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2:26-35 아비아달의 파면과 요압의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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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26-35 아비아달의 파면과 요압의 처형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성어가 있습니다. 본래 불교 용어인 이 말은 불자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행위의 옳고 그름이나 선함과 악함에 따라 그 결과를 후에 받게 된다.’라는 의미로 많은 이가 순화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마땅한 죗값을 치른다’라는 개념으로 쓰입니다. 오늘 나눌 본문을 관통하는 단어가 바로 이 ‘인과응보’입니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이스라엘 3대 왕이 되었습니다. 다만, 대개 권력 이양 과정이 그렇듯 이스라엘은 권력 공백기를 틈타는 이들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이에 어제 본문부터 시작해 솔로몬은 정적을 신속하게 제거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자신이 왕이라고 해서 적대 세력을 이유 없이 죽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라에는 여전히 복수의 불씨가 살아남아 금세 전란이 일기 때문입니다. 이때 솔로몬이 내세운 논리가 바로 ‘인과응보’입니다. 그들의 죄에 따라 합당한 죗값을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솔로몬은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야욕을 드러낸 아도니야를 죽여 자기 왕권 제일 위험 요소를 없앴습니다. 그 뒤 그의 칼날은 신정국가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종교 지도자를 향했습니다.
1. 주어진 직무에 충성합시다(26-27)
그가 아비 아달을죽일 수 없는 이유를크게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아비아달이 다윗시대에 야웨 하나님의 궤를 메었다는 것괴〈대상 15:11- 15), 다른 하나는 다윗과 함께 환난을 당했다는 점이다(왕상 2:26-27). 다른 사람은 죽이면서 아비아달에게는 조건도 붙이지 아니하고 파면만 시킵니다. 이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아비아달은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대상 15:11-15)와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당하여 피난할 때(삼하 15:24-29) 법궤를 맡아 책임짐으로써 다윗을 도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비아달은 왕의 후사의 결정 과정에서 솔로몬이 아니고 아도니야를 좇음으로써 큰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는 판단력이 흐려졌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성직자는 성전에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과 백성 간의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깨닫지 못하고 왕의 후사 문제에 개입하였다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2. 생명을 귀하게 여깁시다(28-32)
아도니아는 죽고 아비아달 제사장이 면직되어 고향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요압은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뿔을 잡습니다. 그는 아도니아의 전례(왕상 1:50)가 있고, 출 21:13-14의 규례에 의해서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실수로 살인 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의 뜻을 정면 거스려 자기의 야욕과 복수심으로 이스라엘의 두 장수 아브넬(삼하 3:23-27)과 아마사(삼하 20:4-10)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브나야를 보내어 죽이도록 했는데 요압이 ‘여기서 죽겠노라’라고 말하자 솔로몬은 재차 명령하면서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아버지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하면서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그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이 일을 내 아버지 다윗은 알지 못하셨나니 그들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의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집과 그의 왕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그를 쳐 죽입니다.
즉 요압이 죽은 것은 다윗과 솔로몬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린 자의 죄에 대하여 반드시 응징하심으로 공의의 심판을 하십니다.
