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30 금요기도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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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5:21-24] 아버지를 떠난 아들
[눅 15:21-24] 아버지를 떠난 아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5장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회복의 여정 - 아버지와 잃은 아들의 이야기)
(회복의 여정 - 아버지와 잃은 아들의 이야기)
성경 구절: 눅 15:11–32
성경 구절: 눅 15:11–32
요약: 이 비유는 돌아오고자 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용서 찾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잘못된 선택을 한 자에게도 회복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적용: 이 이야기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회복을 기도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교회 내에서 누군가가 힘든 시간을 겪는다면 그들을 지지하고 함께 회복의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교훈: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시고 회복하시는지를 배우고, 우리는 서로에게 그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이 본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는지: 이 비유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열려 있는 회복의 기회를 나타내며,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큰 아이디어: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돌아오는 자를 기다리며, 교회는 서로에게 사랑과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추천 연구: 복음주의 목사님, Logos를 사용하여 이 비유와 관련된 속죄 및 회복의 개념을 더 깊이 탐구해보세요. 아버지의 마음과 아들의 변화를 중심으로 연구하여 말씀을 더 잘 적용해 보실 수 있습니다.
1. 자아 인식의 시작
1. 자아 인식의 시작
눅 15:11–19
아마도 이 구절에서 당신은 자신의 방황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잃었던 아들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이를 통한 고난을 직시합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고, 이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회복의 첫걸음이 자아 인식과 회개에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여야 함을 제안합니다.
2. 환대의 환영
2. 환대의 환영
눅 15:20–24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를 언제나 반갑게 맞이하십니다. 아들은 돌아가기를 결심했고, 그를 맞이하는 아버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마다 그 분은 기쁨으로 우리를 맞이하신다는 사실을 제안합니다. 교회에도 이와 같은 환영과 포용의 문화가 있어야 하며, 서로에게 이해와 사랑을 베푸는 공동체를 조성해야 할 것입니다.
3. 희생과 화해
3. 희생과 화해
눅 15:25–32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형은 아버지의 사랑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축복할 때 공동체 내의 진정한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 함을 제안합니다.
[본론- 아마 서론?]
오늘은 누가복음 15장 11-32절에 기록된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이 비유를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보는 거침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물론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세리들과 죄인들 그리고 이방인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셨고, 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당일에도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에게 가까이 몰려들었습니다’(눅 15:1)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얼마나 기쁘셨을지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음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비난하는 무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였습니다. 누구보다 기뻐해야 할 사람들이 비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에게 전하셨습니다.
[본론]
누가복음 15장 11-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자신이 받을 유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유산은 무엇입니까? 보통 사람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구두로 약속하거나 유언장에 유산 분배 내용을 작성하지요.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시는데, 두 아들에게 유산을 나눠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산에는 아버지의 몫은 없으니 생계를 이어가기가 어렵겠지요.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이 선포되는 사회가 가부장적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 패륜 아들을 혼내고 돌려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받을 유산을 나누어줍니다. 자녀가 아들 둘이였고 장자가 다른 형제보다 두 몫의 유산을 받게 되어 있으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 유산의 3분의 일을 받았을 것입니다. 상당한 양이지요? 아들의 요청에 아버지는 재산을 갑작스럽게 처분해야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도 둘째 아들이 유산을 미리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이 재산을 모두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아버지의 영향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었나 봅니다.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잘 살면 모르겠는데, 허랑방탕하게 모든 재산을 낭비합니다. 이제 둘째는 빈곤한 거지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종이 되어서야 자신의 선택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계획을 세웁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5:17–19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하고 아버지께 할 말을 연습합니다. 그러고 아버지께 돌아가지요. 돌아가는데, 저 멀리서 아버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로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둘째가 아버지께 할 변명을 준비했잖아요, 그렇죠?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가 변명을 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그를 먼저 환대합니다. 둘째 아들은 환대를 받고 뒤늦게 변명하지만, 아버지는 듣지 않고 종들에게 말합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21절에서 24절 말씀 입니다.
