으로 현실을 벽을 뛰어넘는 믿음의 역사가 있는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축복한다.
자유함, 믿음의 두번째 리트머스 시험지
자유함, 믿음의 두번째 리트머스 시험지
믿음의 리트머스 시험지 3가지 중 두번째는
자유함이다.
어떤 선택이나 행동에 자유함이 있는지 아닌지를 살피면 믿음으로 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이 자유함은 방종과는 다른다.
요한복음 8 장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
31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또한 로마서 8 장에서 사도 바울은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자유와 해방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유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저주 아래에 있지 않고 해방되어 하나님의 복 아래 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진리 안에 있을 때, 성령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자유와 평안을 누린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된다.
그와 반대로 믿음 밖에 있을 때 우리는 자유함을 잃어버린다.
율법 아래 머물러 판단하고 정죄하며 두려움 가운데 살게 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나단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전쟁이 계속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군을 좇아 싸우느라 체력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러던 중 수풀 속에서 꿀을 발견했다.
이에 요나단은 어떻게 하는가?
27절 말씀이다.
27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에게 맹세하여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벌집의 꿀을 찍고 그의 손을 돌려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요나단에게는 자유함이 있었다.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벌집의 꿀을 찍고
그의 손을 돌려 입에 대었다.
그럴 때 눈이 밝아졌다.
고된 전투로 기력이 쇠약해졌던 그의 몸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곤함에도 눈에 보이는 꿀을 먹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사울의 맹세와 저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24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24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사울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억지로 맹세시켜서
저녁 이전에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저주가 두려워 이스라엘 백성은 배가 고파 피곤함에도 눈 앞에 있는 꿀조차 먹지 못했던 것이다.
사울의 이러한 맹세와 저주는 결코 믿음에서 난 행동이 아니다.
승리에 대한 욕망과 집착의 결과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고자 하는 사울 자신의 그 욕망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그 저주 아래 놓인 이스라엘 백성은 평안이 아니라 두려움 가운데 처하게 된 것이다.
반면 이 맹세와 상관없는 요나단은 자유함 가운데
눈 앞에 있는 꿀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먹었다.
그 뿐이 아니다.
사울의 믿음 없음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한다.
하루 동안의 전쟁이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까지 뒤를 좇아가 블레셋 적군을 쳤다.
하루 종일 음식도 먹지 못하고 적과 싸웠으니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드디어 해가 떨어져 저녁이 되었다.
사울의 저주가 두려워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배고픔 가운데 심히 피곤해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소와 양을 잡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급한 나머지 피째 고기를 먹고 말았다.
율법에는 고기를 먹을 때에는 먼저 피를 제거한 후에 고기를 먹으라고 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은 피가 빠지기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율법을 어기고 만 것이다.
그 모습을 알게 된 사울이 그들을 향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33절이다.
33 무리가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째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여기서 ‘믿음 없이 행하다’는 말은 ‘누군가를 배반하고 악을 행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악행을 행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사울 자신이 아닌가?
사울이 어리석은 맹세와 저주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울 자신은 의로운 척, 선한 척하며
자신의 백성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마 12장 참조).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의 비난을 향해
다윗도 배가 고플 때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던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믿음의 자유함이 있기를 축복한다.
두려움과 염려, 정죄와 판단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함과 평안을 마음껏 누리는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축복한다.
생명, 믿음의 세번째 리트머스 시험지
생명, 믿음의 세번째 리트머스 시험지
믿음의 리트머스 3가지 시험지 중 마지막 세번째
생명이다.
다시 말해 어떤 결정과 행동을 통해 살아나는 역사가, 살리는 역사가 있는가를 보면 믿음으로 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믿음에는 생명의 역사, 살리는 역사가 있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곳에는 사망과 죽음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 장에서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을 때 그 생명과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할 때 그로 인해 살아나는 역사가 있게 된다.
로마서 8 장에서 사도 바울도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우리는 생명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블레셋과의 하루 동안의 치열한 전쟁이 저녁이 되면서 끝나가고 있었다.
이미 블레셋 적군은 다 도망치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사울은 이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침 동틀 때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계속 추격해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믿음의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과한 욕심, 과욕이었다.
자신의 치적을 쌓고 싶은 그의 욕망인 것이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은 지칠대로 지쳐 있는 상태이다.
그 상태에서 빛도 없는 캄캄한 밤에 추격을 계속 하라는 것은
자신의 부하들과 백성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작전인 것이다.
하지만 사울과 함께 있는 무리는 사울의 뜻을 거역하지 못한다.
그런데 제사장이 나서서 먼저 하나님께 물어보고 결정하자고 요청한다.
사울은 제사장의 요청을 따라 하나님께 묻는다.
37절이다.
37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런데 놀랍게도, 아니 사울의 기대와 다르게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신다.
왜 하나님이 침묵하셨을까?
사실 사울은 하나님께 묻는다고 했지만
진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미 욕심 가운데 하고 싶은 일을 정해 놓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의 정당성을 이 신탁을 통해 얻고자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울은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사울의 의중과 마음을 잘 아셨기에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이다.
사울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자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
38-39절이다.
38 사울이 이르되 너희 군대의 지휘관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
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
사울은 하나님의 침묵이
백성들 가운데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고 그 책임을 전가시킨다.
그리고 자신이 그 자를 찾아 죄값을 물어 죽이겠다고 말한다.
사울의 믿음 없는 행동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역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가?
너무나도 당황스럽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제비뽑기에 뽑히고 만다.
43-44절이다.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요나단이 꿀을 먹은 것은 전혀 죄가 아니다.
심지어 요나단은 사울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억지로 맹세를 시킬 때에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요나단은 사울의 맹세를 알지도 못했다.
그 사실을 사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울은 자신의 아들 요나단을 죽이고자 한다.
자신의 왕의 자리와 위신을 지키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결코 믿음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과 정욕을 따른 결정과 행동이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죽음과 사망이다.
반면 요나단은 어떠한가?
지금 상황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 바로 요나단 자신이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이 누구인가?
요나단이 아닌가?
그 공로를 인정받기는 커녕
자신이 맹세하지도 않은 사소한 일로 인해 죽게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죄인, 그것도 죽을 죄를 지은 죄인 취급을 받고 있다.
당연히 항변하고 따져 물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요나단은 그러지 않는다.
43절에서 요나단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43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이 말은 ‘내가 죽음을 감당하겠다’는 말이다.
지금 사울로 말미암아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은
누군가가 죽어야 끝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사울은 지금 자신이 원한 계획의 실패의 책임을 물을 희생양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요나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요나단은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왜 내가 뽑힌 건가요?”
“왜 나입니까?”
“정말 억울합니다. 이건 아니잖아요.”
하나님을 향해 사람을 향해 얼마든지 항변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사울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담담히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결정이기도 하다.
요나단은 믿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45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요나단의 생명을 구한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요나단을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으셨다.
믿음의 역사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믿음으로 살리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한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나도 살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살리는 역사가 있는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축복한다.
결론
결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히 11:6)고 힘주어 말씀한다.
우리가 믿음 안에 살아갈 때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믿음으로 행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 큰 떨림과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담대함과 자유함, 그리고 생명
이 세가지가 믿음의 지표이다.
우리의 행함에 이 세 가지가 있기 원한다.
달리 이야기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행할 때
우리는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 수 있다.
자유함과 평안으로 살 수 있다.
생명과 풍성함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