살인자의 특징은 자신의 생명은 귀히 여기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은 귀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요압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파렴치한 자입니다. 또한 자신이 지은 살인죄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지도 않았고 또한 이 일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귀히 여기십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특히 다윗이 알지 못한 범죄 행위를 솔로몬은 알고서 그것을 거론합니다. 무서운 역사의 한 장면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통하여 공의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행적에 대하여 상고하면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면 용서받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내 생명이 귀한 것 같이 타인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며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3. 하나님과의 평강을 유지하도록 합시다(33-35)
솔로몬은 요압을 죽여 죄악을 제거함으로써 다윗의 자손과 그 집과 그 위에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모든 권력이 솔로몬에게 집중되었고 이스라엘 앞에는 부국강병의 길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래전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 다윗과 그의 후손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말씀도 이뤄진 것만 같습니다(사무엘하 7:12).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토록 말씀에 신실하시고 죄를 도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습 돌아볼 것을 요청하는 듯합니다. 다만 여기서 성경을 덮기엔 께름칙한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과연 우리는 오늘 말씀을 잘 적용해 하나님의 대리인이었던 솔로몬이 내세운 논리, 인과응보에서 벗어날 수 있냐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아비아달과 요압과 같은 죄지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당장에 말씀을 사모하며 새벽 묵상도 챙기고 주일예배 및 각종 모임과 봉사도 빠지지 않지만,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은 적이 있는지 돌아보면, 저부터 부끄럽습니다.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우지 않았는지, 과연 사람들을 선대하며 용서했는지 돌아보면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솔로몬의 칼날을 피할 탈출구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비극은 오늘 본문 속 칼날을 휘두른 솔로몬도 비껴가지 않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은 솔로몬을 그리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는 잠시 잠깐 다윗을 뛰어넘는 왕으로 묘사되는 듯하지만, 이후 수많은 이방 처첩을 두며 우상 숭배자의 길을 걷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든든히 세우지 않습니다. 도리어 나라를 두 동강 내는 주역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어두운 면은 사실 오늘 본문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솔로몬의 정적 숙청 시작 기점이 된 건 그에게 남긴 다윗의 유언이었습니다(열왕기상 2:5-9). 그런데 그 유언에 아비아달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아비아달에 대한 조치는 솔로몬 개인의 판단이었습니다. 또 솔로몬이 한 일로 오래전 하나님의 신탁이 이뤄졌다는 성경 기자의 말은 조금 다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아비아달을 파면한 솔로몬이 구태여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나님 말씀을 도구 삼았다’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수 세기 후 아비아달이 산 아나돗에서 다윗 왕조와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 말입니다(예레미야 1:1). 또한 솔로몬은 다윗이 유언에서 꼭 집어 말한 바르실래의 아들들에 대한 선대는 실천하지 않습니다. 과연 솔로몬의 행동이 정당했는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요압 처리 과정에서는 율법을 준수하는 바른 왕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21장은 고의적으로 살인한 자는 제단에서 잡아내려 죽이라고 명합니다(출애굽기 21:14). 하지만 솔로몬은 제단 뿔을 잡은 요압을 그대로 죽였습니다. 자기 형편대로 율법의 문자적 표현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인 것입니다. 또한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깨끗하게 하겠다는 그의 주장도 다소 불편합니다. 사실 솔로몬 자신부터 까닭 없이 무고하게 흘린 피를 통해 태어난 자 아닙니까. 그런 그가 자기 집은 요압과 다르다고 열변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즉, 솔로몬도 요압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도 자기 모든 수단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무자비 한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를 때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코 솔로몬보다 낫다고 내세울 게 없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성경이 마땅히 죽을 자라고 고발하는 게 꼭 나 자신인 것만 같아 마음이 어려운 걸 넘어 두렵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인과응보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에게 이미 임해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추악한 죄인들의 형틀인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세상 누구보다 비참하게 수치스럽고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세상의 인과응보 논리를 뒤집기 위해서입니다. 인과응보로는 이 세상에 살아남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세상 모든 이의 죗값을 치르는 은혜로 이 견고한 논리를 뒤엎어 그의 사랑하는 자들, 스스로 사람의 아들-바라바라는 정체성에 사로잡혀 죽음을 향해 걷는 이들을 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라바를 대신해, 솔로몬을 대신해, 오늘 우리 모두를 대신해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을 기억할 때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곱씹으십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은 우리가 바른 행실을 할 때, 또는 우리 곁의 악한들에게 우리가 정의를 행사할 때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 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그 평강을 우리에게 가득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또 넘어질 것이고, 세상에는 악인이 활개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남겨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죽을 자이지만 영원한 생명 얻은 자로서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책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할 책임, 그렇게 그리스도를 좇아 오늘 우리 삶에 신실할 책임 말입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우리 앞에 놓인 이 영화로운 걸음을 떼시는 교우님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죄를 지은 사람이 어떤 최후를 맞는지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비아달도 요압도 모두 하나님의 길을 좇지 않고 자기 욕망을 따랐습니다. 이런 그들이 맞이한 건 초라하고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게다가 성경은 이 모든 걸 집행한 하나님 대리인 솔로몬조차 그들과 매한가지임을 밝힙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을 고발하는 말씀 앞에서 오늘 우리는 부끄러움을 넘어 두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죄책에 결코 낙심하지 않음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까닭 없이 무고하게 죽으셨지만, 도리어 모든 죄책을 자신이 감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말입니다. 분명 오늘 우린 또다시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릴 사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영원히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안에서 성도의 책임을 다하며 살게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