누가복음 15:21–24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 인해 제일 좋은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새 옷을 처음 꺼내 입었을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그 때 어떤 기분이 들었습니까? 기분 좋고 설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새 옷이 나에게 잘 어울리는지 살피셨겠죠. 둘째는 어땠을까요? 둘째는 알거지가 되어 돌아왔죠. 갑자기 제일 좋은 옷을 입게 된 아들은 자신이 새로운 사람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가락지는 무엇입니까? 바로 인장 반지를 의미합니다. 인장 반지는 인장, 도장과 반지를 합친 모양의 반지입니다. 인장 반지는 봉인할 때나 계약할 때 사용했으며,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였습니다. 인장 반지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등장합니다.
창세기 41장 41-43절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창세기 41:41–43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그런 인장 반지를 끼워주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들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킨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집안에서 다시 아들로 회복된 것입니다. 다시 집안 사람이 들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아버지가 둘째를 다시 상속자로 삼은 것입니다. 이미 둘째로 인해 아버지의 자산은 3분의 2로 줄어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더 나아가 송아지 잔치를 엽니다. 그 당시 소는 굉장히 귀한 재산이였습니다.아마 모든 동네 사람들까지 함께하는 큰 잔치였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니까 어떻습니까?
첫째 아들이 아버지께 화날 만 하지 않습니까? 맏아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잔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먼저 다가갔던 것처럼, 맏아들에게도 먼저 다가가서 잔치에 올 것을 권합니다. 28절에서 3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5:28–32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맏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들이였습니다. 나에게는 염소 새끼라도 잔치를 베푼 적이 없는데, 이 자격 없는 아들을 위해서 송아지를 잡으셨습니까?” 첫째는 동생을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마치 남을 지칭하듯이 말합니다. 제가 아까 가부장적인 사회라고 말씀드렸죠? 아랫사람이 윗 사람을 부를 때는 극진히 예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한글성경에서는 맏아들이 점잖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들립니다.
누가복음 15장 29절 영어성경인 ESV 성경입니다.
English Standard Version Chapter 15
29 but he answered his father, ‘Look, these many years I have served you, and I never disobeyed your command, yet you never gave me a young goat, that I might celebrate with my friends.
맏아들은 “존경하는 아버지여”라고 하지 않고 Look!으로 말을 시작합니다. “보소서!”, “이것 보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잔치는 가족들만의 잔치가 아니였지요. 맏아들은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한글성경에서는 ‘얘’라고 기록되었지요? ESV성경에서는 ‘Son’, ‘아들아’로 쓰였습니다. 31-32절 말씀을 제가 바꿔서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31–32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동생이 집을 떠난 것을 죽음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둘째 아들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비록 재산은 줄어들었고, 첫째 아들이 유산을 받을 유산은 더 줄어들겠지만, 맏아들이 아버지 곁에 있을 동안은 아버지의 재산은 맏아들 것입니다. 맏아들은 둘째로 인해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자신이 입게 된 손해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아버지가 자기 재산을 사용하는 일에 결정권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맏아들은 순종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누구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둘 다 아버지를 이용해서 이기적인 목표를 이루려 했을 뿐이지 아버지를 사랑해서, 아버지를 섬긴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이 누가복음 15장의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위한 말씀이라고 했지요. 눈치 채셨겠지만, 이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고, 둘째는 세리와 죄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죽은 사람도 일으키는 화제의 인물이였죠.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과 교제하셨지요.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1-1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9:11–13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은 긍휼을 원하십니다.
교회에는 매주 새로운 사람들이 오지요.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이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의도치 않게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분을 향한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주께로 돌이켰을때,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지를 떠올려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신 것처럼, 그분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버지의 잃은 영혼을 되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한다는 것은 많은 인내와 시간, 인내와 자기 낮춤 등 많은 헌신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영혼을 주께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오늘도 은혜와 사랑을 베풀 영혼을 찾고 계십니다. 사랑은 뜻과 생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뜻을 두십시오. 금요기도회에 모이신 모든 분들이 잃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시는 귀한 사명 감당하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잃은 영혼과 함께 주님과 큰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